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내 방에서 나가" 엄마는 벌거숭이가 되었다
[사춘기 아이에게 보내는 그림책 편지 ②] <괴물들이 사는 나라>
▲ <괴물들이 사는 나라> 표지. ⓒ 시공주니어
늑대옷을 입고 장난을 치는 말썽꾸러기 맥스! 어렸을 적 이 그림책을 볼 때마다 너는 괴물나라의 왕이 되고 싶다고 졸랐다. 늑대옷을 사달라고 칭얼거렸다. 궁여지책으로 옷장에서 멜빵바지라도 꺼내야 했다. 이건 지용이만의 늑대옷이야. 거울을 본 너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늑대 꼬리가 없다고 투덜거렸다. 서둘러 신문지를 찢어 늑대 꼬리를 달아주었다. 늑대 꼬리를 만지면서 너는 씩 웃었다. 그 옷을 입고 얼마나 좋아했던지….
"이 괴물딱지 같은 녀석!"
맥스 엄마가 맥스를 향해 퍼부은 이 말은 어쩐지 친숙한 느낌이었다. 요즘 너를 보면서 떠올렸던 말이었다. 차마 직접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곱씹었다. 그래, 정말 그래 라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맥스는 지지 않고 소리쳤다.
"그럼, 내가 엄마를 잡아먹어 버릴 거야!"
맥스의 야무진 말대답 역시 낯익은 말이었다. 사춘기라는 늑대옷을 입은 너는 말했다.
"도대체 나한테 해준 게 뭐야? 왜 모든 게 엄마 맘대로인데. 나에 대해 아는 게 뭐가 있다고, 제발 내 방에서 나가라고!"
그 늑대 같은 울부짖음에 엄마의 눈은 커다래졌다. 가슴에 총을 맞은 것처럼 무언가 뚝뚝 떨어지는 듯했다. 어쩌면 정말 너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을지도 몰랐다. 자식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런 불안함은 들키고 싶지 않은 혼자만의 비밀이고 싶었다. 그런데 늑대옷을 걸친 아들 녀석에게 그 비밀을 몽땅 털려버렸다. 너의 당찬 외침 앞에 엄마는 벌거숭이가 되고 말았다.
혼자 방에 남은 맥스는 맥스호를 타고 무작정 떠났다. 맥스호가 다다른 곳은 난생 처음 보는 괴물들이 우글거리는 작은 섬이었다. 괴물들은 맥스를 향해 사납게 달려들었다. 괴물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맥스는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맥스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말을 듣자마자 괴물들은 '괴물 중의 괴물'이라며 무릎을 꿇었다. 그 충격적인 반전의 한 마디를 소개할게.
"조용히 해!"
그런데 이 말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지 않니? 세상에서 네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일 텐데. 이쯤 되면 눈치 챘겠지. 이 세상 씩씩한 엄마들이 자주 하는 말. 갑자기 헐크로 돌변한 엄마들이 아이들을 향해 내지르는 천둥소리. 아이들의 극성맞은 장난을 잠재우기 위해 엄마들이 내린 극약 처방.
이 말의 효과를 톡톡히 보려면 절묘한 타이밍을 놓쳐선 안 돼지. 아이들이 방심한 순간을 노려야 한다. 엄마들은 설거지 하는 척 하다가 갑자기 괴성을 지르지. 아이들은 설거지를 하던 엄마에게서 그런 소리가 나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맥스는 엄마의 말에 온 몸이 얼어붙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노란 눈동자의 괴물을 보자, 번쩍 뇌리에 스친 것은 타잔처럼 소리 질렀던 엄마의 얼굴이었다. 실전의 경험을 토대로 한 맥스의 마법은 괴물들의 난장을 단번에 잠재웠다. 귀에 익은 문장 하나로 괴물들을 평정한 맥스의 '버럭 권법'은 기대 이상의 효과를 거두었다. 맥스는 괴물 나라의 왕이 되었다. 평소에 듣기 싫었던 이 말이 강력한 무기가 될 줄이야. 세상 어디를 가도 엄마의 그늘은 늘 따라다닌다.
