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리그 연수 마다한 양준혁, 왜 한국에 남았나
[예능작가의 세상읽기] 멘토리 야구단으로 꿈나무 육성... 제2의 야구 인생
지난 2010년 가을, 은퇴식을 치른 양준혁을 만나기 위해 서울 잠실야구장을 찾았다. 선수들이 타격 연습을 하고 있는 그라운드 귀퉁이에서 공을 던져주는 그를 만날 수 있었다. TV 속에서나 경기장 너머로 봤던 것보다 훨씬 더 큰 덩치 때문인지, 그의 이름값 때문인지 유난히 거대해 보였다.
대한민국 야구의 역사를 바꾸며 '양신'이라 불린 양준혁은 이제 야구재단의 이사장으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방송인으로, 야구 해설 위원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2015년 가을, 야구선수 양준혁보다 더 푸근해진 양준혁야구재단의 양준혁 이사장을 만났다.
지도자의 길 대신 선택한 양준혁야구재단
야구에 자신의 인생을 걸었다는 그는 '평생 야구인으로 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했다. 양준혁은 자신의 이름을 딴 야구재단을 세웠고, 저소득층가정과 다문화가정 자녀들이 주축으로 활동하는 '멘토리 야구단'의 감독을 맡고 있다. 당연하게 생각했을 프로구단 지도자의 길을 마다하고 재단 사업과 기부 활동에 뛰어든 그가 생각하는 남은 야구 인생은 무엇일까.
- 평생을 야구와 함께 했고, 모든 것을 걸겠다고 했다. 야구의 매력은?
"야구는 절대 거짓말을 안 한다. 특히 타자는 투수의 공을 배트로 맞춰야 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조금만 빗나가면 파울이 되거나 아웃이 된다. 정확하게 맞으면 홈런이나 안타가 되고, 땀을 흘린 만큼 홈런과 안타를 칠 확률이 높아진다. 정직한 운동이다."
- 지도자의 길 대신 야구재단을 설립한 이유는? 당시에 다들 놀랐다.
"메이저리그로 코치 연수를 떠날 준비를 했다. 구단에서 은퇴식 입장 수익금을 나에게 줬지만 결코 내 돈은 아니었다. 그래서 청소년 야구 발전을 위해 야구를 사랑하는 일반 학생들로 구성된 전국의 팀이 참가하는 대회를 개최했다. 당시 청소년들의 야구 열정을 보고 감동 받았고, 나 역시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들에게 지속적인 지원과 관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 야구를 처음 시작했을 때 생각이 많이 났겠다.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
"사촌형과 삼촌이 야구를 하는 야구 집안이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야구장에 가실 때마다 따라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야구에 빠졌다. 부모님께 야구를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고,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서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했다."
- 선수로서 그라운드에 서는 것과 재단 이사장으로서의 자세는 다를 것 같다.
"축구 같은 경우, '홍명보 장학재단'은 대한축구협회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 하지만 한국야구위원회는 재단 사업을 지원하는 데 소극적이다. 야구를 사랑하는 아이들을 위해 야구 단체와 지자체의 지원이 시급하다. 그래도 지금은 함께 하고자하는 분들이 생겨서 반갑고, 두산 김현수나 한화 조인성 선수 등 여러모로 도움을 주고 있는 동료들이 고맙다."
뛰어라! 지금이 마지막인 것처럼
SK 와이번스 선발투수 김광현에게 3개의 삼진을 당하고, 9회말 마지막 타석에 선 양준혁. 타구는 평범한 땅볼이었지만, 그는 언제나처럼 1루까지 전력질주했다. 그것이 그라운드에서 야구선수 양준혁으로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나는 예능프로그램에서 그와 오랜 시간 함께 일을 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뭐든지 열심히 한다. 방송에서 장기 프로젝트로 탭댄스나 태권도를 배운다고 하면, 카메라가 꺼져 있을 때나 혼자 있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
그것이 재능기부든, 강연이든 마찬가지다. 자신이 그라운드에서 받았던 사랑을 팬들에게 보답하고, 책에서 배울 수 없는 교육을, 야구를 통해 함께하겠다는 목표로 만들어진 '멘토리 야구단'. 그는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 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고, 소외된 계층의 아이들이 야구를 통해 변화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 멘토리 야구단은 양준혁야구재단의 상징이고,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을 것 같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지만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다. 멘토리 야구단 선수들을 보면 어릴 적 내 모습을 보는 것 같다. 학창 시절 야구 선수를 할 때, 누군가의 지원과 관심을 받았다면 더 즐겁게 야구를 했을 것 같다. 은퇴 후 야구 꿈나무들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항상 갖고 있었다."
