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 경 조들암시니', 이 말 참 맘에 드네요
[30일, 제주를 달리다 20] 그 열여덟 번째 날
▲ 저 멀리 어렴풋이 보인는 위미항 등대 ⓒ 황보름
6시 40분, 러닝복으로 갈아 입고 밖으로 나왔다. 7시도 안 된 시간인데 벌써 햇볕이 뜨겁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뛰러 나온 이유는 오늘 달리기는 적어도 1시간은 넘게 걸릴 것 같아서이다. 처음으로 9km에 도전하는 날이다.
게스트하우스 앞에서 우선 몸을 풀었다. 다리도 풀고 어깨도 풀고 허리도 풀고. 그런데 그때 경차 한 대가 눈에 들어온다. 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아 조심히 들여다보니 한 여자가 운전석에서 잠을 자고 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봤다. 어딘가 눈에 익다. 아, 어제 만난 그 사람이구나!
어제 한라산 등반을 끝내고 들어온 방엔 새로 온 게스트 한 명이 짐을 풀고 있었다. 인사를 하고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끼린 으레 그렇듯 서로의 지난 여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반갑게도 그녀는 내가 내일부터 묵을 게스트하우스에서 오는 길이라고 했다. 나는 그곳이 어땠냐고 물었다. 무지 재미있었단다. 재미있는 사람들을 만나 엄청 잘 놀았단다.
사실 내가 다음에 갈 게스트하우스는 선택하는 데 고민을 많이 한 곳이다. 밤마다 바비큐 파티가 벌어지고 떠들썩한 분위기로 유명했다. 과연 내가 그곳 분위기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의심돼 오랫동안 묵은 다른 게스트하우스와는 달리 2박만 예약한 터였다. 그녀는 말했다.
"제주에 온 지는 4일이 됐어요. 거기서만 3박을 묵었는데요. 지금 생각하니까, 흠… 그러고 보니 제주에 와서 관광한 데가 한 곳도 없네요. 첫날 바비큐 파티에서 만난 사람들하고 내내 술 먹고 놀기만 했거든요. 밤새 놀고 마시고 오후까지 자다가 또 만나서 술 마시고. 외국인 두 명도 끝까지 같이 놀더라구요. 아마 그 사람들은 오늘도 같이 놀 거예요. 그런데 여긴 정말 조용하네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역시 2박만 예약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술판에 빠지면 도통 헤어나지 못하는 나이니, 스스로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 몇 마디 더 주고 받은 후 씻으러 자리를 떴다. 씻고 돌아오니 그녀는 아까와는 달리 멋진 모습으로 변신해 있다. 이따가 보자고 말하며 그녀는 방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나서 그날 들어오지 않은 것이다.
이곳 게스트하우스는 밤 12시가 넘으면 아예 출입이 금지된다. 때문에 밖에서 잠을 잘 수밖에 없었던 듯했다. 차 안에서 몸을 웅크린 채 힘들게 자고 있는 그녀를 깨울까 하다가 '아서라' 싶었다. 민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제 아침이니 위험한 일은 없을 것이다.
개야, 제발 나를 그만 내버려 둬
그녀를 뒤로 하고 공천포 해안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미리 계산해 보니 이곳 해안도로를 세 번 정도 왕복하면 9km가 채워질 것 같았다. 몇 미터 달리지도 않았는데 새삼 긴장감이 온 몸을 휘감는다. 과연 오늘 잘 달릴 수 있을까?
1.3km정도를 달리자 마을로 이어지는 길이 나왔고 그곳에서 반대로 돌아왔던 길로 다시 달렸다. 이대로만 왔다 갔다 하면 사람도 별로 없고 차도 별로 없는 이 도로를 나만의 달리기 레일로 삼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분이 좋다. 뭔가 일이 술술 잘 풀리는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얼마쯤 달렸을까. 악! 또, 개다!
한 마리가 아니라 이번엔 두 마리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골목 어귀에 묶여 있는 개 한 마리는 나를 죽여라 노려보며 짖어댔고, 또 다른 한 마리는 아예 자리를 박차고 나와 따라 오며 짖어댔다. 여차하면 내 엉덩이가 개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갈 참이었다. 나는 그렇게 가까이에서 개 이빨을 본 적이 없었다.
망했다. 나는 멈춰 섰다. 그리곤 개에게 손을 휘저으며 '아니'라는 제스처를 무의미하게 해 보였다. 너를 열 받게 하려고 뛴 건 아니라는 나름의 표현이었지만, 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 제스처에 더 약이 올랐는지 목소리만 더 커졌다. 심장이 쪼그라든 나는 그냥 다 포기하고 가만히 서 있았다. 물려 죽으나, 겁먹어 죽으나 죽는 건 마찬가지일 것 같다는 강렬한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여기서 죽는 건 아까웠기에 다시금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 천천히 개에게서 벗어났다. 아, 정말 제주 개는 밉다.
