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한 개혁·소장파, 수구로 퇴행하는 새누리당
[이슈분석] 국정화 몰아붙이며 이념 편향 극단으로... 초재선은 공천 걱정에 눈치보기
▲ 새누리당 초·재선 의원 모임인 '아침소리' 소속 의원들이 6월 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정기모임에서 메르스 관련 논의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총대를 멘 새누리당의 우경화가 가속화하고 있지만 이를 제어할 여당 내 개혁·소장파들의 목소리가 사라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근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주장하는 새누리당의 주장에는 브레이크가 없다. 이 때문에 개혁적인 목소리는 실종되고 점점 극단적 이념 편향성이 늘어나고 있는 모습이다. 연일 수위가 높아지고 있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발언이 대표적이다.
김 대표는 지난 17일 당 중앙위원회 산악회 발대식에서 "대한민국 국사학자 90%가 좌파"라며 공세 수위를 높였다. 그는 "지금 대한민국 국사학자는 90% 좌파로 전환됐다. 절대 물러설 수 없는, 꼭 이겨야만 하는 역사전쟁이 시작됐다"라며 "좌파의 사슬이 강해 어쩔 수 없이 국정으로 갈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특히 친일 미화와 우편향 논란에 휩싸였던 교학사 교과서를 "올바른 역사교과서"라고 지칭하면서 "(이 교과서를) 전국 학교에 도입하려 하자 좌파들이 총출동해서 '교학사 회장 목 따 죽이겠다', '교학사 불태워 죽이겠다' 등 테러를 자행해, 모두 포기하고 부산 부성고 하나만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를) 채택했던 사실 있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우편향 논란을 차치하고라도 정부로부터 251건의 수정권고를 받는 등 곳곳에서 오류가 발견돼 교육 현장에서 외면을 받은 교학사 교과서를 '좌파의 테러와 선동'의 희생양으로 규정하면서 "친일·독재 미화 교과서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정부·여당의 다짐을 스스로 부정하는 주장도 서슴지 않은 셈이다.
앞서 지난 15일 열린 새누리당 의원총회도 극단적인 우편향 목소리로 가득 찼다. 새누리당이 초청한 전희경 자유경제원 사무총장은 현행 한국사 교과서들을 "북한 대변 교과서"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새누리당이) 기계적 중립론에서 벗어나길 당부드린다"라며 노골적으로 '역사교과서에 우파의 시각을 담아야 한다'는 취지의 내용을 주장했다.
또 "(현행 역사교과서가) 민주화의 그늘을 외면하고 민주화를 무오류인 것처럼 가르친다"라며 "민주주의가 완전무결한 것으로 주장되면 광화문 광장에 넘치는 '뗏법'의 기반이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극단적 주장에 박수친 새누리당, 비판적 성찰은 실종
헌법적 가치를 무시한 발언이었지만 새누리당 의원들은 비판은커녕 "잘했다", "훌륭하다"라며 맞장구를 쳤다. 김무성 대표도 "이 사회에서 정말 필요한 영웅을 발견했다, 큰 감동이 있었다"라고 추켜세웠다. 그러면서 새누리당은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당론으로 확정하고 '당과 박근혜 정부는 국민통합을 위한 올바른 역사교과서 만들기에 총력을 다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사실상 우편향 교과서를 만들겠다는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낸 것이다.
그럼에도 이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를 소신으로 가지고 있는 의원들은 소수였고, 그나마 공개적인 장소에서는 모두 침묵했다.
일부 의원들의 경우 언론 인터뷰를 통해 반대 목소리를 내긴 했다. 하지만 '원조 소장파'로 불리는 정두언 의원이나 서울시당위원장을 맡은 김용태 의원이 라디오 인터뷰를 통해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한 게 전부다.
특히 국정화 당론 채택 과정도 청와대 지침을 당 지도부가 받아 안아 의원들에게 통보하는 일방통행식이었지만 이를 문제삼는 목소리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나마 김용태 의원이 19일 CBS 라디오에 출연해 "국민의 지지를 받는 방향으로 문제를 풀었어야 하는데 국정화 하나밖에 없다는 식으로 일방적으로 선언해 놓고 따라오라는 식이니까 사실 당혹스럽고 황당하기까지 하다"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조직적인 목소리가 아니다 보니 영향력은 미미하다.
그나마 사견으로라도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는 의원들은 정치적 철학이나 소신 때문이라기보다는 대부분 선거를 걱정하는 경우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중도층이 여권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드라이브에 등을 돌릴 조짐이 보이자 수도권 의원들을 중심으로 내년 총선에서 역풍을 맞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새누리당의 한 초선 의원은 "노동개혁과 경제 활성화 등 4대 개혁 성과물을 가지고 내년 총선을 치렀어야 하는데 난데없이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튀어나와 난감하다"라며 "보수 결집도 좋지만 수도권에서 특히 중요한 중도층을 고려하지 않고 밀어붙이고 있는 것 같아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사라진 개혁·소장파, 우려되는 새누리당의 우경화
개혁·소장파의 목소리가 사라지면서 새누리당은 연일 오른쪽으로 오른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행동 개시 명령을 따른 친박계의 '유승민 찍어내기'로 여당 내 갈등이 폭발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의원들이 뽑은 원내대표를 청와대가 찍어내려하고 친박계가 행동대장을 자처했지만 이를 비판하는 의원들의 조직적인 목소리는 없었다.
새누리당 의원 160명 중 초선이 85명, 재선이 39명으로 전체의 78%를 차지하고 있지만 청와대와 당내 권력의 눈치만 보는 '거수기'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과거 미래연대(16대)·수요모임(17대)·민본21(18대)로 명맥을 이어왔던 새누리당 쇄신파는 이제 흔적이 조금 남아있을 뿐이다. 19대 국회에서는 '아침소리'라는 초·재선 모임이 있지만 정체성이 불분명하다는 평가가 많다. 당 관계자는 "아침소리 소속 의원들의 공통점은 초선이나 재선이라는 점 빼고는 없는 것 같다"라며 "모임은 하지만 각자 생각이 다양해 구심점이 없는 상태"라고 전했다.
개혁·소장파의 몰락은 집권 여당인 새누리당을 수구적 보수로 퇴행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수도권의 한 재선 의원은 "초·재선일수록 당에 할 말을 하기보다 오히려 내년 총선 공천을 받을 걱정에 당 지도부 눈치나 보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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