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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광이 이런 걸 기자들 모르게 막으라는 건가?"

[광명동굴, 폐광의 기적을 만든 사람들 10] 전인자 자치행정국장 ①

등록|2015.11.11 15:16 수정|2015.11.11 15:16

▲ 광명시는 '광명동굴 세계로 비상하다' 프로젝트로 경기도가 주최한 <넥스트 경기 창조 오디션 시즌 2>에서 1등상은 굿모닝상을 수상, 100억 원의 예산을 확보했다. ⓒ 윤한영


양기대 광명시장 취임으로 시작된 폐광 개발은 2015년 4월 4일, 유료로 전환되면서 화려하게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광명동굴 전성기가 시작된 것이다. 10월말 현재, 광명동굴을 찾은 관광객은 80만 명을 넘어섰다. 광명시 수입은 50억을 넘어섰다. 자치단체가 폐광을 개발해 이 같은 성과를 거둔 사례는 일찍이 없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광명시는 지방자치의 새로운 롤 모델을 만들어낸 것이다.

광명시의 이런 성공은 지난 10월 7일, 경기도에서 열린 <넥스트 경기 창조 오디션 2>에서 1위인 굿모닝상을 수상하면서 인정받았다. 광명시는 광명동굴 개발 프로젝트인 '광명동굴 세계로 비상하다'는 주제로 공모사업에 참여했고, 당당히 1위를 거머쥐면서 광명동굴의 존재를 확실하게 각인시킬 수 있었다.

양기대 시장은 1위 수상 소식이 알려지자 "광명동굴을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가 깜짝 놀랄 동굴테마파크를 만들겠다"는 소감을 밝힌 바 있다. 그가 처음 폐광 개발계획을 발표했을 때만 해도 성공을 예상한 이는 거의 없었다. 대신 실패해 예산낭비의 전형적인 사례가 될 것이라는 우려와 비난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양 시장은 광명시청 공무원들과 함께 폐광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성공을 이끌어냈다. 양 시장의 뚝심 있는 추진력과 광명시 공무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이루어낸 결과다.

한데 광명동굴 성공요인에는 한 가지를 더 덧붙일 수 있다. 바로 차별화된 홍보 전략이다. 폐광 개발의 성공을 가늠하는 잣대는 관광객 유치다. 광명시가 폐광을 아무리 멋진 동굴테마파크로 만들어도 관광객들이 찾지 않는다면 실패다.

관광객이 없는 관광지는 건조한 바람이 휘몰아치는 황량한 모래사막과 다를 게 없다. 일자리 창출, 지역경제 활성화는 헛된 구호로 그치고 말 수밖에 없다. 결국 예산낭비의 전형적인 사례가 되면서 잊힐 뿐이다. 이런 예상하는 이들, 제법 많았다.

▲ 양기대 광명시장과 전인자 자치행정국장 ⓒ 윤한영


양 시장은 폐광 개발 계획을 세울 때부터 홍보전략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바탕에는 그가 기자 출신이라는 사실이 작용했다. 한 때 동아일보에서 잘 나가는 정치부 기자였던 양 시장은 누구보다 '홍보'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취임하면서 공보과를 강화해 홍보실로 조직 개편을 단행한 것은 그 때문이다.

양 시장은 홍보전략을 잘 세워야 광명동굴이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고, 폐광을 사들이는 순간부터 홍보를 시작해야 한다는 방침을 세워두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광명동굴을 매입한 직후 홍보를 시작했다.

홍보전략을 세우고 추진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홍보실장이다. 홍보실장의 홍보 마인드가 성패를 좌우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누가 그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서 광명동굴 홍보는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었다.

