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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맹이 섬 '가파도', 청보리철 아니어도 좋다

[30일, 제주를 달리다 24] 그 스물두 번째 날

등록|2015.11.02 13:28 수정|2015.11.02 13:28

▲ 가파도 길, 저 멀리 풍차가 보인다 ⓒ 황보름


"가파도 괜찮나요?"

견과류가 들어간 요구르트에, 토스트, 샐러드, 과일이 맛깔나게 차려진 아침을 먹으며 남 사장님에게 물었다. 남 사장님은 내 질문에 기다리던 기쁜 소식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함박웃음을 웃으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운다. "당연하죠. 정말 좋아요. 특이 이런 날엔 더". 이런 날? 창 밖엔 구름이 살짝 낀 제주의 아침이 걸려 있다.

"햇볕이 너무 뜨거우면 지치기만 해요."
"가파도 가보신 적 있으세요?"
"물론이죠. 여기 묵으시는 손님들에게 제가 가장 많이 추천해주는 곳도 가파도에요. 여기 있는 분도 어제 다녀왔어요. 좋으셨죠?"

나와 같은 테이블에서 아침을 먹고 있던 여행자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도 가려고 했던 곳인데 이런 긍정적인 반응을 보니 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커진다. 여기서 모슬포 항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가 걸린다고 했다. 가파도는 모슬포항에서 배를 타고 15분 정도 들어가면 있는 섬이다. 보통 사람에게 20분이라면, 길치인 내겐 40분이 걸릴 수도 있으므로 시간을 넉넉히 잡고 출발하기로 한다. 가면서 동네도 둘러볼 겸.

바람막이 점퍼와 모자를 가방에 넣고 게스트하우스를 나섰다. 한적함을 넘어 아무도 보이지 않는 시골길을 따라 걷다 보니 큰 길이 나온다. 어제 버스에서 내려 걸어왔던 길이다. 어제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면 모슬포항 쪽이다. 골목골목, 우회전에 우회전을 거듭하자 서서히 공기가 달라진다. 바다내음인가? 비릿한 생선 냄샌가? 아침부터 서 있는 시골 장을 지나 모슬포항 입구에 도착했다.

모슬포항은 분주하게 아침을 맞고 있었다. 아침 식사를 하는 식당도 제법 많았다. 어쩌면 어부들에겐 이 아침의 식사가 지난밤의 노고를 다독여주는 따뜻한 누군가의 어루만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두를 지나 매표소에 도착했다.

매표소 안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메르스의 영향으로 요즘 제주도는 텅 비어버린 것 같은데, 그럼에도 마라도처럼 유명 여행지엔 사람들이 꾸준하다. 물론, 메르스가 아니었다면 여행객들은 더 많았을 것이다. 대부분이 마라도 매표소 앞에 줄을 서 있다. 나는 가파도 매표소 앞에 줄을 섰다. 청보리철이 아니면 가파도를 찾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한다.

꼬맹이 섬이라 끌린, 가파도

가파도는 어느 게스트하우스 스텝을 통해 알게 된 곳이다. 직접 들은 건 아니고, 스태프 몇 명이 이야기하는 걸 엿들었다. 휴가를 낸 스태프 한 명이 가파도로 갔다는 것. 간 이유는 황금보리 사진을 찍으려던 것. 그런데 그 스태프가 다음 날 와서 다른 스태프들에게 말하길, "황금보리도 끝났더라"고 했다.

가파도는 올레길 완주를 목표로 한 사람이라면 무조건 와야 하는 곳이다. 올레 10-1코스가 이곳에 있다. 하지만 올레길을 걷지 않는 사람들도 4, 5월이 되면 가파도로 몰려온다. 바로 청보리 때문. 청보리가 땅을 가득 덮은 봄, 가파도에선 청보리 축제가 열린다.

스태프가 말한 황금보리는 청보리가 익어 황금빛을 띠게 된 것을 말한다. 황금보리가 펼쳐진 가파도의 6월은 사진가들의 천국이라고 한다. 물결처럼 출렁이는 황금보리의 자태가 그렇게나 아름답단다.

