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 빠진 이름 패트릭, 다 이유가 있었네
[아일랜드 여행 스케치 27] 순례자의 산이라고 불리는 패트릭 산
아일랜드에서 가장 유명한 신부를 꼽으라면 단연코 성 패트릭 신부를 이야기할 것이다. 아일랜드의 가장 큰 축제가 매년 3월의 성 패트릭 데이(St. Patrick's Day)인 것, 아일랜드 곳곳에 그의 이름을 딴 상점을 쉽게 볼 수 있다는 것, 아일랜드 부모들이 가장 선호하는 이름 중 하나가 '패트릭'이란 이름만 봐도 성 패트릭이 아일랜드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은 실로 대단하다.
4세기경 부유한 로마노 브리티시 집안에서 로마계 영국인으로 태어난 패트릭 신부는 16세에 해적에게 납치되어 아일랜드로 끌려가 노예로 지내게 된다. 그의 고백론에 따르면, 신의 부름을 받아 해안에서 배를 타고 달아나 다시 영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그 이후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였다고 한다. 사제가 된 이후 432년에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다시 아일랜드로 향했다.
당시 켈트 다신교를 믿고 있었던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해 잎이 세 개인 토끼풀을 사용하였다는 민담이 전해지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토끼풀은 오늘날 아일랜드에서 행운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성 패트릭 신부는 30년 이상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했고 그가 죽은 후 그는 아일랜드에서 (특히 카톨릭 교단에서) 가장 존경 받는 인물이 되었다.
아일랜드 서북쪽 매요 지방(Co. Mayo)에는 성 패트릭의 이름을 딴 산이 있다. 바로 크로프 패트릭 산(Croagh Patrick)으로 일명 순례자의 산이라고 불린다. 한국의 관악산보다 조금 더 높은 765미터의 높이를 가진 산이지만 1000미터를 넘는 산이 거의 없는 아일랜드에선 꽤나 높은 산에 속한다.
이곳은 441년 패트릭 신부가 아일랜드의 복음 전파를 위해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한 이래 수많은 신자들이 찾아와 그를 기념하는 장소가 되었다. 매년 7월 마지막 일요일에는 전세계의 순례자들이 패트릭 신부를 기념하기 위해 정상을 오른다고 한다.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여행
우리의 여행은 여느 때와 비슷하게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었다. 언제부턴가 남편은 패트릭 산 정상에 올라가고 싶다는 말을 반복했다. 산을 타면서 복잡했던 마음을 정리하고 정상에 올랐을 때만 알 수 있는 성취감을 알려주고 싶단다.
아직 산을 타는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나는 당시 4살짜리 아이 핑계를 대며 산 정상까지 오르는 것은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남편의 마음은 생각보다 확고해 보였다. 결국 올라갈 수 있을 만큼 올라가 보자는 것으로 결론을 짓고 패트릭 산을 등반하기로 했다.
12시가 조금 넘어서 패트릭 산의 비지터 센터(Visitor Centre)에 도착했다. 산을 오르기 좋은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지난 후 썸머타임이 끝난 11월 초의 주말.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지만 오후 4시만 넘어도 어두워지기 때문에 우리는 서둘러 산을 타기 시작했다. 홈페이지에는 올라가는데 2시간, 내려가는데 1시간 30분이면 가능하다고 적혀 있었지만 그건 신체 건강한 성인의 경우이다. 4살짜리 아들과 함께 오르는 길은 과연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패트릭 산 방문은 처음이 아니었다. 다른 일 때문에 이곳에 한 번 와 본 적이 있다. 그때 산을 조금 오르다가 돌아간 적이 있던 터라 등반을 하기 위해선 튼튼한 나무 막대기가 필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산 입구에서 3유로에 나무 막대기를 대여할 수도 있고 5유로에 살 수도 있지만 이런 곳에 돈을 쓸 수는 없다. 미리 집에서 준비해 온 나무 막대기를 들고 아들과 천천히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비지터 센터에서 출발해 한 30분을 걸었을까? 패트릭 신부의 동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특별할 것이 없는 동상이지만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여기서 인증 사진을 찍고 다시 산을 오른다.
