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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에게 주먹을 날린 고딩, 그게 시작이었다

[서평] 이산하 성장소설 <양철북>

등록|2015.10.30 10:55 수정|2015.10.30 10:55
작가를 지망하는 '고삐리'와 '백구두' 스님이 함께 여행을 떠난다. 고등학생 양철북은 방학을 맞아 외할머니가 주지스님으로 있는 '수구암'에 머물다가 '묵언정진' 중인 백운스님을 만난다. 철북은 "인생공부 좀 하라"는 외할머니의 권유에 따라 만행(卍行,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닦는 수행) 중이던 백운스님과 함께 여행길에 오른다.

7월의 뙤약볕이 내리쬐는 길을 내내 걷기도 하고, 때로는 기차나 버스를 타기도 하고, 때로는 농부의 소달구지를 얻어 타기도 하면서 철북과 법운스님은 발길 닫는 곳을 따라 여행을 한다. 시인 이산하의 소설 <양철북>은 문학소년과 청년스님의 성장기다.

▲ 이산하 성장소설 <양철북> 표지 ⓒ 양철북

"철북아, 세상 만만한 거 하나도 없데이. 모든 게 내 생각과 내 뜻대로 되면 얼마나 좋겠노. 그라고 우리가 다 안다고 나불대지만 실제론 모르는 것 뚜성이라. 지금까지 니 머리로 배운 것도 지식의 전부가 아니고, 니 눈으로 본 것도 세상의 전부가 아이란 말이다. 그러니까 가끔씩 세상 구석구석 떠돌며 두 눈으로 직접 보고 확인해봐야 세상 뒤꿈치라도 알 수 있단 말이다. 가만히 있다가 가만히 죽기 싫으면 따라온나. 허수아비처럼 빈껍데기로 살고 싶으면 안 따라와도 되고."
"그럼 스님 따라가면 껍데기가 알맹이 됩니꺼?"
"지랄, 그건 니 하기 나름이고."(19쪽)

소설은 여행 과정에서 나누는 철북과 법운스님의 대화로 채워진다. 보통의 성장소설이 주인공이 각성하게 되는 사건과 계기들이 연결하면서 진정한 자아를 찾아나가는 포맷을 취하는데 반해, 이 작품은 오롯이 철북과 법운스님의 '선문답'같은 대화로 채워진다.

두 사람의 대화는 장난기 넘치고 때론 시시콜콜해 보이기도 하지만 던지는 질문만큼은 묵직하다. 드라마틱하고 격한 감동 대신에 잔상이 오래 남는 여운이 긴 책이다. 그래서일까, 나뭇잎이 떨어지고 스산한 찬기운 온 몸을 감싸는 이 가을에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누구나 한 번쯤은 낙엽을 밟으며 자신에 대해, 그리고 인생에 대해 반추해 보는 계절이 아닌가.

"니 성경을 한 줄로 줄일 수 있겠나?"(중략)
"그 긴 걸 한 줄로? 택도 없심더!"
"있느니라."
"그라머 해보소."
"다~ 지나가노니……." (중략)
"이번엔 불경을 한 줄로 줄여봐라."
갈수록 태산이었다. (중략)
"내가 또 해보까?"
"그게 좋겠심더."
"헛되고 헛되도다!"
"……."
"다~ 지나가노니, 헛되고 헛되도다. 어떻노?"
"기똥차긴 한데…… 좀 기네예."
"뭐, 이게 길다고? 그라머 니가 해봐." (중략)
"인생은 나가리!" (198쪽)

고삐리와 '빽구두' 스님의 '줄탁동시' 여행

청도 운문사와 법정스님이 수행 중인 불일암, 오대산 적멸보궁으로 이어지는 두 사람의 여행을 보면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이 떠오른다. 닭이 알을 깨뜨릴 때 알 속의 병아리가 껍질 안에서 쪼는 것을 '줄'이라 하고, 어미 닭이 밖에서 쪼아 깨뜨리는 것을 '탁'이라 한다.

'줄탁동시'란 병아리와 어미닭이 동시에 껍질을 쪼아 깨뜨린다는 것으로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말하거나, 안과 밖의 협업을 빗대어 쓰기도 한다. 철북이 묻고 스님이 대답하거나, 혹은 스님이 묻고 철북이 답하는 이야기는 함께 껍질을 깨고 '부화'하려는 병아리와 어미닭의 몸짓을 연상하게 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헤르만 헤세, <데미안> 중에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보낸 편지의 대목이다. 이산하는 '작가의 말'에서 "줄탁의 뜻처럼 부화하기 위해서는 알 속에서 새끼가 껍질을 쪼고 알 밖에서 어미가 껍질을 쪼아야 한다. 생명은 그렇게 안팎으로 쪼아야 죽음도 외롭지 않다"며 "이 책속에 나오는 모든 것들은 내가 넓은 세상으로 나오도록 밖에서 껍질을 쪼아준 나의 어미들이다"라고 했다.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서는 나를 둘러싼 껍질을 먼저 깨야 한다. 그것은 투쟁이다.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비로소 다른 세계를 만난다. 껍질을 깨기 위해 부딪치는 찬란한 몸부림이 있어야 껍질에 작은 구멍이라도 내고, 그 구멍을 통해 새어들어오는 빛줄기를 볼 수 있다.

