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호흡 크게 한번, 수녀원 '금단 구역'에 들어간다
[여행 책에 없는 유럽 종단기 14] 생폴드방스 수녀원 더 깊게 들여다보기
▲ 프랑스 생폴드방스 도미니코 수녀원 건물 외부 모습 ⓒ 송주민
* 전편에 이어 계속(☞ "우린 웃기는 여자들" 수녀들과 함께한 저녁)
수녀님들과의 저녁식사, 배가 적당히 찼을 무렵, 로사 수녀님이 내게 묻는다.
"컴퓨터 조금 할 줄 아시나요? 내 방 컴퓨터가 문제가 있는데 고칠 줄 몰라서요."
"조금 할 줄 아는데, 봐드릴까요?"
"아, 그래요? 잘됐네. 온 김에 올라가서 봐줘요."
수저를 내려놓고 수녀님의 발걸음을 따른다. 뒤를 슬쩍 돌아보더니, 내게 한 마디 던지는 그녀.
"여기서부터는 정말로 금단의 구역에 들어가는 거예요."
함께한 식사 자리도 어지간하게 제한된 공간일 텐데, 이제는 아예 금지된 구역이란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어릴 적 만화 속에서 보고 상상하던 비밀스러운 중세 저택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마치 그런 기분이다.
빙글빙글 이어진 나선형 계단을 사뿐히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디며 걷는다. 여기는 속세가 아니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수도자들이 되뇐 영혼의 옯조림이 잔뜩 세월에 삭은 사방의 벽돌에도 온통 묻어있을 것이다.
단 몇 걸음 만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의 벽을 넘어와 버렸다. 특별한 일 아니고는 이렇게 나 같은 사람이 드나들지 않았을 봉쇄된 곳,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는 단절하고 오직 '하느님'만을 찾아서, 그러나 인간이기에 먹고 자고 씻고 볼일 보고, 때론 다투고, 시기하고, 그러면서도 아끼고 사랑하고…. 하얗게 거룩하고도 거멓게 때가 묻은 삶의 흔적이 남아 있을 곳.
예고 없이 들어간 금단의 구역
▲ 프랑스 생폴드방스 도미니코 수녀원, 담장 밖에서 바라본 풍경 ⓒ 송주민
그런 생각을 하니, 여기 서 있는 기분이 현실적이지 않으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이다. 여긴 현실 속이다. 여기는 현실이 아니다. 몽환적인 감정에 몽롱해지다가도 잔뜩 깨어있게 된다. 머나먼 땅이라 그럴까. 익숙한 우리땅에서의 수도원에서라면 이런 차원을 넘어온 기분은 아니었을까.
계단을 오르다가 옆으로 이어진 복도를 엿본다. 일렬로 방문들이 나 있다. 아마도 수녀님들이 머무는 독방들일 것이다. 그 앞에는 편지가 하나둘씩 놓여 있다. 나도 저 편지와 같이 바깥세상에서 먼지처럼 떠돌다가, 누군가의 손에 의해 여기로 전해져 들어온 것은 아닐까. 나는 뭐라고 적힌 전령의 뜻을 가지고 지금 여기에 와 있는 걸까.
지금으로써는 '컴퓨터 수리'다. 수녀님을 따라 방문 하나를 열고 들어간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대학 시절 한 여대 학생회실에 조심스럽게 홀로 문을 열고 들어갈 때의 그 어색하고 묘한 기분이 불현듯 스친다.
"조금 정리가 안 돼 있어도 양해해주세요."
'원장' 방이지만, 소박할 뿐이다. 책상에는 그녀가 양해를 구한 것처럼 약간 어지러이 서류와 종이들이 늘어져 있다. 여대 학생회실도 예상 밖으로 너저분했었지. 그 순간이 겹치며, 괜스레 혼자 웃는다. 수녀원, 그것도 이 깊숙한 독방 안까지. 전혀 예고 없는 방문이다. 치장 없는 민낯 그 자체의 삶터이자 수도처에 들어와 있는 셈이다.
책상 뒤에는 허름한 침대가 놓여 있다. 그 앞에도 허름한 무언가, 손씻기와 세수 정도만 할법한 세면대가 있다. 별다른 치장 거리는 없다. 테레사 수녀는 "인생이란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과 같다"고 말했다지. 딱 그런 '여인숙'이 연상되는 누추할 정도로 소박한 방이다.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 같이 살다 갈 곳, 무엇을 그리 싸 짊어들고 붙들어 매려고 애를 쓰는가. 방 분위기 자체가 사방에서 그렇게 말해주는 듯하다.
프랑스 신부가 전한, 개미와 같이 살고 따르는 삶
불어 키보드에 불어 윈도라 낯설다. 같은 프로그램도 언어가 다르고 생소하니 다루기 힘들구나. 제어판을 들락거리다가, 결국 별로 손도 못 보고 '컴퓨터 수리'는 끝.