지금 가파도를 가면 황금보리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가파도를 가는 이유는? 가파도가 꼬맹이라는 말을 들어서였다. 가파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키가 작은 섬이다. 해안선 길이도 4.2km로, 한 시간 남짓 걸으면 섬을 한 바퀴 돌 수 있을 정도로 작다. 자그맣고 낮은 섬 가파도. 나는 이 작은 꼬맹이 섬이 끌렸다.

신분증과 승선 신고서를 내밀며, 떠나는 시간, 돌아오는 시간을 매표소에 대고 말했다. 돌아올 시간을 미리 정해야 한다는 게 영 못마땅했다. 놀다 보면 더 놀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거늘. 또 생각보다 별로라면 빨리 돌아오고 싶을 것 아닌가. 그런데 미리 시간을 정해놓고 가야 하다니. 대충 보니 사람들은 대개 1시간 또는 2시간 정도 가파도에 머무는  듯했다. 아쉬울지 몰라 나는 3시간 머무는 걸로 정했다.

표를 구입한 뒤 매표소 바로 앞에 있는 선착장으로 가 가파도로 돌아가는 할머니, 할아버지들 곁에 섰다. 재미있게도 할머니들은 한 분도 빼놓지 않고 하나 같이 두루마리 화장지를 들고 있었다. 제주 메인 섬으로 나올 때마다 하나씩 꼭 챙겨 들고가는 필수 아이템인 듯 싶었다. 할머니들 옆엔 검은색 양복을 빼 잎은 할아버지 몇 분이 서 있었는데, 이 아침에 어디들 갔다 오시는 걸까. 궁금증은 자연스레 풀렸다. 누군가의 상을 치르고 오는 길이란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배를 기다렸다. 그러다 선착장 앞 플래카드에 눈이 갔다. 글이 써져 있었다. 몇 번을 읽어 보았다.

울지마라, 딸아.
아무리 거센 파도라 해도 언젠가는 잠잠해지니,
때가 되면 차오르는 밀물처럼, 때가 되면 밀려가는 썰물처럼
인생은 그런거란다.
그러니 너무 두려워 말아라.
어머니 바다가 너를 따뜻하게 품어 주리니.

가파도 해녀가 쓴 글이었다. 그치, 가파도에도 해녀가 있겠지.

▲ 가파도에 오다 ⓒ 황보름


▲ 키 작은 섬 가파도, 키작은 집들 ⓒ 황보름


▲ 용도가 궁금했던 작품(?)들. 무속신앙을 모시는 곳 같기도... ⓒ 황보름


▲ 주인집 아저씨가 돌을 주워와 2년간 만들었다던 게스트하우스 ⓒ 황보름


바다를 보고 있는 것처럼 뻥 뚫린 가슴

어머니 바다 위에 둥실 떠서 15분을 건너와 가파도 포구에 섰다. 화장지 두루마리를 들고 가는 할머니들을 따라 마을 초입으로 걸어갔다. 어느 쪽으로 걸어 들어갈까 생각하고 있는데, 마음속에서 굶주림의 외침이 날카롭게 솟구친다. 배고프다! 얼른 먹어라! 생각해보니 어제도 한 끼밖에 못 먹었고, 오늘 게스트하우스에서 내어준 아침은 정갈하고 맛은 좋았지만 양이 참 적었다. 아침을 굶은 사람처럼 배가 쓰려오기 시작한다. 먼저 배를 든든히 채운 후 둘러보자.

가파도에서 가장 홍보를 열심히 하고 있는 식당은 짬뽕집이었다. 포구 어디를 둘러봐도 짬뽕집 홍보 문구가 보였다. 주인 핸드폰 번호까지 쾅 박혀 있는 것이 꽤 열심히 장사를 하는 곳 같았다. 그래, 짬뽕집으로 가자. 짬뽕집은 포구 반대편에 위치해 있었다.

가파도의 뱃속으로 뛰어들 듯 섬 마을 가운데 길로 훅 들어섰다. 4,5월엔 청보리로 가득했을 들판이 양쪽으로 넓게 펼쳐져 있었고, 2층 이상 건물이 거의 없는 섬 전체가 하나의 지평선처럼 낮게 깔려 있었다.

정면에 보이는 지평선에 눈을 두고 걷다 보니, 바다도 왠지 잘하면 볼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혹시 까치발을 하면 볼 수 있을까. 저 앞에 걸어가는 키 큰 남자에겐 바다가 보일까. 주위를 둘러보고 날 보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는 힘껏 까치발을 들고 한 번 고개를 쭉 내밀어 보았다. 바다가 보이나? 쳇, 턱도 없다.