호통을 좀 아껴둘 걸, 할 말이 없네
맥스는 괴물들과 실컷 놀았다. 맥스의 얼굴에 발랄한 미소가 번졌다. 뛰고 구르고 달리고 소리치고, 인간이 꿈꾸었던 원시적인 유희의 몸짓이 그 속에 있었다. 늑대옷을 입고 달빛 아래에서 춤을 추는 우리의 맥스! 느낌 가는 대로 소리 지르는 본능적인 움직임. 괴물들과의 첫 대면식을 호탕하게 치러낸 우리의 악동 맥스에게 아낌없는 갈채를 보낸다.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괴물들이 사는 특별한 왕국이 있다. 높은 성벽을 두른 어두침침한 궁전 외딴 방에 그 모습조차 낯선 괴물이 살고 있다. 주인 허락 없이 왕래가 자유로운 괴물은 어느새 들어앉아 방 하나를 꿰차고 있다. 내 마음 속에 나도 모르는 괴물이 살고 있었다니….
자기 마음 속에 어떤 괴물이 사는지도 모른 채 인간은 유년시절을 보낸다. 사춘기가 되어서야 마음 속에 어떤 나라가 있는지 어렴풋이 알게 된다. 어쩌면 사춘기는 마음속에 살고 있는 괴물을 스스로 알아채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인간인 줄 알았는데 괴물이었군, 하는 식의 허탈감과 자괴감.
인간에게는 인간의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본성이 존재한다. 이성과는 구별되는 인간의 다른 본성 말이다. 맥스는 엄마 앞에서 늑대의 본성을 드러내었다. 동물적인 야성이 움찔거렸다. 늑대옷을 입은 모습은 괴물 딱지처럼 보이지만, 그 늑대옷 덕분에 우리는 온전한 인간일 수 있다. 늑대옷이 선사하는 본능적인 이끌림 또한 인간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성숙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늑대옷 한 벌쯤은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그 늑대옷을 입어야 자기 마음속을 신나게 활보했던 맥스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엄마보다 더 끔찍한 괴물들의 실체를 보면서, 맥스가 일구어낸 아름다운 화해도 만날 수 있다.
얼떨결에 늑대옷을 입은 너의 모진 말 몇 마디에 엄마는 밤잠을 설쳤다. 늑대옷을 입고 외로운 항해를 하는 너에 비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심장은 제멋대로 두근거렸다. 더 이상 넌 조용히 하라는 야단에 꼼짝 못하는 수줍은 아이는 아니었다. 어쩌면 엄마의 오랜 바람처럼 쥐 죽은 듯 있는데 뭐가 문제냐고 거친 항의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조용히 하라고 야단 칠 때가 훨씬 더 좋았다. 그렇다면 그동안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퍼부어댔던 엄마의 잔소리는 몹쓸 거짓말이 되는 것인가. 무슨 변덕으로 조용해진 너를 귀찮게 하는지, 너는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런 호통은 아껴둘 걸 그랬다. '괴물 중의 괴물'이라고 자타가 공인한 그 말을 입에 달고 살았으니, 뭐라 할 말이 없구나.
그래, 이젠 부모가 조용히 기다릴 차례인데, 안달복달하는 이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괴물나라까지 닿을 수 있는 건 맥스 엄마의 밥 냄새뿐이었다. 엄마의 따뜻한 밥 냄새를 그리워할 때까지 부엌을 지키면 될 일인데. 오랜만에 솥단지에 밥을 앉혀볼까? 구수한 밥 냄새가 잠긴 방문을 넘어 너의 마음까지 닿을 수 있도록 말이야.
처음 늑대옷을 입어 본 소감이 어떠니? 거추장스럽고 많이 불편하지. 망망대해 한복판에 홀로 떨어진 것 같겠구나. 철부지 맥스의 여행기를 통해 세상에서 제일 특이한 곳은 자기 마음 속임을 알게 되는구나.
그 어떤 여행지보다 톡톡 튀는 개성이 넘쳐나는 곳.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풍경이 기다리는 곳. 세상에서 제일 힘들 때 작은 나룻배라도 만들어 꼭 방문할 곳, 바로 내 마음 속이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는 인간의 마음 속에 불멸의 왕국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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