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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 결혼시킨 부부, '평생 가난' 맹세한 이유

[가장 나다운 결혼식⑧] 이서영·송주민 부부

등록|2015.10.19 08:02 수정|2015.10.19 08:02

▲ 지난 9월 서울 성북구청에서 '마을 결혼식'을 올린 이서영·송주민 부부. ⓒ 안홍기


천편일률적 '스드메', 20분 예식, 뿌려 놓은 축의금 걷기, 눈도장 찍기식 참석 등 허례허식 결혼식에서 벗어나 소박하고 특별한 결혼식을 치른 열 쌍의 커플 이야기. 주인공뿐만 아니라, 참석한 모든 이들의 기억에 남았던 예식을 소개해 결혼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에겐 격려를, 돈 때문에 결혼을 포기한 이들에겐 기대를 안겨주고자 한다. - 기자 말

앞마당에 멍석 깔고 가마솥 걸어 밥 짓고 전 부치고 방방마다 상 차려 잔치를 벌였던 옛날 결혼식은 옆집 앞집 온 동네 사람들이 함께 만들고 함께 즐기는 마을 결혼식이었다. 지금 서울에서도 그런 결혼식이 가능할까?

일단, 예식을 올리고 잔치를 할 널찍한 마당이 없다. 아파트나 빌라 같은 공동주택이 보편화된 지금의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장소도 문제지만 일손도 많아야 하고 식재료 조달부터 조리장소까지 복잡다단한 과제가 쌓여 있는 잔치음식 마련을 생각하면 더 갑갑해진다. 결국은 전문 업체를 불러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구청 강당에서 '마을의 힘'으로 올린 결혼식

지난 9월 19일 이서영·송주민 부부는 마을에서 마을의 힘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장소는 서울시 성북구청 4층 강당과 구내식당. 성북구에서 마을 공동체를 만들고 지원하는 활동을 하다 부부의 연을 맺은 두 사람이기에, 구청 강당은 혼인잔치 할 '앞마당'으로 손색이 없다. 그렇다면 잔치음식도 마을에서 해결했다고?

예식장 입구에 걸린 안내문에 해답이 있었다. 안내문 아래 절반은 결혼식을 도운 이들의 명단으로 가득 찼다. 기본 상차림과 냉채·잡채 등 잔치음식은 반찬가게와 봉사단체가 맡았다. 저소득층 일자리 제공을 위한 자활기업과 소외된 이웃에 반찬을 만들어주는 단체다. 과일·한과와 와인은 친환경 식재료를 공급하는 생협에서 공급받았다.

잔치음식뿐 아니라 신부의 면사포, 메이크업 주선, 꽃장식, 영상촬영 등 결혼식을 돕는 이들의 명단이 무슨 TV 드라마 끝날 때 나오는 자막처럼 길다. 하나같이 마을만들기 활동을 하면서 관계를 맺게 된 성북구·강북구 안의 곳들이다.

▲ 서울 성북구청에서 열린 이서영·송주민 부부의 결혼식장 앞 안내문. 결혼 준비에 참여한 이들의 명단이 빼곡하다. ⓒ 안홍기


송주민 : "뷔페 업체에 맡기면 편했겠죠. 하지만 '인연이 있는 마을 사람들이나 모임에 맡겨볼 순 없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피로연 음식도 하실 수 있겠느냐'고 운을 띄웠는데 의외로 선뜻 해주겠다는 거에요. 사람들을 만나서 해주실 수 있냐고 물어보면서 하나 둘씩 해결되기 시작했고, 결국 그동안 함께 활동했던 이웃들, 즉 마을의 힘으로 해보자고 했죠."

이서영 : "부케를 부탁드렸는데, 이젠 부케를 동네꽃집에 맡기는 일이 거의 없어선지 '만들어 본 지가 꽤 됐다'고 하시더라고요. 하지만 결국 정성과 축복이 가득한 부케를 만들어주셨어요. 저희도 좋았지만 만들어주신 분도 이걸 만들면서 설레고 뿌듯했다고 하셨어요." 

직접 준비한 결혼이라 예상치 못한 구멍도 많았다. 결혼식에 쓰일 음악이 준비 안 된 걸 결혼 전날 발견해 부랴부랴 선곡하고 스마트폰에 담아 식장에서 틀었다. 예상인원보다 많은 하객에 컵과 접시가 모자랐고, 하객으로 왔던 지인들이 설거지 해 재빨리 내놓기도 했다.

▲ 이서영·송주민 부부이 결혼식에서 부부와 알고 지내는 '마을 사람들'이 장미 한송이씩을 건네며 행복한 결혼을 축복하는 깜짝 이벤트를 열었다. ⓒ 안홍기


주민씨는 "도와주신 것만도 감사한데 다들 결혼식장에 오셔서 축복해주셨다"며 "저희가 준비를 못한 탓에 알게 모르게 고생하신 분들이 계세요, 하객으로 오신 분들이 팔을 걷어붙인 모습을 보고 너무너무 죄송했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부부 모르게 깜짝 이벤트도 준비했다. 한 사람 한 사람 축복의 마음을 담은 장미꽃을 부부에게 안겼고, 각자의 덕담을 모아 축하영상을 상영했다. 마을을 만드는 사람들이 부부의 연을 맺는 데에 이곳 저곳 마을의 힘을 빌렸고, 마을 사람들은 즐겁게 참여하고 즐긴 '현대·서울판 마을 결혼식'인 셈이다.