- 자선야구대회, 골프대회, 야구 용품 지원 사업 등 다양한 활동을 한다.
"올해는 자선 골프대회를 개최했고 많은 분들이 함께했다. 야구대회는 보통 전, 현직 야구 선수와 연예인 등으로 멤버를 구성한다. 하지만 경기 입장 수입금만으로 대회를 운영하기가 어려워, 직접 뛰어 다니면서 스폰서십 계약을 맺는다. 야구장을 찾기도 쉽지 않다. 다양한 재단 사업을 통해 좀더 많은 곳에 도움을 줬으면 한다."
- 양준혁이 생각하는 기부와 나눔이란 무엇인가.
"자리에서 멀리가 아니라 가까운 곳을 먼저 보려고 한다. 우리 주변에도 어려운 아이들이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돈보다 중요한 것은 정성과 의지다.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재능 기부라면 언제든 환영이다. 나 혼자의 힘으로, 앞으로는 빨리 갈 수 있지만 멀리 갈 수는 없다. 사회의 관심과 여러분들의 도움이 절실하다."
- 양준혁과 양준혁야구재단의 앞으로 계획과 목표는.
"야구뿐만 아니라 다양한 스포츠를 통해, 아동과 청소년을 위한 봉사재단으로 활동 폭을 넓힐 계획이다. 지나치게 많은 일을 시작해, 형식적으로 변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해 나가고 싶다."
양준혁은 쓴소리를 많이 한다. 현역시절, 나이 많은 선수들은 후배들의 앞길을 막지 않기 위해 물러나야 한다는 인식과 부진을 부상 탓으로 돌리는 관행에 대해서는 "프로답지 못하다"고 했다. 김성근 감독의 고양 원더스가 KBO의 지원 문제로 해체하자 "야구판 참 잘 돌아간다. 야구를 위해 일하는 진짜 일꾼들은 소외되는 야구판 현실이 부끄럽다"며 일침을 가했다.
다시 2010년 가을. 밀려드는 인터뷰와 촬영내용이 비슷비슷했는지, 질문에 대한 대답에 막힘이 없었다. 궁금했다. 찬란했던 야구 인생의 마침표를 찍는 순간, 그에게 야구공의 의미는 무엇인지. 웬일인지 그가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특유의 사투리가 섞인 양준혁의 대답.
"공이 공이죠. 뭐."
야구는 야구 그대로일 때가 가장 아름답다는 양준혁. 그의 남은 야구 인생을 응원한다.
대한민국 야구의 역사를 바꾸며 '양신'이라 불린 양준혁은 이제 야구재단의 이사장으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방송인으로, 야구 해설 위원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2015년 가을, 야구선수 양준혁보다 더 푸근해진 양준혁야구재단의 양준혁 이사장을 만났다.
지도자의 길 대신 선택한 양준혁야구재단
▲ 양준혁과 멘토리야구단지도자의 길 대신 장학사업을 선택한 양준혁 ⓒ 양준혁 야구재단
야구에 자신의 인생을 걸었다는 그는 '평생 야구인으로 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했다. 양준혁은 자신의 이름을 딴 야구재단을 세웠고, 저소득층가정과 다문화가정 자녀들이 주축으로 활동하는 '멘토리 야구단'의 감독을 맡고 있다. 당연하게 생각했을 프로구단 지도자의 길을 마다하고 재단 사업과 기부 활동에 뛰어든 그가 생각하는 남은 야구 인생은 무엇일까.
- 평생을 야구와 함께 했고, 모든 것을 걸겠다고 했다. 야구의 매력은?
"야구는 절대 거짓말을 안 한다. 특히 타자는 투수의 공을 배트로 맞춰야 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조금만 빗나가면 파울이 되거나 아웃이 된다. 정확하게 맞으면 홈런이나 안타가 되고, 땀을 흘린 만큼 홈런과 안타를 칠 확률이 높아진다. 정직한 운동이다."
- 지도자의 길 대신 야구재단을 설립한 이유는? 당시에 다들 놀랐다.
"메이저리그로 코치 연수를 떠날 준비를 했다. 구단에서 은퇴식 입장 수익금을 나에게 줬지만 결코 내 돈은 아니었다. 그래서 청소년 야구 발전을 위해 야구를 사랑하는 일반 학생들로 구성된 전국의 팀이 참가하는 대회를 개최했다. 당시 청소년들의 야구 열정을 보고 감동 받았고, 나 역시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들에게 지속적인 지원과 관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 야구를 처음 시작했을 때 생각이 많이 났겠다.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
"사촌형과 삼촌이 야구를 하는 야구 집안이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야구장에 가실 때마다 따라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야구에 빠졌다. 부모님께 야구를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고,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서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했다."
