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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수한 사진이 모두 사랑이었네

[사진책 읽기] 테일러 존스, <잘 있었니, 사진아>

등록|2015.09.12 12:00 수정|2015.09.12 12:00
우리 집 작은아이는 큰아이를 사진으로 찍을 적에 으레 고개를 빼꼼 내밉니다. 이러면서 "왜 나는 안 찍어? 나도 찍어 줘요"하고 묻습니다. 이 작은아이는 이른새벽에 조용히 일어나서 노는데, 늦게 자고도 일찍 일어나서 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살며시 사진기를 들어 찰칵 한 번 찍으면 어느새 눈치를 채고는 방실방실 웃으며 "또 찍어요. 더 찍어요" 하고 말합니다.

아이들은 저희 아버지가 언제 저희를 사진으로 찍는지 압니다. 아버지가 빙글빙글 웃고 노래하는 때에 사진기를 손에 쥡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즐거울 적에 사진을 찍으니, 아이들로서도 '아하, 우리 아버지가 즐거운가 보네. 그러면 사진 얼마든지 찍어야지'하고 여길는지 모릅니다.

▲ 겉그림 ⓒ 혜화동

할아버지 자동차에 태우고 끌기. 이제는 가는 곳마다 할아버지를 태우고 다닐 수 없지만, 할아버지가 인생을 살아오시면서 느낀 그 기쁨은 아직도 나를 따라다닌다. (Sandy/23쪽)

우리를 돌봐 주던 할아버지가 계시던 때가 그리워요. 하지만 부디 걱정 마세요. 제가 여전히 여기서 할아버지의 꽃들에 물을 주고 있으니까요. (Marisa/36쪽)

테일러 존스님이 엮은 사진책 <잘 있었니, 사진아>(혜화동, 2013)를 찬찬히 읽습니다. 테일러 존스님은 어느 날 문득 알아챘다고 합니다. 이녁 어머니와 아버지가 언제나 이녁 곁에서 이녁을 사랑하면서 살림을 꾸렸구나 하고 알아챘다고 해요. 그래서 옛날 사진을 한 장 꺼내어 '오늘 이곳'에서 맞대면서 '우와, 지난날에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를 이렇게 바라보았구나!' 하고 느꼈다고 해요. 이리하여, '겹쳐서 찍는 사진 이야기'를 선보였다고 합니다.

아빠 엄마,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낼 수 있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전 사랑받은 기억밖에 없어요. (Ronnie/43쪽)

40년 전, 갓 결혼한 부모님은 사랑이라는 재산을 일구기 위해 저 문을 열고 들어오셨어. 아버지가 지은 이 집은 우리 가족의 소중한 추억으로 채워졌지. 그 행복한 시간들은 영원히 우리 거야. (Fermec, 87쪽)

겹쳐서 찍는 사진이란, 말 그대로 겹쳐서 찍는 사진입니다. 오늘 이곳은 액자처럼 바깥을 감싸는 틀입니다. 한복판에는 내가 예전에 찍힌 사진입니다. 또는 우리 어머니나 할아버지가 예전에 찍은 사진입니다. '찍은 때'는 달라도 '찍은 곳'이 같은 사진을 살며시 겹치는 셈입니다. 아스라하다 싶은 시간이 흘렀어도 예나 이제나 한결같이 흐르는 한 가지를 만나려고 하는 사진놀이인 셈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한결같이 흐를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오직 사랑입니다. 다만 한 가지 사랑입니다. 다른 것은 더 없어요. 서로 아끼고 돌보는 따사로운 마음인 사랑이 흐를 뿐입니다. 우리 삶에는 언제나 사랑이 흘러요. 사랑 아닌 다른 것이 흐르지 않습니다.

할머니가 옆에 계실 때는 햇볕이 훨씬 더 환하게 비췄어요. 작별 인사는 할 수 없었지만 할머니가 우리 곁을 떠나 천국으로 가실 때 할머니의 따사로운 영혼을 느낄 수 있었답니다. 보고 싶어요, 할머니. (Ivan, 122쪽)

23년 전엔 이렇게 꼭 붙어 있었는데, 지금은 얼굴 보기도 힘드네요. 언니랑 오빠가 보고 싶네요. (Danae, 150쪽)

▲ 집이 낡든 새것이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곳에서 나를 낳아서 돌보며 사랑을 나누었으면 즐거운 보금자리입니다. 사진 한 장은 바로 이 사랑을 따사로이 보여줍니다. ⓒ 혜화동


사진책 <잘 있었니, 사진아>는 참말 사진한테 절을 해요. 꾸벅 허리를 숙이거나 손을 흔들면서 불러요. "잘 있었니? 나도 잘 있었어." 마흔 해 묵은 사진이 잘 있었느냐고 묻습니다. 스무 해 지난 사진이 잘 있었느냐고 묻습니다.

한 번 찍고 파묻는 사진이 아니에요. 사진을 찍는 까닭은 틈틈이 지난날을 돌이키면서 오늘을 되새기고 앞날을 그리려는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꿈을 찍는 사진입니다. 오늘 이곳에 선 꿈을 찍고, 앞으로 이룰 꿈을 찍지요. 오늘 이곳에서 누리는 사랑을 찍고, 앞으로 이곳에서 가꿀 사랑을 찍습니다.

가끔은 자기 집 뒷마당에 앉아 그곳에서 보이는 풍경들을 마냥 즐길 필요도 있다. 내 아이도 그렇게 살기를. (Amy, 201쪽)

▲ 우리가 함께 나눈 삶이 사진 한 장에 깃들어서 두고두고 오래된 이야기로, 그런데 오래되었어도 새로운 이야기로 흐릅니다. ⓒ 혜화동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마흔 해 남짓 앞서 찍은 사진을 오늘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스무 살에서 서른 살로 달리던 두 젊은 사람은 어떤 마음으로 한집을 이루기로 했을까요. 마흔 살이 넘은 '아이'는 '앳된' 어버이를 바라보면서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 집 여덟 살 어린이와 다섯 살 어린이는 저희가 찍힌 두어 살 적 모습을 보며 새삼스럽다고 여깁니다. 저희가 어릴 적에 어떤 모습을 보여주었는가를 사진에 비추어 새롭게 바라봅니다. 며칠 앞서 신나게 놀던 모습을 찍은 사진을 오늘 바라보면서 며칠 앞서 그야말로 어떤 기쁨으로 신나게 놀았는가를 새록새록 아로새깁니다.

노래가 흘러 사진이 됩니다. 노래가 빛나면서 사진이 됩니다. 노래가 어느덧 사진으로 거듭납니다. 노래 한 마디가 사진 한 장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네 삶도 내 삶도 모두 노래입니다. 네 이야기도 내 이야기도 언제나 노래입니다. 그러니, 우리 어버이가 우리 모습을 수수하게 찍은 사진은 모두 노래요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우리가 우리 아이를 수수하게 찍은 사진도 한결같이 노래이면서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글쓴이 누리사랑방(http://blog.naver.com/hbooklove)에도 함께 올립니다.

책이름 : 잘 있었니, 사진아
테일러 존스 엮음
최지현 옮김
혜화동 펴냄, 2013.1.30.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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