"괜찮아요. 내려갑시다."
수녀님은 먼저 내려가고 나는 자리에 조금 더 머무른다. 잠시 눈을 감는다. 도대체 나는 여기에 왜 있는가.
성당은, 종교는 그저 집안 어른이 다니는, 그리하여 단지 '문화'적으로만 친숙한, '예의상' 세례를 받은 정도로 살아왔다. 지난해 여행까지만 해도 수도원은커녕 성당도 그리 유심히 들르는 곳이 아니었다. 미술관에서도 종교를 주제로 한 작품은 휙휙 지나가곤 했다. 그러던 내가 이 어지간히 '신심' 깊은 신자들마저도 들어와 보기 쉽지 않은 수녀원 독방에 들어와 있다니.
▲ 프랑스 생폴드방스 도미니코 수녀원에 있는 작은 성당에서 ⓒ 송주민
나선형 계단을 다시 내려와, 식당으로 돌아가면서도 내내 이런 생각이 맴돌았다. 식탁에 앉자, 함께 온 그녀는 아침 미사 때를 상기하며 수녀님께 묻는다.
"강론 시간에 신부님 표정이나 몸짓, 이런 게 매우 진지하게 보이던데요. 목소리도 나긋나긋하게 들렸고요. 말씀도 길었고. 무슨 내용이었던 거예요?"
변호사 출신의 사제, 법정에 서던 습관이 묻어서 '진지'하게 강론을 하신다나. 집안의 반대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야 뒤늦게 사제의 길을 택한 사람이라고 그를 소개한다. 그러고는 아침에 어떤 말씀이 이어졌는지, 로사 수녀님이 우리에게 번역해서 전한다.
"우리는 거대한 이념이나 지식이나 철학을 좇아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저 행위로, 실천으로, 행동으로 증거할 뿐. 우리가 믿는 그분께서 그러하셨듯 말이죠. 우리도 '그리스도의 개미'가 돼 묵묵히 낮은 곳에서 개미의 발걸음처럼 실천하고 행동하며 살아가기를. 일상을 사는 손짓 하나하나에, 사소한 움직임조차도 하찮게 여기지 않고 묵직하게 거룩함을 담아 뚜벅뚜벅 걷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곳에 은총이 함께 가득할 것입니다."
작은 행동, 몸짓 하나하나에도, 스치듯 지나가는 눈빛에도 소중함과 진실함이 가득한, 그런 관계로 이뤄진 세상, 천국이 있다면 그런 곳이 아닐까. 식사를 마치고 다시 눈을 감는다. 내가 다 알지 못하는 소중한 인연의 손길을 통해 이 자리까지 전해진 일용할 양식들, 하나하나를 다시 개미의 발걸음처럼 떠올리고 음미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순간.
수녀원과 생폴드방스에서의 마지막 밤
수녀님들의 거처를 나와, 다시 마당을 걷는다. 해는 완전히 떨어졌다. 그러나 오늘도 달빛이 밝다. 오렌지 나무밭을 거닐고, 달빛을 닮은 오렌지는 주황빛 별들인 것마냥 사방에서 반짝거린다. 울퉁불퉁 돌로 된 길 위에 멈춰 서서 오렌지와 달을 천천히 번갈아가며 바라본다.
그래, 원래 이랬었지. 오렌지 하나에, 발밑에 떨어진 삭은 나뭇잎 하나에, 쏟아지는 달빛 한줄기에도, 그것들을 바라보는 순간의 눈빛에도 행복은 숨어 있었지. 행복은 단순하고 소박했지.
처음 들어온 날, 이곳에 젊은이들이 오면 변치 않고 그대로인 모습에서 평온함을 느낀다고 로사 수녀님이 말했었다. 언제나처럼 뿌리내리고 있을 나무와 같은 곳을 만났다. 그것도 지구 건너편 땅에 솟아 있는, 복잡한 일상에 지쳐 훌쩍 떠나와도 안락하게 머무를 수 있는 곳을. 멈춰 서서 한결같음을, 언제나 와도 그대로인 것마냥 넉넉하게 품을 내어줄 곳을 알게 됐다.
내일이면 수녀원을 떠난다. 생폴드방스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가난한 젊은 여행자들에게 '낯선 여인숙' 이상으로, 아니 그 어떤 고급 호텔보다 넉넉하고 정 있고 운치 있는 거처를 내어준 것에 감사하며, 믿음을 붙잡고 변하지 않는 나무를 자처하는 그녀들의 수도생활이 뜻대로 나아가길 빌었다. 작별의 밤, 오렌지 나무들 앞에서 다시 차분히 눈을 감는다.
▲ 도미니코 수녀원 근처에서 바라본 프랑스 남동부 생폴드방스 전경 ⓒ 송주민
○ 편집ㅣ김지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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