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특수교육의 메카 대구대를 가다
[원주나들이⑧] '구름에 달 가듯이'... 남도기행 (1)
중학교 동창의 전화
팬 없는 프로야구는 상상할 수 없고 존재할 수도 없다. 독자 없는 작가도 마찬가지다.
책이 팔려야 출판사는 계속 책을 펴낼 수가 있고, 그래야 작가도 책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신간이 서점에 나가면 이따금 독자의 편지나 전화가 오고, 일부 극성 팬은 학교로, 때로는 강원도 오지 산골 집으로까지 찾아오기도 했다.
이런 독자는 글쓴이로 참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나는 독자에게 처음 받은 팬레터는 러브레터라도 되는 양, 수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잘 갈무리하고 있다.
하지만 세월 탓인지, 아니면 내 필력이 무뎌진 탓인지, 점차 그런 팬레터나 전화, 그리고 내 집을 찾아오는 독자는 줄어드는 추세다.
지난 여름, 한 통의 낯선 전화를 받고 보니 50여 년 전 중학교 동창의 전화였다.
"박도 선생, 구미중학교 출신 맞지? 나 김병하일세."
"병하! 참, 오랜만일세. 반갑네."
"자네가 쓴 장편소설 <약속>을 서점에서 사서 방금 다 읽고, 곧장 출판사로 연락하여 전화번호를 알았네."
장편소설 <약속>은 나의 유년시절에 체험한 한국전쟁을 시대적 배경으로 삼았고, 전쟁 초기 최대 격전지였던 다부동격전지와 내 고향 구미 일대를 공간적 배경으로 펼쳐지는 북남남녀(北男南女)의 사랑과 분단 이야기다.
김병하 친구는 구미면 옆 고아면 평촌 출신으로, 바로 낙동강 강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는 한국전쟁을 아주 오지게(장애아가 된) 체험했다. 그래서 내가 쓴 장편소설 <약속>은 바로 자기 마을, 이웃 마을, 자기가 직접 체험한 이야기라 아마도 책을 읽는 동안 더욱 그 시절이 어제 일처럼 새록새록 되새김질되었을 것이다.
그는 대구대학교에서 40여 년을 봉직한 다음, 3년 전에 정년퇴직했다는 그간의 소식을 전하면서 "더 늦기 전에 우리 한번 만나세"라는 말을 했다. 그 얼마 뒤인 7월 30일, 삼복염천 뙤약볕 날씨임에도 그는 부인과 손녀딸을 모시고 내가 사는 원주로 와서 치악산 기슭에서 1박한 뒤 돌아갔다.
글은 곧 그 사람이다
친구는 그 답례인지 지난달 하순 나를 남도로 초대했다. 날짜는 10월 초순으로, 기왕이면 그날 당신이 평생 봉직한 대구대학교 특수교육과 학생들에게 내가 글쓰기 강의를 한 뒤, 그날 밤은 경주로 가서 1박을 하자는 제의였다. 나이든 사람이 이제까지 자기가 배우고 체험한 바를 젊은이에게 전수해 주는 것은 가장 보람된 일이 아닌가.
더욱이 그와 나는 중3때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던 추억의 경주를 백발이 성성한(김병하), 삭발한(박도) 나이에 다시 찾아 지난날을 반추한다는 것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기에 좋다고 통보했더니, 그가 10월 6, 7일 남도기행 날짜를 정했다.
10월 6일은 애국가 가사의 일절처럼 '가을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 그대로였다. 나는 그날 오전 원주를 출발하여 오후 3시부터 대구대학교 사범대학 제1호관 세미나실에서 특수교육과 학부학생 70여 명에게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을까"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시작했다. 대구대 특수교육과 학생들은 장차 장애인들에게 빛과 소리를 전해주고, 그들의 손과 발이 되어주겠다고 공부하는 학생들이 아닌가. 초면이었지만 그들을 마주 대하니까 사랑스러움과 함께 존경심이 저절로 우러러났다.