▲ 이서영·송주민 부부의 결혼식장 앞에 두 사람이 연애시절 함께 한 여행 비행기표, 영화표와 편지 등 '증거물'이 전시돼 있다. ⓒ 안홍기


둘만의 비밀연애... '누나'는 어느새 '우리 아가'로

이들 부부는 성북구 내에서 마을공동체를 활성화시키는 일을 조직하고 지원하는 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소속된 단체는 다르지만 마을 만들기라는 영역에 활동하다보니 자연스레 알게 됐다. 하지만 서로 '저런 사람이 있구나' 알기만 한 상태. 서로에 대한 적극적인 호기심은 없었다고 한다.

단둘이 처음으로 진지한 대화를 나눴던 날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날이다. 온 나라가 무기력과 혼란에 빠져 있었던 시점, 한 활동가의 추모식에 참석한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함께 했던 두 사람도 같이 세월호의 슬픔을 나눴고 이러다보니 자연스레 서로에게 자신을 드러냈다.

이서영 : "주민씨가 가톨릭 신자이긴 한데 그땐 신앙이 많이 차가워져 있었어요. 제가 같이 미사를 드리러 가겠느냐고 물으니 주민씨가 같이 가겠다고 했죠."

▲ 이서영·송주민 부부의 전자청첩장. 사진 속 '평생 책임져 줘' 대박은 도시-농촌 마을간 결연식에서 등장한 소품이다. 마침 이 곳에 출장 간 두 사람이 이 사진을 청첩장에 응용했다. ⓒ 송주민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급격히 진행됐다. 주민씨가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서영씨가 이를 받아들인 건 '첫 대화'로부터 보름만인 5월 1일이었다. 두 사람의 교제는 거의 1년 동안이나 비밀에 부쳐졌다. 이들과 함께 일하는 성북구 내 마을 활동가들도 눈치 채지 못했다. 여성이 연상인 커플인데다 나이 차도 좀 있는 편이어서 의심의 눈초리를 받지 않았단다. 

두 사람은 결혼식장 입구에 연애시절 서로가 함께 한 '증거물'을 전시했다. 함께 한 여행의 비행기표, 영화표, 전시회표가 모여 있고 주민씨가 서영씨에 보낸 편지도 있다. 연애 초기에 보낸 쪽지엔 '서영누나'라고 했던 호칭이 몇 달 지나고 난 뒤엔 '울 아가 서영', '당신'으로 바뀌어 있다. 주민씨는 "제가 애늙은이라 세대차이는 못 느낀다"고 한다.

남들 몰래 사랑을 키워가던 두 사람은 지난 1월 유럽여행을 다녀왔다. 여행 중 프랑스 남동부 생 폴 드 방스의 수녀원에서 지내기도 했는데, 14년 전 서영씨가 속세와 연을 끊으려 들어갔던 그곳을 다시 찾은 것이다. 어쨌거나 구도자의 삶을 포기한 서영씨지만 결혼식에서 맹세한, 두 사람이 일생 동안 함께 좇아 살기로 한 일곱 개의 가치들을 보면 이들 부부는 이제 막 구도의 길을 시작한 듯하다.

▲ 신부 이서영씨가 직접 꾸민 혼배미사 제대. 두 사람이 일생 동안 추구할 가난, 땀, 자연, 기도, 창작, 마을, 밥심 7개의 가치를 새겼다. ⓒ 안홍기


가난, 땀, 자연, 기도, 창작, 마을, 밥심

혼배미사의 제대에는 가난, 땀, 자연, 기도, 창작, 마을, 밥심 이 일곱 개의 맹세가 싱그러운 초록 풀 사이사이 놓였다. 서영씨가 직접 꾸민 제대다. 하지만 다 이해하겠는데 가난, 이 가난만은 선뜻 이해가 안됐다. 부부의 앞날에 풍요로움만 가득하길 기원해도 모자랄 결혼식 아닌가.

송주민 : "가난이란 건, 우리가 세상에서 유행하는 소비 패턴에 휩쓸리지 않고 내적인 풍요를 추구하면서 살자는 의미예요. 이 결혼식의 출발도 요란한 겉치례는 하지 말자는 것 부터였죠. 가난하면서 느끼는 행복이 있어요. 우리 결혼식도 아무 가진 것 없는 출발이지만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하나 해결해가면서 행복을 느낄 수 있었잖아요."

이서영 : "세상의 중심에 서기 보다는 변방에서 스스로 주인되게 살아가는 것, 지역에서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돈이 없어도 행복하게 살자는 거죠."

부부가 되는 순간부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한다는 성경 속 사도들의 본보기에 따라 축의금도 신랑 측, 신부 측 따로 받지 않고 하나의 축의금함으로 합쳤다. 사실 이 부분은 양가 부모들의 양보가 필요한 부분인데, 결혼식 전과정에 부모님들이 한 발 뒤로 빠져주고 믿어줬기에 가능했다.

마을 만들기를 통해 만난 이 부부는 마을에서, 마을 사람들의 도움과 축복을 받으며 결혼했고 앞으로도 마을 공동체와 더불어 살 작정이다. 마을의 힘으로 결혼식을 만들겠다는 이 부부의 첫 공동실험은 대성공이었다. 소박하지만 건강한 밥상을 대접받은 작은 임대아파트를 나서면서, 이 부부가 벌일 또 다른 '마을 실험'에 대한 기대가 생겼다.

▲ 이서영·송주민 부부의 결혼식에 놓인 공동 축의금함. 성경 속 사도들의 본보기에 따라 ⓒ 안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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