할머니와 화장지 두루마리들이 각자 본인들의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마을 속으로 더 걸어 들어갔다. 나와 함께 가파도를 찾은 여행객은  열대여섯 명 정도인 듯 했다.  그중 두 명은 지금 내 앞에 걷고 있다. 중간중간 서서 사진을 찍고, 사잇길로 들어가 또 사진을 찍고, 다시 메인 도로로 나와 사진을 찍어도 우리 셋의 속도는 거의 비슷했다. 그렇게 15분 정도 걸었을까.

일부러 찾아간 짬뽕집은 문이 닫혀 있었다. 섬 밖으로 외출 중이란다. 아니, 이럴 거면 홍보 문구나 치워놓고 나가지. 괜히 입맛만 다셨다. 어쩔 수 없이 배를 부여잡으며 짬뽕집 앞의 식당으로 들어갔다. 뭘 파는 곳인지 잘 모르겠기에 급히 식당 아주머니께 물었다.

"뭘 먹으면 될까요?"
"문어비빔국수 드세요."
"네, 그거 하나 주세요."

기대하지 않았는데 비빔국수 맛이 아주 좋다! 쫀득하게 씹히는 문어 맛이 특히 좋다. 밑반찬으로 나온 톳과 미역도 윤기가  자르르하다. 국수 한 가닥, 미역 한 줄기 남기지 않고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배가 든든해졌으니 눈도 더 맑아졌을 것이다. 본격적으로 가파도를 둘러보자.

해안선을 따라 먼저 걷고, 그 후엔 마을 골목골목을 걸었다. 들어가서 뛰어 놀고 싶던 아담한 가파 초등학교를 지나, 소방서, 교회, 절, 풍차를 지나, 계속 걸었다. 탄소 배출 제로 섬답게, 앙증맞은 전기자동차가 골목길을 유유히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간혹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도 보였다. 자전거를 타도 좋고, 걷기도 좋은, 가파도였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꼬맹이 섬 가파도를 걷는 내내, 바다를 보고 있는 것처럼 가슴이 뻥 뚫렸다. 시야가 뻥 뚫리면, 가슴도 뻥 뚫리는 이 오묘한 이치. 높고 근사한 빌딩 숲을 거니노라면 눈이 번쩍 뜨이기는 한다. 왠지 나도 그 빌딩처럼 멋진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도 든다. 그런데 빌딩 숲은 우리 가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빌딩 숲 속에서는 가슴이 작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주 가슴이 탁탁 막혀오는 것일 테다.

청보리철에 오면 눈이 더 즐거울 것 같긴 했다. 예쁜 사진도 많이 찍을 수 있겠지. 황금보리는 또 어떤가. 황금보리 앞에선 누구나 솜씨 좋은 사진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이 들뜬 여행자에게 사진 한장 부탁할 수도 있겠지. 웃음 띤 사람들 속에서 역시 더 많이 웃을 수 있겠지.

그런데 난 10분에 한 번 꼴로나 겨우 사람을 볼 수 있는 지금의 텅 빈 가파도도 좋았다. 어쩌면 더 좋았다. 발 앞에 걸음을 멈추게 하는 아름다움이 없으니 저 멀리 지평선을 자주 바라볼 수 있어 좋았다. 눈 앞에 눈을 사로잡는 것이 없으면 더 먼 곳에 시선을 두고 걸을 수 있다는 걸, 살 수 있다는 걸 가파도가 내게 가르쳐 주었다. 그렇더라도, 3시간은 좀 길긴 길었다.

▲ 날이 점점 개였다. 느긋이 하늘과 바다를 보다. ⓒ 황보름


▲ 우리를 데리러 오는 배 ⓒ 황보름


열심히 둘러본다고 둘러봤는데도 아직 시간이 꽤 많이 남았다. 포구 쪽으로 돌아와 방파제에 대충 걸터앉았다. 낚시꾼들의 낚시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느긋했다. 하늘도 푸르고, 바다도 푸르렀다. 저 멀리에서 우리를 태우고 갈 배가 들어오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2015년 5월 26일부터 6월 24일까지, 30일간의 제주 여행 연재글입니다.
이 기사는 황보름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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