나의 강의는 "지금은 말의 시대다. 여러분 가운데 말(음성언어)을 잘하면 대통령도 될 수 있고, 또 말(문자언어)를 잘하면 셰익스피어와 같은 대문호도 될 수 있다"로 시작하여, 프랑스의 학자 드 뷰폰의 "글은 곧 그 사람이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삶에서 아름다운 글이 나온다"는 말로 강의를 마쳤다. 애초에는 50분간 강의로 3시 50분에 끝내기로 했는데, 그만 나의 실수로 무려 30분이나 늦은 4시 20분에 끝나 학생들의 다음 강의에 차질을 빚게 했다.
김병하 친구는 현재 대구대학교 명예교수로 1965년 대구대학교 전신인 한국사회사업대학에 입학하여 2012년 8월에 정년퇴직했으니,이 대학에서 47년간이나 배우고 가르친 특수교육학과의 개척자요, 산 증인이다.
강의가 끝나자 그가 대구대학교를 안내했다. 나는 우선 대구대 캠퍼스 부지가 넓은데 놀랐다. 대구대는 자연친화적인 캠퍼스로, 마치 외국의 어느 대학 캠퍼스를 찾은 듯 대단히 쾌적했다. 친구는 대학 캠퍼스에 메밀꽃이 필 때가 절경이라고 하는데, 아쉽게도 그 얼마 전에 메밀꽃을 모두 베었단다. 비록 그 풍경은 보지는 못했지만 드넓고 시원한 캠퍼스 장관에 나는 감탄을 연발했다.
우리나라 특수교육의 창시자
친구는 자기가 가장 공들여 콘텐츠를 꾸린 대학 구내 특수교육기념관으로 안내한 후 우리나라 특수교육의 내력을 자세히 들려줬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 특수교육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미국 감리교 의료선교사인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 여사가 1894년 5월 평양에서 맹여아 오봉래를 만나 개인지도를 한 것이 그 효시로 이 땅에 그 씨앗을 뿌렸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 제생원 맹아부가 설치되어 본격적인 특수교육이 이루어졌다, 해방 후 1946년에는 다행히 이영식 목사가 조국 광복 기념사업으로 대구맹아학교를 설립하여 장애인들에게 빛을 주었다. 그 후 이 목사의 아들 이태영 박사가 이 사업을 주도하여 1961년 한국사회사업대학에 특수교육과가 설치됨으로써, 오늘날 대구대학교가 한국특수교육의 메카로 발전케 되었다고 그간의 연혁을 간단히 소개했다.
대구대학교는 특수교육의 요람인 탓인지, 캠퍼스 곳곳에는 전동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지체장애 학생, 지팡이를 두드리는 시각장애 학생 등 여러 장애학생들이 보였다. 사실 나도 학교에서 여러 지체장애학생을 담임했지만 그들의 휠체어를 한번도 밀어주지 못한 걸 인생을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서 매우 부끄럽게 여기고 있다.
내가 늘그막에 선진 여러 나라를 둘러보면서 느낀 바는, 선진국은 국민소득만 높은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네들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대단히 세심한 나라로, 심지어 우리나라에서 외면한 장애인들을 데려다 자기 자식으로 입양하여 기르는 것을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으로 알며 살아가는 모습들이었다.
청와대에서 멀지 않는 서울 종로구 신교동에 국립맹학교가 있다. 이곳은 오랫동안 선거 때면 투표소였기에 선거 날이면 대통령 내외분이 이곳에서 투표하는 장면이 실황 중계되곤 했다. 그 맹학교 바로 앞에 우당기념관이 있기에 나는 그곳을 자주 찾았고, 나중에는 이종찬 관장(전 국정원장)과 함께 '사진으로 보는 한국독립운동사'를 펴낸다고 그곳 연구실에서 일한 바도 있었다. 그때 점심 먹으러 가는 길에 맹학교 앞을 지나면서 이 원장이 들려준 얘기다.