우리도 이곳에서 기념 사진을 찍고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여기가 산의 중반이면 좋겠지만 여기서부터가 시작이다. 평소엔 조금만 힘들어도 안아달라고 보채던 아들이 이번엔 웬일로 혼자서 잘도 걷는다. 그동안 마냥 어리다고만 생각했는데 많이 컸구나.
11월의 아일랜드는 겨울과 다를 바 없다. 겨울에도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 날씨와 적당한 비 때문에 4계절 내내 잔디를 볼 수 있지만 겨울로 접어드는 잔디는 갈색과 노란색이 섞여 그리 예쁘지만은 않았다. 한국의 산과 달리 좀처럼 큰 나무를 볼 수 없는 아일랜드 산. 얼룩덜룩한 잔디와 울퉁불퉁한 돌길만이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자연의 모습이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흰머리가 생기고 주름이 생기듯이 겨울을 향해 가는 패트릭 산의 모습도 그와 비슷했다. 간간히 보이는 양들은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을까? 신기할 정도로 아슬아슬한 경사 위에서 풀을 뜯어 먹고 있다. 패트릭 산을 오르면서 그동안 내가 경험해보지 못했던 아일랜드의 자연을 마주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산을 오를 때부터 날씨가 좋지 않았는데 산의 정상으로 올라갈수록 자욱한 안개가 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 3시간 반 정도 올라갔을까? 뭔가 정상일 것 같은 평평한 평지에 도착했다. 드디어 정상에 도착한 것인가? 라는 기대도 잠시, 운무 때문에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세찬 바람을 동반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변하는 아일랜드 날씨는 이곳 패트릭 산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높은 고도 때문에 날씨의 변화는 땅에서 느끼는 것보다 더 심했다.
"아빠, 너무 무서워요. 빨리 내려가요."
갑작스러운 날씨 변화에 두려움을 느낀 아들은 울면서 남편에게 말했다. 나도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운무를 뚫고 등반을 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시계는 어느덧 오후 4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이제 곧 어두워지는 때라 남편 역시 더 이상 등반을 강행할 수 없었다.
조금만 올라가면 정상에 있는 교회에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아 아쉬웠지만 우리는 그곳에서 다시 내려오기로 결정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우리가 도착했던 그 곳은 겨우 산의 중반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산행을 감행했다면 굉장히 위험한 상황을 만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라가는 것은 힘들지만 내려가는 것은 너무 쉽다. 좀 전까지만 해도 생명의 위협을 느낄만한 세찬 비바람은 어느새 사라진 지 오래. 평지로 내려갈수록 없던 해가 보이기 시작했고 산 아래의 풍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비록 패트릭 산 정산을 등반하는 것은 실패했지만 산을 오르내리면서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것을 깨달았던 시간이었다.
마냥 어리다고만 느꼈던 아들은 어느새 훌쩍 커서 씩씩하게 자신의 길을 가고 있었다. 이렇게 척박한 자연 속에서도 살아가는 양들의 모습에서 삶을 버텨내는 모습을 발견했다. 아무리 인간이 잘나고 위대한들 자연의 작은 변화 속에선 한낱 보잘 것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는 것도 알았다.
1500년 전 패트릭 신부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이 산을 올랐을까? 산을 오르는 길은 척박하고 황폐하다. 자신의 신념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아일랜드에 왔을 때 느꼈던 마음은 이 산만큼이나 척박하고 힘겨웠을까? 자신의 신념과 상관없이 산을 오르면서 자신 스스로가 더 단련이 되었을까?
주변에서 너무 쉽게 듣게 되는 '패트릭'이란 이름이 처음으로 위대한 이름으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패트릭 산을 오르며 잠시 나마 순례자의 마음을 헤아려볼 수 있었던 시간. 아들이 조금 더 크면 꼭 다시 한 번 정상에 도전해봐야겠다.
4세기경 부유한 로마노 브리티시 집안에서 로마계 영국인으로 태어난 패트릭 신부는 16세에 해적에게 납치되어 아일랜드로 끌려가 노예로 지내게 된다. 그의 고백론에 따르면, 신의 부름을 받아 해안에서 배를 타고 달아나 다시 영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그 이후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였다고 한다. 사제가 된 이후 432년에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다시 아일랜드로 향했다.
