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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 유관순, 바다 강관순? 독립운동 나선 해녀 이야기

[인터뷰] 제주해녀항일운동의 주역 강관순 선생의 딸을 만나다

등록|2015.10.03 14:50 수정|2015.10.03 14:50

▲ 강관순 선생의 딸 강길녀씨가 보여준 사진으로 왼쪽 위에 강관순 선생, 어머니, 그 아래에는 강관순 선생과 해녀항일운동을 주도했던 주역들이다. ⓒ 오문수


"우리들은 제주도의 가엾은 해녀들, 비참한 살림살이 세상이 안다.
추운 날 무더운 날  비가 오는 날에도, 저 바다 물결 위에 시달리는 몸

배움 없는 우리 해녀 가는 곳마다, 저놈들의 착취기관 설치해놓고
우리들의 피와 땀을 착취하도다. 가엾은 우리 해녀 어디로 갈까?"

일제강점기 시절 제주도에서 불렸던 <해녀가>의 1절과 4절 가사이다. 지난 9월 19일, 일행과 함께 우도를 방문했을 때 성산포에서 떠난 우도행 배가 도착하는 동천진항 로터리 중심에는 '우도해녀항일운동기념비'가 서 있었다. 이 탑은 일본 관헌들의 가혹한 대우와 해녀 권익 옹호를 위해 분연히 일어난 해녀항일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1995년 천진항에 건립됐다.

제주 해녀들은 예로부터 수탈과 착취의 대상이었다. 1930년대 어용조합장의 횡포가 심해지자 관제조합 반대, 수확물에 대한 가격 재평가 등을 요구했다.

제주도 해녀어업조합의 어용화 폐단은 1931년 여름 구좌면 하도리에서 거세게 폭발했다. 이어서 하도, 종달, 우도, 세화 해녀들이 가세했다. 이 같은 해녀들의 항일운동은 연인원 1만7130명이 참여해 238회의 집회와 시위를 펼쳤으며 우리나라 최대의 어민운동으로 평가받는다.

제주도에서 일어난 항일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조천항일운동기념관 입구에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하늘을 향해 외치는 조각상이 있다. 조각상 뒤에 적힌 글과 사진에는 제주도 3대 항일운동으로 법정사 항일운동, 조천만세운동, 해녀항일운동을 선정했다.

해녀항일운동 주역 중 한 분인 강관순, <해녀가>를 작사하다

▲ '불턱'으로 우도해녀들이 물질을 하고 난 후 몸을 말리기 위해 불을 피우고 옷을 갈아입기도 한 곳이다 . 지금은 현대식 탈의실로 바뀌었다 ⓒ 오문수


어용조합과 일제의 가혹한 수탈에도 할 말을 못 하던 이들을 일깨운 이들이 있었다. 우도 출신 강관순, 신재홍, 김성오 등은 항일비밀결사 혁우동맹을 맺고 일제식민지 수탈정책으로 생존권을 위협받고 있는 해녀들의 항일의식을 고취했다.

야학을 통해 해녀들을 학습시키는 등 조직적인 항일운동이 이뤄지도록 배후역할을 했다. 일제에 검거된 강관순 일행은 2년 6개월의 징역을 살고 나왔지만, 일제의 감시가 심해 정어리 배 선장을 하다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기자를 안내한 우도 문화관광해설사 김철수씨가 "강관순 선생의 딸이 현재 우도에 살고 있다"는 얘기를 하며 강관순 선생의 딸인 강길녀(74세)씨 집으로 안내했다. 집안일을 하다 기자를 반갑게 반겨준 강길녀씨가 독립운동유공자로 선정돼 건국훈장애족장 훈장을 받은 증서를 보여줬다.

▲ 해녀항일운동 주역인 강관순 선생의 딸 강길녀씨(74세)가 노무현 대통령 시절 독립유공자로 선정돼 건국훈장애족장을 받은 증서와 훈장을 보여줬다. ⓒ 오문수


증서 아래에는 2005년 5월 1일 대통령 노무현이라는 글씨가 선명히 적혀있었다. 자신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자신도 12살부터 지금까지 62년 동안 해녀 일을 했다며 해녀의 애환에 관해 얘기했다.

"해녀 일이요? 파도가 센 날과 추운 날에는 힘들어요. 특히 가난한 시절에 보릿고개를 해녀 일을 하며 넘겼죠."

▲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사업회에서 준 기념사진과 글들. 강길녀씨가 보여줬다 ⓒ 오문수


▲ 우도 동천진항 로터리에 있는 우도해녀항일운동기념비로 1995년에 건립했다 ⓒ 오문수


일본 강점기에 금지곡으로 묶였지만, 해녀들 사이에는 비밀리에 불렸다가 해방 후에 공식적으로 불렸다는 "<해녀가>의 탄생 배경에 관해 얘기해 달라"고 요청하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어요. 아버지와 함께 항일해녀 운동을 했던 주동자들이 검거돼 감옥살이하고 있을 때 오문규씨 부인이 면회를 왔대요. 면회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오씨의 부인에게 아버지가 쓴 시를 담배꽁초처럼 말아서 주셨다고 해요. 그 시가 감옥 밖으로 나와 <해녀가>가 탄생한 겁니다."

감옥에서 석방된 강관순 선생은 "조금만 기다리면 앉아서 세계 각국을 볼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며 좋은 세상이 올 거라고 했는데 지금 그런 것 같아요"라고 말한 그녀는 "아버지가 일본 형사의 감시를 피하고자 정어리 배를 탔다가 폐결핵에 걸려 1942년에 돌아가셔서 힘들게 살았지만, 지금은 자랑스럽다"고 얘기했다.

▲ 제주도 조천항일운동기념관 입구 모습. 조각상 뒤에는 제주에서 일어난 3대 항일운동으로 법정사 항일운동, 조천만세운동, 해녀항일운동을 선정했다. ⓒ 오문수


19~20세기에 쓴 조선비망록에 의하면 고대중국과 일본지도상에 제주도가 여인의 섬(Island of woman)으로 나타나 있어 제주도가 고대 그리스 여인국의 의미로 기록되어 있다. 능력을 인정받은 제주 해녀들은 국내 및 해외까지 진출했다.

흑산도에는 제주도 출신 해녀들이 이룬 마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과 러시아 중국까지 진출했었다. <해녀가> 3절 가사가 이를 입증해 준다.

"이른 봄 고향산천 부모·형제 이별하고, 온 가족 생명줄을 등에다 지어
파도 세고 무서운 저 바다를 건너서, 기울산 대마도로 돈 벌러 간다."

▲ 세계에서 제일 큰 해녀 여신상이 있는 오봉리 하고수동 해안가 모습. 관광객들이 너무 많이 접근해 사진 촬영에 애를 먹었다. ⓒ 오문수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여수넷통>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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