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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아들과 엄마 사이엔 여름과 겨울뿐

[사춘기 아이에게 보내는 그림책 편지] 프롤로그

등록|2015.10.20 15:09 수정|2015.10.20 15:09

그림책 편지 프롤로그앞으로 연재할 그림책 편지의 책들입니다. ⓒ 우상숙


어느새 가을이 깊어졌다. 유난히 더웠던 지난 여름의 불볕을 떠올리면, 포근한 햇살이 꿈인 듯 다가온다. 햇살과 체온의 어울림도 이리 짧은데, 사람과 사람 사이는 오죽할까. 더구나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과 엄마 사이에는 여름과 겨울만이 존재했다. 태양처럼 이글대는 너의 눈빛을 받아내려면 세상에서 가장 큰 장막이 필요했다.

너는 평상시의 온도를 벗어나 있었다. 살이라도 닿을라치면 작은 눈이 커다래졌다. 네 마음 속을 들키지 않으려고 방문을 꼭꼭 잠가두었다. 문 앞에 선 엄마의 눈동자는 싸늘하게 얼어버렸다. 너는 지금 몇 도쯤일까. 추웠다 더웠다 변덕스럽기가 극에 다다랐을 네 마음이 궁금했다.

며칠 전 홀로 대청소에 나섰다. 오랜만에 집안 구석구석을 들춰내어 숨은 먼지를 닦아냈다. 그때 좁은 방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낡은 책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림책에는 희뿌연 먼지가 두껍게 내려앉았다. 그 먼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렸을 적 장난감과 옷가지는 다른 이웃들에게 넘겨진지 오래였다. 그림책만은 그대로 남겨두었다. 안 쓰는 물건들을 장식으로 둘 만큼 넓은 집이 아니어도 평생 데리고 살 식구처럼 여겼다.

틈이 날 때마다 한 권 두 권 집으로 불러들인 책들이었다. 책 상자를 풀면 새 책 냄새가 향기처럼 퍼졌다. 어느새 네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그림책으로 의자와 탁자도 만들고 계단도 쌓았다. 그림책 징검다리도 건너고 그림책 울타리도 치며 놀았다.

이야기에는 특별한 힘이 숨어 있다. 그림과 이야기가 함께 있는 그림책은 그 힘이 두 배일 거라고 믿는다. 이야기 속에 그림을 그려놓고, 그림 속에 이야기를 써놓은 게 그림책이다. 오래된 이야기와 그림들을 다시 꺼내볼 시점이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손때 묻은 그림책을 통해 네게 하고 싶은 말이 후미진 마음 한 켠에서 솟아났다.

어릴 적 냠냠 음미한 그림책인데, 그 맛을 기억하지 않을까. 질풍노도의 사춘기라지만 이 그림책 앞에서는 수줍은 단풍잎이 될지도 몰랐다. 여드름으로 울긋불긋 붉어진 너의 얼굴 속에 다양한 그림책의 빛깔들이 곱게 물들기를 바랐다.

엄마는 네가 사춘기라는 사실이 잘 믿어지지 않는다. 교복을 입고 현관문을 나서는 너의 등 뒤로 벌써, 라는 감탄사가 또르르 미끄러졌다. 불현듯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스무 살이 되면 어떤 간섭도 하지 않겠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했는데... 독립적인 한 인간으로 거듭날 너의 스무 살이 되기 위해 부모는 한 걸음 물러나야 할 텐데. 너는 부모에게 첫 경험을 안겨주는 자식이라서 불안불안했다.

어쩌면 이 편지는 몇 년 후면 자식을 세상 밖으로 떠나보내는 엄마 자신을 위한 편지일 수도 있겠다. 그 길을 먼저 지나온 선배로서,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로서 이 편지에 실려 보낼 이야기가 혹여 다른 형식의 잔소리에 불과할지도 모르겠구나.

여러 번 호통을 치며 퍼부었던 빤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함께한 세월이 십수 년이 넘는 그림책의 위세라도 빌려 네 마음 곁으로 다가서고 싶은 심정만은 헤아려주려무나.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이야기의 한 조각이라도 들춰내어 네 마음속에 한 줄기 맑은 바람이고 싶구나. 자, 그럼 첫 번째 편지를 띄워볼까.

○ 편집ㅣ최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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