당시 켈트 다신교를 믿고 있었던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해 잎이 세 개인 토끼풀을 사용하였다는 민담이 전해지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토끼풀은 오늘날 아일랜드에서 행운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성 패트릭 신부는 30년 이상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했고 그가 죽은 후 그는 아일랜드에서 (특히 카톨릭 교단에서) 가장 존경 받는 인물이 되었다.
▲ 패트릭 산 입구에 있는 안내문. 패트릭 산에 대한 간단한 역사적 사실과 성 패트릭 신부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 김현지
아일랜드 서북쪽 매요 지방(Co. Mayo)에는 성 패트릭의 이름을 딴 산이 있다. 바로 크로프 패트릭 산(Croagh Patrick)으로 일명 순례자의 산이라고 불린다. 한국의 관악산보다 조금 더 높은 765미터의 높이를 가진 산이지만 1000미터를 넘는 산이 거의 없는 아일랜드에선 꽤나 높은 산에 속한다.
이곳은 441년 패트릭 신부가 아일랜드의 복음 전파를 위해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한 이래 수많은 신자들이 찾아와 그를 기념하는 장소가 되었다. 매년 7월 마지막 일요일에는 전세계의 순례자들이 패트릭 신부를 기념하기 위해 정상을 오른다고 한다.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여행
우리의 여행은 여느 때와 비슷하게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었다. 언제부턴가 남편은 패트릭 산 정상에 올라가고 싶다는 말을 반복했다. 산을 타면서 복잡했던 마음을 정리하고 정상에 올랐을 때만 알 수 있는 성취감을 알려주고 싶단다.
아직 산을 타는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나는 당시 4살짜리 아이 핑계를 대며 산 정상까지 오르는 것은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남편의 마음은 생각보다 확고해 보였다. 결국 올라갈 수 있을 만큼 올라가 보자는 것으로 결론을 짓고 패트릭 산을 등반하기로 했다.
12시가 조금 넘어서 패트릭 산의 비지터 센터(Visitor Centre)에 도착했다. 산을 오르기 좋은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지난 후 썸머타임이 끝난 11월 초의 주말.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지만 오후 4시만 넘어도 어두워지기 때문에 우리는 서둘러 산을 타기 시작했다. 홈페이지에는 올라가는데 2시간, 내려가는데 1시간 30분이면 가능하다고 적혀 있었지만 그건 신체 건강한 성인의 경우이다. 4살짜리 아들과 함께 오르는 길은 과연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패트릭 산 방문은 처음이 아니었다. 다른 일 때문에 이곳에 한 번 와 본 적이 있다. 그때 산을 조금 오르다가 돌아간 적이 있던 터라 등반을 하기 위해선 튼튼한 나무 막대기가 필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산 입구에서 3유로에 나무 막대기를 대여할 수도 있고 5유로에 살 수도 있지만 이런 곳에 돈을 쓸 수는 없다. 미리 집에서 준비해 온 나무 막대기를 들고 아들과 천천히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 한 손에는 지팡이를, 다른 한 손에는 세잎클로버를 들고 있는 성 패트릭 신부의 동상 ⓒ 김현지
비지터 센터에서 출발해 한 30분을 걸었을까? 패트릭 신부의 동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특별할 것이 없는 동상이지만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여기서 인증 사진을 찍고 다시 산을 오른다.
우리도 이곳에서 기념 사진을 찍고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여기가 산의 중반이면 좋겠지만 여기서부터가 시작이다. 평소엔 조금만 힘들어도 안아달라고 보채던 아들이 이번엔 웬일로 혼자서 잘도 걷는다. 그동안 마냥 어리다고만 생각했는데 많이 컸구나.