차마 전하고 싶지 않는 얘기
한 번은 신교동 일대 주민들이 당신을 찾아왔는데, 그 사연인즉 국립맹학교 이전운동에 앞장 서달라는 부탁이었다. 이 원장은 이를 일언지하 거절했을 뿐 아니라, 아예 그 추진사업을 만류했다고 했다. 이를 맹학교 출신 시각장애인들이 알고, 당신 선거 때마다 그분들이 앞장서서 선거 운동을 해줘서 득표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말씀을 했다. 거기까지는 웃어 넘길 수 있는 얘기였으나 그 다음 이야기를 듣고는 한 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조선총독 3대와 5대를 역임한 사이토 마코트(齋藤實) 총독 부부는 식민지 조선의 시각장애인들을 대단히 어여삐 여겼다. 그래서 서대문 밖 천연동에 있는 맹아학교를 당신들 관사와 가장 가까운 곳에 두고자 영조대왕 후궁 사당자리 선희궁터(현재의 신교동 교사) 넓은 대지인, 소창경원으로 불릴 만큼 경치 좋은 이곳으로 이전케 하여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지금도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장애인 학교나 장애인 편의시설을 만든다고 하면, 해당 지역주민들이 반대하는 피켓을 들고 앞장을 선다고 한다.
우리 두 사람은 대구대학교를 떠나 경주로 달렸다. 그 이야기 탓인지 우리는 한동안 침묵했다. 영천을 지난 다음에야 55여 년 전 중학교 시절 얘기로 말문을 열었다. 1960년 가을, 우리는 열차를 타고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다. 시골 촌아이들이 꿈에나 그러던 그 경주로….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 한국 특수교육의 개척자들(앞줄 오른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대구맹아학교를 설립한 이영식 목사, 한국사회사업대학에 특수교육과를 설치한 이태영 전 대구대학교 총장, 한글점자로 훈맹정음을 반포한 박두성 선생,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맹인소녀를 지도한 미국인 선교사 로제타 셔우드 홀 여사) ⓒ 대구대학교
팬 없는 프로야구는 상상할 수 없고 존재할 수도 없다. 독자 없는 작가도 마찬가지다.
이런 독자는 글쓴이로 참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나는 독자에게 처음 받은 팬레터는 러브레터라도 되는 양, 수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잘 갈무리하고 있다.
하지만 세월 탓인지, 아니면 내 필력이 무뎌진 탓인지, 점차 그런 팬레터나 전화, 그리고 내 집을 찾아오는 독자는 줄어드는 추세다.
지난 여름, 한 통의 낯선 전화를 받고 보니 50여 년 전 중학교 동창의 전화였다.
"박도 선생, 구미중학교 출신 맞지? 나 김병하일세."
"병하! 참, 오랜만일세. 반갑네."
"자네가 쓴 장편소설 <약속>을 서점에서 사서 방금 다 읽고, 곧장 출판사로 연락하여 전화번호를 알았네."
장편소설 <약속>은 나의 유년시절에 체험한 한국전쟁을 시대적 배경으로 삼았고, 전쟁 초기 최대 격전지였던 다부동격전지와 내 고향 구미 일대를 공간적 배경으로 펼쳐지는 북남남녀(北男南女)의 사랑과 분단 이야기다.
김병하 친구는 구미면 옆 고아면 평촌 출신으로, 바로 낙동강 강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는 한국전쟁을 아주 오지게(장애아가 된) 체험했다. 그래서 내가 쓴 장편소설 <약속>은 바로 자기 마을, 이웃 마을, 자기가 직접 체험한 이야기라 아마도 책을 읽는 동안 더욱 그 시절이 어제 일처럼 새록새록 되새김질되었을 것이다.