그렇다고 개 때문에 달리기를 포기할 수는 없는 법. 개가 나타났던 반대편 방향으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해안도로가 아닌 마을 속으로 들어가 달린 것이다. 그렇게 마을을 가로 질러 반대편 위미항 쪽으로 넘어가면 뛸 공간이 나올지도 몰랐다.
혹시나 개가 있나 싶어 최대한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마을을 달렸다. 바다 쪽으로 가려면 무조건 오른쪽 골목으로 접어들어야 할 것 같아 그렇게 했다. 뛰다 보니 아주 귀여운 다리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대서교'였다.
▲ 우연히 만난 색색의 옷을 입고 있던 다리 ⓒ 황보름
▲ 제주도 말은 촘말로 귀허고 꼽딱한 보물이우다. ⓒ 황보름
▲ 나 이녁 소못 소뢍햄수다. ⓒ 황보름
대서교의 돌로 만든 난간은 색색의 옷을 입고 있었고 색색의 옷 위로 제주어와 제주어에 상응하는 표준어가 앙증맞은 글씨체로 쓰여 있었다. 아무래도 이곳을 지나가는 올레꾼들을 위한 마을의 작은 배려가 아닐까 싶었다.
개에 놀라 힘이 빠지기도 했고, 그냥 지나치기도 아쉬워 달리기를 멈추고 글 하나하나를 읽어 보았다.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다.
'차탕 다니지 말앙 촌촌이 걸으멍 지꺼지게 놀당 갑서.'
'차타고 다니지 말고 천천히 걸으면서 즐겁게 놀다 가세요.'
'편안 하우꽈? 제주 오난 어떵 하우꽈?'
'편안 하십니까? 제주에 오니 어떻습니까?'
'제주도 말은 촘말로 귀허고 꼽딱한 보물이우다.'
'제주도 사투리는 정말로 귀하고 아름다운 보물입니다.'
'나 이녁 소못 소뢍햄수다.'
'제가 당신을 무척 사랑합니다.'
'무사 경 조들암시니.'
'왜 그렇게 걱정하고 있니.'
하나 같이 읽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이 따뜻해졌다. 특이 이 문장이 참 좋았다. '무사 경 조들암시니.' '왜 그렇게 걱정하고 있니.' 그래, 뭘 그렇게 걱정하고 있니. 지금 이 순간 행복하면 좋은 것 아니니. 나는 지금 달리고 있으니 참 좋은 것 아니니.
좋은 글귀에 힘을 얻은 나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다리를 건너 위미항으로 이어진 해안도로로 접어들었다.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고 왼쪽으로는 사진 갤러리 겸 카페, 그리고 조금 더 가자 영화 촬영지로 유명한 '서연이네 집'이 보였다.
위미항까지 쭉 달렸다. 얼추 5km는 달려왔다. 왔던 길로 돌아가면 9km가 채워질 것 같다. '헥헥' 거리며 있는 힘 없는 힘을 다 끌어내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너무 힘이 들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달리고 달려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할 즈음 러닝 어플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9km를 완료하셨습니다.' 와, 해냈다! 펄떡펄떡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시간을 보니 8시 20분이다.
뿌듯한 마음을 가득안고 씻은 후 얼른 조식을 먹으러 내려왔다. 다 먹고는 방에 널브러졌다. 실컷 뛰고 땀 흘리고 샤워 하고 밥까지 먹은 터라 세상이 다 내것 같은 기분이다. 몸도 개운한 것이 힘도 불끈 솟는다. 오늘은 왠지 더 힘차게 여행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 생각은 착각이었다는 걸 몇 시간 후면 알게 된다.
오늘은 어디를 갈까. 원래는 근처 쇠소깍으로 가려고 했다. 쇠소깍은 예전에 친구들과 한 번 와본 적이 있다. 그 때 우리는 스파게티와 햄버거를 먹었는데, 셋 다 그 맛에 놀랐다. 그렇게나 많이 먹었던 스파게티가 이렇게나 맛있는 음식인 줄 그날 처음 알았다. 원래 먹는 것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지만, 이 스파게티만큼은 꼭 다시 먹어보고 싶어 그곳에 가려고 한 거다.
하지만 오전 달리기로 인해 생각이 바뀌었다. 아침에 달리면서 지나쳤던 곳들을 다시 천천히 둘러보고 싶었다. 그래, 위미항으로 가자.
등대에 기대 앉아 한껏 노곤해진 날
▲ 여행객을 반겨주던 새파란 건물 '웰컴 위미리' ⓒ 황보름
밖으로 다시 나오니 눈이 아플 정도로 강렬한 태양빛이 쏟아진다. 개 있는 쪽은 쳐다도 보지 않고 마을을 가로질러 대수교를 지나 해안도로로 빠져 나왔다. 사진 갤러리 겸 카페를 공들여 둘러보고, 뭘 더 볼까 하다가 카페 맞은 편 해변가로 내려왔다. 멀리서도 왠지 음침해 보이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의 해변이었다.