양 시장은 홍보실장으로 여성 공무원을 발탁했다. 2010년 7월, 그 때만 해도 파격적인 인사였다. 광명시청 개청 이후 최초의 여성 공보담당관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경기도 31개 시·군에서 유일한 여성 공보과장(홍보실장)이기도 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공보과장은 여성이 가는 자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전례를 양 시장이 깼다. 양 시장은 능력이 있다면 성별이나 직종을 가리지 않고 발탁한다. 그의 그런 인사 사례의 출발이 전인자 홍보실장 발탁이었다.

그렇다면 양 시장의 이런 파격 인사는 성공을 거뒀을까? 전 실장의 홍보실장 재임기간을 보면 알 수 있다. 전 실장의 홍보실장 재임기간은 4년 6개월이다. 최장기 재임 기록을 세웠다. 그만큼 뛰어난 능력을 보였고, 그런 전 국장에 대한 양 시장의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이후 전 실장은 능력을 인정받아 광명시청 최초의 여성 자치행정과장을 거쳐 최초의 여성 자치행정국장이 된다.

▲ 전인자 자치행정국장 ⓒ 윤한영


이런 전 실장도 처음에는 '홍보'에 대해 문외한이었다. 그 역시 일 잘하는 '전형적인 공무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때까지만 해도 지방지가 언론의 전부인 줄 알았다고 고백한다. 세상이 지방지를 중심으로 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런 그가 홍보실장이 되면서, 양 시장이 폐광 개발을 시작하면서 달라졌다. 닫힌 공무원 마인드에서 벗어나 새롭게 시정을 보게 됐고, 홍보의 의미를 깨우치게 된 것이다. 언론관 역시 달라졌다. 그런 그의 시각이 업무에 반영되었고, 광명시 홍보는 공무원 중심이 아닌 시민 중심으로 거듭나게 됐다. 그 기조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에 대해 전 국장은 이렇게 설명한다.

"예전에는 홍보가 아닌 공보였죠. 시 정책을 일방적으로 알리는 게 공보였다면 홍보는 시 정책을 알리고 시민의 의견을 받아들여 쌍방향 소통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에서 추진하는 정책을 알리고 그것을 시민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파악하고 그것을 해당부서에 알려 반영하는 것이죠. 홍보실은 시와 시민 사이를 연결하는 일종의 터미널 역할을 해야 하는 거죠."

광명시가 폐광을 사들인 것은 2011년 1월 26일. 양 시장이 전 국장에게 처음으로 폐광을 홍보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은 2월 9일이다. 그가 전 국장에게 가장 먼저 지시한 것은 폐광 방문이었다.

"당시의 제 업무수첩을 보면 2월 9일에 시장님이 '폐광을 홍보하라'는 지시를 하셨다는 내용이 있어요. 그 때가 처음이었죠. 그러면서 시장님께서 '홍보실장이 현장에 안 갔다 오면 안 되잖아요' 하면서 폐광에 가라고 하셨어요. 그 때만 해도 동굴에 자유롭게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언제 가야 하나 기회를 엿보다가 시장님이 가실 때 따라나섰죠.

처음 안에 들어갔을 때 비릿한 냄새가... 거기가 새우젓 저장고였잖아요. 냄새가 말도 못할 정도였죠. 장화를 신었는데 바닥은 물이 차서 첨벙거리고, 천정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어떻게 말로 표현을 하지 못하겠더라구요. 시장님이 보라고 해서 오긴 왔는데 뭘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어요. 이걸 어떻게 홍보하라는 거지? 폐광이 이렇다는 걸 기자들이 모르게 막으라는 건가? 이런 생각까지 했어요."