- 선수로서 그라운드에 서는 것과 재단 이사장으로서의 자세는 다를 것 같다.
"축구 같은 경우, '홍명보 장학재단'은 대한축구협회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 하지만 한국야구위원회는 재단 사업을 지원하는 데 소극적이다. 야구를 사랑하는 아이들을 위해 야구 단체와 지자체의 지원이 시급하다. 그래도 지금은 함께 하고자하는 분들이 생겨서 반갑고, 두산 김현수나 한화 조인성 선수 등 여러모로 도움을 주고 있는 동료들이 고맙다."
뛰어라! 지금이 마지막인 것처럼
▲ 멘토리 야구단멘토리야구단을 직접 지휘하는 양준혁 ⓒ 양준혁 야구재단
SK 와이번스 선발투수 김광현에게 3개의 삼진을 당하고, 9회말 마지막 타석에 선 양준혁. 타구는 평범한 땅볼이었지만, 그는 언제나처럼 1루까지 전력질주했다. 그것이 그라운드에서 야구선수 양준혁으로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나는 예능프로그램에서 그와 오랜 시간 함께 일을 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뭐든지 열심히 한다. 방송에서 장기 프로젝트로 탭댄스나 태권도를 배운다고 하면, 카메라가 꺼져 있을 때나 혼자 있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
그것이 재능기부든, 강연이든 마찬가지다. 자신이 그라운드에서 받았던 사랑을 팬들에게 보답하고, 책에서 배울 수 없는 교육을, 야구를 통해 함께하겠다는 목표로 만들어진 '멘토리 야구단'. 그는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 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고, 소외된 계층의 아이들이 야구를 통해 변화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 멘토리 야구단은 양준혁야구재단의 상징이고,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을 것 같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지만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다. 멘토리 야구단 선수들을 보면 어릴 적 내 모습을 보는 것 같다. 학창 시절 야구 선수를 할 때, 누군가의 지원과 관심을 받았다면 더 즐겁게 야구를 했을 것 같다. 은퇴 후 야구 꿈나무들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항상 갖고 있었다."
- 자선야구대회, 골프대회, 야구 용품 지원 사업 등 다양한 활동을 한다.
"올해는 자선 골프대회를 개최했고 많은 분들이 함께했다. 야구대회는 보통 전, 현직 야구 선수와 연예인 등으로 멤버를 구성한다. 하지만 경기 입장 수입금만으로 대회를 운영하기가 어려워, 직접 뛰어 다니면서 스폰서십 계약을 맺는다. 야구장을 찾기도 쉽지 않다. 다양한 재단 사업을 통해 좀더 많은 곳에 도움을 줬으면 한다."
- 양준혁이 생각하는 기부와 나눔이란 무엇인가.
"자리에서 멀리가 아니라 가까운 곳을 먼저 보려고 한다. 우리 주변에도 어려운 아이들이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돈보다 중요한 것은 정성과 의지다.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재능 기부라면 언제든 환영이다. 나 혼자의 힘으로, 앞으로는 빨리 갈 수 있지만 멀리 갈 수는 없다. 사회의 관심과 여러분들의 도움이 절실하다."
- 양준혁과 양준혁야구재단의 앞으로 계획과 목표는.
"야구뿐만 아니라 다양한 스포츠를 통해, 아동과 청소년을 위한 봉사재단으로 활동 폭을 넓힐 계획이다. 지나치게 많은 일을 시작해, 형식적으로 변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해 나가고 싶다."
양준혁은 쓴소리를 많이 한다. 현역시절, 나이 많은 선수들은 후배들의 앞길을 막지 않기 위해 물러나야 한다는 인식과 부진을 부상 탓으로 돌리는 관행에 대해서는 "프로답지 못하다"고 했다. 김성근 감독의 고양 원더스가 KBO의 지원 문제로 해체하자 "야구판 참 잘 돌아간다. 야구를 위해 일하는 진짜 일꾼들은 소외되는 야구판 현실이 부끄럽다"며 일침을 가했다.
다시 2010년 가을. 밀려드는 인터뷰와 촬영내용이 비슷비슷했는지, 질문에 대한 대답에 막힘이 없었다. 궁금했다. 찬란했던 야구 인생의 마침표를 찍는 순간, 그에게 야구공의 의미는 무엇인지. 웬일인지 그가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특유의 사투리가 섞인 양준혁의 대답.
"공이 공이죠. 뭐."
야구는 야구 그대로일 때가 가장 아름답다는 양준혁. 그의 남은 야구 인생을 응원한다.
○ 편집ㅣ박순옥 기자 |
덧붙이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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