바닷물이 밀려오는 곳까지 걸어갔다. 낮은 파도에 밀려오는 물은 흙빛이었고, 모래가 아닌 새까만 돌들이 바닷물을 받아내고 있었다. 내가 서있는 해변가 왼쪽으로는 사람 키를 넘는 현무암바위들이 버려진 듯 서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곳 해변은 지금까지 봤던 어느 해변과도 분위기가 달랐다.
▲ 분위기 부서운 해변가 ⓒ 황보름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그 분위기 때문인지 왠지 으스스해지는 게 여름에 오면 아주 제격일 것 같았다. 그렇게 흙빛 바다를 별 생각 없이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겁이 덜컥 났다. 주위엔 사람이 아무도 없고, 시커먼 바다와 바위만 가득했다. 뒷골이 송연해진 나는 개를 만났을 때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해변에서 도망쳐 나왔다. 빠져 나온 뒤 돌아 본 바다 저 멀리에서는 해녀들이 물질을 하고 있었다.
방금 그 바보 같은 행동에 스스로 겸연쩍어 하며 몇 미터 걷자 저 앞에 '서현이네 집'이 보인다. 날도 너무 덥고 목도 심하게 마르던 차이니 저곳에 들러 시원한 커피나 한잔 마시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카페 앞에는 점심이 되기도 전인 이 시간에도 차가 빼곡히 주차되어 있는 게 아닌가. 커피를 마시는 사람보다 사진을 찍으며 카페 내부를 구경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이 근처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에 앉아 조용히 커피를 마시려 했던 내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카페를 지나쳐 걸었다.
위미항으로 갔다. 하얀 등대가 있는 곳으로 깊숙이 걸어 들어갔다. 햇볕 때문에 머리가 아파올 지경이었는데, 때마침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등대가 제공하는 그늘 속에 철퍼덕 앉아 파란 바다를 바라봤다. 오면서 봤던 그 흙빛 바다와 이 바다가 같은 바다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만큼 새파란 바다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역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곳 위미리를 찾는 관광객들은 그 유명 카페로만 찾아가고 있는 걸까.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앉아있다가 토마스 만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을 떠올렸다. 주인공 아센바흐는 바다를 좋아했다. 그가 바다를 좋아하는 이유는 "다양한 형태의 까다로운 현상들을 피해 그저 단순하고 어마어마한 것 속에 숨고 싶다는" 휴식 욕구 때문이었다. 내가 보고 있는 바다도 정말 단순하면서 어마어마했다. 단순성에서 휴식을 취하고, 어마어마함에서 겸손함을 취하는 것. 바다를 볼 때 절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이유는 이 두 가지 태도가 자연스레 내 속에서 솟아나기 때문이리라.
이렇게 앉아 있으니 몸이 노곤해지는 게 영영 일어나지 못할 것 같다. 얼마 전이었으면 겨우 1시 남짓한 시간에 이렇게나 노곤해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 테다. 그러면 엉덩이를 탈탈 털고 억지로라도 일어났을 테지.
그런데 오늘은 영영 일어나지 못하면 그러라지, 하는 심정이 되었다. 등대에 제대로 등을 기대고 다리를 쭉 폈다. 커다란 아름드리 나무에서 휴식을 취하듯 늘어지게 앉아 버린 것이다. 나를 이곳으로 이끌어준 두 마리 개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며.
"못된 개들아 고맙다. 너네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행복한 순간도 누리지 못했겠지."
이날 오후는 기억 속에 흐릿하게 남아 있다. 아침에 무리하게 운동을 해서인지 오후를 버틸 기운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등대를 빠져 나온 뒤 어렵게, 어렵게 게스트하우스 쪽으로 돌아왔다. 체크인 시간까지 그 주위를 서성이다 근처 카페에 들어가 꽤 오랜 시간을 잤던 것 같다.
늦은 점심도 먹었었지. 아, 그 날의 점심 메뉴는 확실하게 기억난다. 소라물회. 여행 중 먹었던 음식 중 가장 맛이 있었지. 소라물회를 깨끗이 비우고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와 뭘 했더라. 잘 기억나지 않는다. 잤던 것도 같고, 그냥 멍하니 앉아 있었던 것도 같고, 저녁 땐 잠시 바닷가로 나와 바닷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다. 오늘은 제주에 온 지 18일째 되는 날이다. 남은 날은 겨우 12일. 내일은 중문으로 간다.
▲ 여행 중 젤루 맛있었던 소라물회.(전 해산물 중 소라를 가장 좋아합니다.) ⓒ 황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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