▲ 나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척박한 패트릭산의 모습 ⓒ 김현지
11월의 아일랜드는 겨울과 다를 바 없다. 겨울에도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 날씨와 적당한 비 때문에 4계절 내내 잔디를 볼 수 있지만 겨울로 접어드는 잔디는 갈색과 노란색이 섞여 그리 예쁘지만은 않았다. 한국의 산과 달리 좀처럼 큰 나무를 볼 수 없는 아일랜드 산. 얼룩덜룩한 잔디와 울퉁불퉁한 돌길만이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자연의 모습이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흰머리가 생기고 주름이 생기듯이 겨울을 향해 가는 패트릭 산의 모습도 그와 비슷했다. 간간히 보이는 양들은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을까? 신기할 정도로 아슬아슬한 경사 위에서 풀을 뜯어 먹고 있다. 패트릭 산을 오르면서 그동안 내가 경험해보지 못했던 아일랜드의 자연을 마주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 생각보다 아들은 척박한 산을 열심히 올라가 주었다. ⓒ 김현지
산을 오를 때부터 날씨가 좋지 않았는데 산의 정상으로 올라갈수록 자욱한 안개가 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 3시간 반 정도 올라갔을까? 뭔가 정상일 것 같은 평평한 평지에 도착했다. 드디어 정상에 도착한 것인가? 라는 기대도 잠시, 운무 때문에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세찬 바람을 동반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변하는 아일랜드 날씨는 이곳 패트릭 산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높은 고도 때문에 날씨의 변화는 땅에서 느끼는 것보다 더 심했다.
"아빠, 너무 무서워요. 빨리 내려가요."
갑작스러운 날씨 변화에 두려움을 느낀 아들은 울면서 남편에게 말했다. 나도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운무를 뚫고 등반을 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시계는 어느덧 오후 4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이제 곧 어두워지는 때라 남편 역시 더 이상 등반을 강행할 수 없었다.
조금만 올라가면 정상에 있는 교회에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아 아쉬웠지만 우리는 그곳에서 다시 내려오기로 결정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우리가 도착했던 그 곳은 겨우 산의 중반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산행을 감행했다면 굉장히 위험한 상황을 만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산의 중반에 올라갔을 때 심한 운무때문에 한치 앞을 볼 수 없었다. 더이상 산행을 감행하기 힘들었다. ⓒ 김현지
올라가는 것은 힘들지만 내려가는 것은 너무 쉽다. 좀 전까지만 해도 생명의 위협을 느낄만한 세찬 비바람은 어느새 사라진 지 오래. 평지로 내려갈수록 없던 해가 보이기 시작했고 산 아래의 풍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비록 패트릭 산 정산을 등반하는 것은 실패했지만 산을 오르내리면서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것을 깨달았던 시간이었다.
마냥 어리다고만 느꼈던 아들은 어느새 훌쩍 커서 씩씩하게 자신의 길을 가고 있었다. 이렇게 척박한 자연 속에서도 살아가는 양들의 모습에서 삶을 버텨내는 모습을 발견했다. 아무리 인간이 잘나고 위대한들 자연의 작은 변화 속에선 한낱 보잘 것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는 것도 알았다.
1500년 전 패트릭 신부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이 산을 올랐을까? 산을 오르는 길은 척박하고 황폐하다. 자신의 신념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아일랜드에 왔을 때 느꼈던 마음은 이 산만큼이나 척박하고 힘겨웠을까? 자신의 신념과 상관없이 산을 오르면서 자신 스스로가 더 단련이 되었을까?
주변에서 너무 쉽게 듣게 되는 '패트릭'이란 이름이 처음으로 위대한 이름으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패트릭 산을 오르며 잠시 나마 순례자의 마음을 헤아려볼 수 있었던 시간. 아들이 조금 더 크면 꼭 다시 한 번 정상에 도전해봐야겠다.
▲ 아일랜드 패트릭산에서 아빠와 아들 ⓒ 김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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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페이지: http://www.croagh-patrick.com/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패트릭 산에 가는 방법
안타깝게도 더블린에서 패트릭 산이 있는 크로프 패트릭(Murrisk, Croagh Partick)로 바로 가는 버스는 없다. 더블린에서 근처 웨스트포트(Westport)까지 간 후 크로프 패트릭을 갈 수 있다.
더블린에서 웨스트포트까지는 버스보다는 기차를 추천하며 웨스트포트에서 크로프 패트릭까지 가는 버스가 자주 없기 때문에 당일 치기 여행은 불가능하다. 근처에서 1박을 권한다.
더블린(Dublin) >> 웨트스포트(Westport)
소요시간: 약 3시간
성인요금: 왕복 약 30유로선
Irish Rail website: http://www.irishrail.ie/
웨스트포트(Westport) >> 크로프 패트릭(Murrisk, Croagh Patrick)
버스 에린(Bus Eireann) 450번 버스 탑승
버스 요금: 왕복 약 6.5유로
버스 시간표: http://www.buseireann.ie/timetables/1425994757-450.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