그는 대구대학교에서 40여 년을 봉직한 다음, 3년 전에 정년퇴직했다는 그간의 소식을 전하면서 "더 늦기 전에 우리 한번 만나세"라는 말을 했다. 그 얼마 뒤인 7월 30일, 삼복염천 뙤약볕 날씨임에도 그는 부인과 손녀딸을 모시고 내가 사는 원주로 와서 치악산 기슭에서 1박한 뒤 돌아갔다.
▲ 기자가 대구대학교 사범대학 제1호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 박도
글은 곧 그 사람이다
친구는 그 답례인지 지난달 하순 나를 남도로 초대했다. 날짜는 10월 초순으로, 기왕이면 그날 당신이 평생 봉직한 대구대학교 특수교육과 학생들에게 내가 글쓰기 강의를 한 뒤, 그날 밤은 경주로 가서 1박을 하자는 제의였다. 나이든 사람이 이제까지 자기가 배우고 체험한 바를 젊은이에게 전수해 주는 것은 가장 보람된 일이 아닌가.
더욱이 그와 나는 중3때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던 추억의 경주를 백발이 성성한(김병하), 삭발한(박도) 나이에 다시 찾아 지난날을 반추한다는 것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기에 좋다고 통보했더니, 그가 10월 6, 7일 남도기행 날짜를 정했다.
10월 6일은 애국가 가사의 일절처럼 '가을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 그대로였다. 나는 그날 오전 원주를 출발하여 오후 3시부터 대구대학교 사범대학 제1호관 세미나실에서 특수교육과 학부학생 70여 명에게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을까"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시작했다. 대구대 특수교육과 학생들은 장차 장애인들에게 빛과 소리를 전해주고, 그들의 손과 발이 되어주겠다고 공부하는 학생들이 아닌가. 초면이었지만 그들을 마주 대하니까 사랑스러움과 함께 존경심이 저절로 우러러났다.
나의 강의는 "지금은 말의 시대다. 여러분 가운데 말(음성언어)을 잘하면 대통령도 될 수 있고, 또 말(문자언어)를 잘하면 셰익스피어와 같은 대문호도 될 수 있다"로 시작하여, 프랑스의 학자 드 뷰폰의 "글은 곧 그 사람이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삶에서 아름다운 글이 나온다"는 말로 강의를 마쳤다. 애초에는 50분간 강의로 3시 50분에 끝내기로 했는데, 그만 나의 실수로 무려 30분이나 늦은 4시 20분에 끝나 학생들의 다음 강의에 차질을 빚게 했다.
김병하 친구는 현재 대구대학교 명예교수로 1965년 대구대학교 전신인 한국사회사업대학에 입학하여 2012년 8월에 정년퇴직했으니,이 대학에서 47년간이나 배우고 가르친 특수교육학과의 개척자요, 산 증인이다.
강의가 끝나자 그가 대구대학교를 안내했다. 나는 우선 대구대 캠퍼스 부지가 넓은데 놀랐다. 대구대는 자연친화적인 캠퍼스로, 마치 외국의 어느 대학 캠퍼스를 찾은 듯 대단히 쾌적했다. 친구는 대학 캠퍼스에 메밀꽃이 필 때가 절경이라고 하는데, 아쉽게도 그 얼마 전에 메밀꽃을 모두 베었단다. 비록 그 풍경은 보지는 못했지만 드넓고 시원한 캠퍼스 장관에 나는 감탄을 연발했다.