인생이란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일지도 모른다. 그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운이 좋다면 누군가는 가 닿을 수도 있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문턱에서조차 자기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모른 채 세상을 떠난다.

세상에는 수많은 진리가 있고 어떤 것은 너무나 심오해 아직까지 인간에게 그 일부마저도 보여주지 않는 것들도 있지만, 기술의 발달과 진화의 눈부신 성과로 인해 인간의 인식 수준은 날로 발전한다. 그러나 의식의 지평이 확대되고 세상의 그늘이 점차 걷히더라도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이 세상의 모르는 것 투성이들 중에 제일 모르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아닐까. 하기에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너 자신을 알라고.

여행을 끝내고 돌아간 학교에서 철북은 교내시화전 비리를 따져물었다가 담당 미술선생님에게 호되게 당한다. 무차별 구타를 당하던 철북은 마침내 선생에게 주먹을 날리고 자신을 둘러싼 하나의 껍질을 깨뜨린다. 철북은 반성문을 쓰지 않는다. "달걀을 깨는 것은 곧 자신을 깨는 것이고 자신을 깨는 것은 곧 앞으로 어떤 것이든 깰 수 있다는 것"(236쪽)이기 때문이다. 도끼로 얼음장을 깨는 듯한 자유의지를 확인하는 순간 철북은 장엄한 내면의 북소리를 듣는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강구 선생님의 얼굴이 깨진 달걀로 노랗게 변했다. 달걀이 깨졌다. 하나의 세계가 파괴되었다. 단지 손 안에서 밖으로 나왔을 뿐인데, 조금 전까지의 완전했던 형태가 전혀 다르게 바뀌었다. 변화는 순식간에 왔다. 선생님 얼굴에 묻은 달걀 껍데기의 파편들을 보자 철북이는 첫 동정을 잃었을 때처럼 슬펐다.

철북이가 알을 깬 것은 처음이었다. 물론 철북이는 짐승으로 변한 강구 선생님한테 그 알보다 더 깨졌다. 하나의 세계를 깨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더 깨질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달걀은 완전한 세계가 아니라 언제나 파괴될 수 있는 것이다. 변화는 항상 파괴 뒤에 오는 것이다. 철북이는 이날 흘린 눈물의 양만큼 깨달았다. (236쪽)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이 소설에서 양철북은 작가 자신이다. 알 껍질은 우리를 둘러싼 세상이다. 작가의 펜은 껍질을 쪼아대는 병아리와 어미닭의 부리다. 법운스님은 "양철북을 왜 자꾸 두드리냐"는 철북의 물음에 "세상에 침묵하고 방관하는 자들의 의식을 두드리는 영혼의 북소리 아니겠냐"면서 "앞으로 넌 펜으로 힘껏 북을 쳐라. 양철북, 이름대로 그게 니 팔자다. 단, 글을 쓸 때는 항상 연필을 뾰족하게 깎아서 쓰고"(228쪽)라고 당부한다.

철북은 문예장학생으로 대학에 입학하고 법운스님은 진정한 깨달음을 얻기 위한 '혈사경' 고행을 선택한다. 철북은 부마항쟁과 광주민주화운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격문을 써서 학교에 뿌리고 지하신문을 만드는 등 펜으로 계속 세상을 두드린다. 작가 이산하는 '모가지를 걸고 쓴' 제주 4.3항쟁의 진실을 다룬 장편서사시 <한라산>으로 인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감옥살이를 했다.

그는 펜으로 영혼의 북을 두드려야 할 손, 연필을 뾰족하게 깎아야 할 손에 수갑이 채워지던 날, 머리 위를 날아오르는 날개 다친 새 한 마리를 본다. <데미안>의 알을 깨고 나온 그 새는 잠시 눈부시게 빛났다가 사라진다. 그의 귀에 법운스님의 말이 환청처럼 울린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내리는 이 비를 맞는 자는 빗방울 속의 바다를 찾아 멀고 험한 길을 고행하고 그러다 마침내 문득 자신이 깨달음의 바다에 도달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네가 네 스스로를 버리지 않는 한 아무도 너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239쪽)
덧붙이는 글 <양철북>(이산하 지음 / 양철북 펴냄 / 2015.9. / 11,000원)
이 기사는 이민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yes24.com/xfile340)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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