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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희씨에게 국민투표함을 선물해야겠다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길 바라면서 길 위에 섰다

등록|2015.10.24 14:52 수정|2015.10.24 14:52

▲ 동료 작가 김은중, 진형민 씨와 셋이서 일산 동구청 앞 웨스톤돔 거리 투표소를 꾸렸다. ⓒ 김해원


노동법 개정을 국민 투표로 물어야 한다는 글을 보자마자 공감하며 얼른 국민 투표함을 신청한 것은 얼마 전 지하철 안에서 만나 두 아가씨 때문이다.

지하철 안은 소란스러웠고, 내 옆에 앉은 아가씨는 목소리를 점점 돋워 앞에 서 있는 친구에게 회사생활의 고달픔을 하소연하고 있었다. 나는 목소리 좀 낮추라는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면서 그녀의 별별 얘기를 다 들어야 했다.

그녀의 상사는 인턴사원인 그녀를 사적인 일까지 알뜰히 부려 먹는 '못된 상사 유형'이었다. 세상살이가 다 그렇다, 돈벌이가 그래서 힘든 것이니 제발 차 안에서는 조용히 하라고 하려는 순간, 그 아가씨 말이 귀에 박혔다.

"내가 40만 원 받으면서 그렇게 수모를 당하고 일하면 뭐해. 그렇다고 지금 일하는 게 경력이 될 것 같지도 않아."

나는 설마 잘못 들었지 싶었다. 야근에 온갖 외근까지 하고 받은 돈이 한 달 차비도 되지 않는다니, 도둑놈들! 당장 때려 치워! 나는 아가씨들 말에 끼어들고 싶어 입이 근질댔다. 그런데 호기를 부리며 그만둬도 어디든 인턴사원의 처지는 나아지지 않을 거라고. 모두다 '열정 페이'를 요구한다고. 아가씨의 자조적인 말에 괜히 내가 미안해졌다.

'살려면 굽혀라'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 사회는 이 젊은이들한테 뭘 해줬다고 열정 페이를 요구하는 것인가? 그들이 공부할 때 애쓴다고 밥 한 끼를 사줘 본 적이 있는가, 날 선 사회에 나와 지치고 힘들 때 어깨 한 번 두드려준 적이 있는가.

우리 사회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고 어떻게 그들이 힘겹게 용기 낸 열정을, 수년간 벼르고 벼른 값진 열정을 헐값으로 사려고 하는가? 언제까지 청춘은 아픈 게 당연하다면서 벼랑 끝으로 내몰 것인가?

그러니까 임금피크제로 청년들을 구제하겠다는 것 아니냐? 정부의 노동법 개정안을 보면서 나는 묻고 싶었다. 정말이냐? 아버지들을 내몰면 정말 우리 청년들의 열정은 제값을 받으면서 일자리를 얻게 되는 거냐?

아니 나는 그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노동의 유연화를 외칠 때, 노동자들이 조금만 더 허리를 숙여주면 우리 경제가 살아나고 기업이 안정된 뒤 다시 꼿꼿하게 허리를 세울 줄 알았다. 그렇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 허리 굽은 아버지를 내몰고 그 자리에 젊은이들을 세우겠다는 말인데, 나는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 '노동법 개정안'은 평생 허리 한 번 제대로 펴보지 못하며 일한 아버지들을 "내가 자식의 열정을 빼앗은 것인가?" 눈치 보게 하고, 자식들에게는 네 아버지가 그랬듯이 "너희도 바짝 허리 굽히라"는 협박이다.

나는 내 아이에게, 우리 아이들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다. 살려면 굽혀라……. 내가 국민 투표함을 들고 거리에 나선 것은 내 아이를 위해서다. 곧 사회에 나갈 내 아이와 내 아이의 친구들을 생각하면서 나는 길 위에서 투표를 받았다. 길 위에 서 있는 게 어색하고, 부끄러웠다. 지나가는 이들을 붙잡고 말을 건넬 때면 자꾸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손에 쥐여 준 전단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걸 보면 얼굴이 화끈거렸다.

우리는 겁만 내지 말고 일어서야 한다

▲ 국민투표 물품은 조립식으로 한 박스씩 포장되어 있다. 국민투표함을 받으면 누구나 손쉽게 실내, 실외 어디에서든 국민투표소를 차릴 수 있다. 전국 1만개의 투표소가 준비 중이다. 18대 대선 당시 전국 투표소 수는 13,542개소였다. ⓒ 김해원


그런데 사람들이 간간이 발걸음을 멈추고 투표를 하면서 기운이 났다. 전단을 받아들고 갔던 아가씨가 전단을 다 읽었다면서 투표를 하겠다고 왔을 때는 손을 꼭 잡아주고 싶었다. 물론 투표한 사람보다 무심히 지나간 사람이 훨씬 많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투표한 한 명이 또 다른 '시작'이 될 테니까. 내가 하나였듯이 내가 건넨 투표용지를 받은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넷이 되고 그렇게 늘어날 테니까. 아니, 그렇게 되어야 한다.

몇 년 전 여러 작가와 함께 작업한 어린이 책 <비정규 씨, 출근하세요?> 세상에 내놓으면서 간절히 바랐다. 부디 이 땅의 모든 아이가 일하는 이들의 기쁨과 일하는 것의 가치를 알 수 있는 세상이 만들어지기를…….

하지만 이번 노동법 개정은 기간제 기간을 4년으로 늘린다고 하면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법으로 막으려 하며, 사용자들에게 언제든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는 칼자루를 쥐어 주려고 한다.

청년 실업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호들갑을 떨면서 뒤로는 모든 노동자들의 허리를 꺾겠다는 것이다. 노동의 가치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는 얘기다. 이런 개악안을 실제 당사자들인 우리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올해 정기국회 내에 반드시 통과시키겠다고 한다.

이렇게 놔두면 우리 아이들에게 할 말이 없다. 노동은 부끄러운 것이 되어버린다. <비정규 씨, 출근하세요?> 책을 만들면서 많은 얘기를 나눴던 편집자 김태희씨가 한 말이 떠오른다.

"이런 세상에서 애 키우기 겁납니다."

우리는 겁만 내지 말고 일어서야 한다. 아마 김태희씨도 그리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국민 투표함을 김태희씨에게 선물하려고 한다. 국민투표 실행기금 1만 원만 보내주면 누구에게든지 선물할 수 있다고 한다.

1만 원 밖에 안 되는 값싼 선물이지만 그가 있는 곳에서도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모든 '을'들의 국민투표 바람이 일기를 바라며, 우리 아이들에게 풀들은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주자는 마음으로. 투표함을 핑계로 오랜만에 그의 얼굴을 보는 것도 좋겠다.

○ 편집ㅣ홍현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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