전 국장의 이런 생각은 당시의 폐광 안이 그만큼 형편없었다는 것으로 풀이될 수 있다. 그래도 전 실장은 폐광 홍보를 시작한다. 개발 가치가 있는 폐광이 광명시의 자산이 되었으니,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 2011년, 광명동굴 개발을 시작하기 전 전인자 국장이 홍보실에서 함께 근무하는 조규진 팀장, 김태영 팀장과 현장을 찾았다. ⓒ 윤한영


개발을 시작하지 않은 폐광에 괜찮은 홍보 거리가 있을 리가 없었다. 폐광 내부 정리는 시작되지 않은 상태였고, 양 시장과 공무원들은 이곳을 어떻게 개발할 것인지를 회의를 거듭하면서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양 시장은 자신이 품고 있는 개발계획을 공무원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않고, 회의와 토론을 통해 공론화를 하면서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나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 국장은 폐광 홍보 전략을 세워야 했다. 그는 긍정적인 마인드를 지닌 사람이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긍정적인 면을 먼저 생각하고 되는 방향으로 일을 이끌어낸다. 그의 그런 면은 폐광 홍보 정책에서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처음에는 동굴의 가치를 부각시키는 것에 중점을 뒀어요. 동굴의 지리적인 여건과 동굴 개발의 가치를 홍보한 거죠. 그렇다고 과장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이었죠. 그 이후에는 동굴이 변화하는 과정을 계속해서 알렸어요.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을 알린 것이죠. 또 동굴과 관련해 유명한 사람이나 전문가가 방문해서 개발 가치가 있다는 말을 하면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렸죠. 일종의 자가발전이라고 해야 하나?"

그해, MBC의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프로그램을 폐광에서 촬영했다. 전 국장은 그 사실도 어김없이 동굴 홍보에 활용했다. 그는 이런 홍보가 훗날 광명동굴의 역사가 돼 기록으로 남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 2011년,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프로그램을 광명동굴에서 촬영했다 ⓒ 윤한영


다양한 홍보 방안을 짜내 홍보를 거듭하던 전 국장은 폐광의 현재 모습을 주목하게 된다. 폐광은 날이 갈수록 다양한 형태로 변화를 거듭하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할 것이 분명했다. 그 때가 되면 폐광이라는 말도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상태에서 폐광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전망을 기록을 남기자. 전 국장은 이런 생각을 한다.

그렇게 해서 그가 추진한 것이 <광명 가학광산동굴 백년 스토리> 출간이었다. 폐광은 일제강점기인 1912년 채광을 시작할 때부터 1972년 폐광할 때까지 '시흥광산'으로 불렸다. 1999년, 최봉섭 테마개발과장이 폐광 탐험에 나선 이후 '가학광산'으로 불렸으며, 2011년 양기대 시장이 개발을 시작한 뒤 '광명동굴'로 바뀌었다.

전 국장은 이런 폐광의 역사를 정리할 필요성을 인식했다. 이 또한 광명시 홍보의 새로운 시도였다.

"그 때까지만 해도 우리 광명시에서 만든 홍보책자는 시정을 알리는 시정화보 수준이었죠.  가학광산동굴 스토리처럼 하나의 주제를 잡아서 책으로 엮는 것은 처음이었어요. 이전에는 누구도 광명시정 전체가 아닌 하나의 주제를 선택해서 홍보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거든요."

▲ 전인자 자치행정국장 ⓒ 윤한영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담을 것인지 논의를 거쳤고, 작가를 섭외했다. 당연히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그래도 광명동굴의 모든 것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그런 면에서 전 국장은 자부심을 느낀다고 털어놓았다. 이 책에 1912년부터 시작된 광명동굴 100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았기 때문이다.

"이게 광명동굴에 대한 기록이 담긴 최고의 역사물이 될 것이라는 자부심이 있었어요. 지금 보면 아쉬운 점이 많지만, 그 때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최선을 다해서 만들었기 때문이죠. 이 책 외에는 광명동굴의 역사가 기록된 자료가 없잖아요. 그런 면에서 볼 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책이기도 하죠."

<광명 가학광산동굴 백년 스토리> 출판기념회는 10월 13일에 광명동굴에서 열렸다. 광명동굴 역사를 되새기면서 동굴 개발의 성공을 기원하는 뜻 깊은 날이었다.

전인자 자치행정국장 ②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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