▲ 경북 경산시에 있는 대구대학교 본관 ⓒ 박도
우리나라 특수교육의 창시자
친구는 자기가 가장 공들여 콘텐츠를 꾸린 대학 구내 특수교육기념관으로 안내한 후 우리나라 특수교육의 내력을 자세히 들려줬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 특수교육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미국 감리교 의료선교사인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 여사가 1894년 5월 평양에서 맹여아 오봉래를 만나 개인지도를 한 것이 그 효시로 이 땅에 그 씨앗을 뿌렸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 제생원 맹아부가 설치되어 본격적인 특수교육이 이루어졌다, 해방 후 1946년에는 다행히 이영식 목사가 조국 광복 기념사업으로 대구맹아학교를 설립하여 장애인들에게 빛을 주었다. 그 후 이 목사의 아들 이태영 박사가 이 사업을 주도하여 1961년 한국사회사업대학에 특수교육과가 설치됨으로써, 오늘날 대구대학교가 한국특수교육의 메카로 발전케 되었다고 그간의 연혁을 간단히 소개했다.
▲ 한국 특수교육의 요람지, 대구대학교 특수교육기념관 ⓒ 박도
대구대학교는 특수교육의 요람인 탓인지, 캠퍼스 곳곳에는 전동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지체장애 학생, 지팡이를 두드리는 시각장애 학생 등 여러 장애학생들이 보였다. 사실 나도 학교에서 여러 지체장애학생을 담임했지만 그들의 휠체어를 한번도 밀어주지 못한 걸 인생을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서 매우 부끄럽게 여기고 있다.
내가 늘그막에 선진 여러 나라를 둘러보면서 느낀 바는, 선진국은 국민소득만 높은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네들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대단히 세심한 나라로, 심지어 우리나라에서 외면한 장애인들을 데려다 자기 자식으로 입양하여 기르는 것을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으로 알며 살아가는 모습들이었다.
청와대에서 멀지 않는 서울 종로구 신교동에 국립맹학교가 있다. 이곳은 오랫동안 선거 때면 투표소였기에 선거 날이면 대통령 내외분이 이곳에서 투표하는 장면이 실황 중계되곤 했다. 그 맹학교 바로 앞에 우당기념관이 있기에 나는 그곳을 자주 찾았고, 나중에는 이종찬 관장(전 국정원장)과 함께 '사진으로 보는 한국독립운동사'를 펴낸다고 그곳 연구실에서 일한 바도 있었다. 그때 점심 먹으러 가는 길에 맹학교 앞을 지나면서 이 원장이 들려준 얘기다.
▲ 김병하 대구대 명예교수가 한국 특수교육의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 박도
차마 전하고 싶지 않는 얘기
한 번은 신교동 일대 주민들이 당신을 찾아왔는데, 그 사연인즉 국립맹학교 이전운동에 앞장 서달라는 부탁이었다. 이 원장은 이를 일언지하 거절했을 뿐 아니라, 아예 그 추진사업을 만류했다고 했다. 이를 맹학교 출신 시각장애인들이 알고, 당신 선거 때마다 그분들이 앞장서서 선거 운동을 해줘서 득표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말씀을 했다. 거기까지는 웃어 넘길 수 있는 얘기였으나 그 다음 이야기를 듣고는 한 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조선총독 3대와 5대를 역임한 사이토 마코트(齋藤實) 총독 부부는 식민지 조선의 시각장애인들을 대단히 어여삐 여겼다. 그래서 서대문 밖 천연동에 있는 맹아학교를 당신들 관사와 가장 가까운 곳에 두고자 영조대왕 후궁 사당자리 선희궁터(현재의 신교동 교사) 넓은 대지인, 소창경원으로 불릴 만큼 경치 좋은 이곳으로 이전케 하여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지금도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장애인 학교나 장애인 편의시설을 만든다고 하면, 해당 지역주민들이 반대하는 피켓을 들고 앞장을 선다고 한다.
우리 두 사람은 대구대학교를 떠나 경주로 달렸다. 그 이야기 탓인지 우리는 한동안 침묵했다. 영천을 지난 다음에야 55여 년 전 중학교 시절 얘기로 말문을 열었다. 1960년 가을, 우리는 열차를 타고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다. 시골 촌아이들이 꿈에나 그러던 그 경주로….
▲ 경주 불국사 자하문 ⓒ 박도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