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난 '남의 가족' 얘기가 이리 공감되다니...
[서평] 장애아 엄마 만화가 '장차현실'의 <또리네 집>
▲ <또리네 집> 책표지. ⓒ 보리
"장애를 가진 아이가 태어나면 그 집안은 빚더미에 앉는다"와 같은 말까지 사람들 사이에 공공연하게 오갈 정도로 장애를 가진 아이에 대한 우리 사회의 복지는 미흡, 그 부모들이 감당해야 하는 사회적인 편견이나 경제적인 것들은 매우 무겁다고 한다.
때문이다. 대개 장애를 가진 아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가정은 어두울 것이라 추측하기 쉽다. 그런데 이처럼 안쓰럽고 독특한 가족의 이야기인 <또리네 집>(보리 펴냄)은 매우 유쾌한 동시에 묵묵한 감동으로 장애아가 있는 가정의 문제를 풀어낸다. 그래서 웃다가 울다가를 반복하는 한편 좀 짠하게 읽힌다.
"엄마 섹스가 뭐야?" 열여덟 딸 아이의 질문
'"엄마, 자위 행동이 뭐야? 엄만 언제 해봤어? 섹스가 뭐야?"
봄을 맞이한 열여덟 살 아가씨 은혜 얼굴엔 봄빛이 가득하다. 은혜는 성숙해졌다. 그리고 음란해졌다. 은혜가 꼬치꼬치 묻는 게 쑥스럽긴 해도 가능하면 자세하게 이야기해주려고 애쓴다. 제대로 알아야 어떻게 하는 게 옳은지,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알 수 있는 법. 난 은혜가 이렇게 자란 게 반갑다. 그러나 장애인의 성(性)을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의 눈은 불안하다.
"딸이 크니 더 걱정이겠다.", "지적 장애 여성들의 성범죄 피해가 날로 는다는데….", "쯧쯧, 밖으로 못나가게 해요!"
장애 여성을 옥죄는 이런 현실에서도 은혜가 장애인으로서, 여자로서 꿋꿋하게 세상을 살아가길 바란다. 그리고 은혜가 자신의 삶을 스스로 판단하고 꾸려가길 바란다. 걱정 많은 엄마의 밤은 그렇게 깊어간다.' - <또리네 집> '문 닫고 하세요'에서.
인상 깊게 읽은 이야기 중 하나다. 이성에 막 눈 뜨기 시작한 은혜는 어느 날 다운증후군 장애를 겪는 아이 특유의 천진함으로 엄마 장차현실에게 대놓고 자위를 언제 해봤냐? 묻는다. 아, <또리네 집> 이야기들은 저자 장차현실 본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녀가 이 만화의 바탕인 '또리네 집'을 만화로 그린 것은 10년 전부터. 실제로 다운증후군 딸 은혜가 있단다.
아이의 질문이 쑥스럽지만 대부분의 장애아 부모들처럼 자식보다 하루 나중에 죽거나, 자식과 같은 날 죽는 것이 마음 속 소원인 엄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은혜 혼자 살아가야 할 그런 날들을 위해 성(性)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고자 고민의 시간들을 보낸다.
엄마의 이런 고민 덕분에 섹스가 무엇인지 조금 눈치 챈 은혜는 어느 날 밥상에서 "밤새 엄마 아빠의 아아아, 오오오 소리 때문에 못 잤다"며 툴툴 대면서, 그러니 "문 닫고 하세요"라고 당당하게 요구한다. 이에 부부는 자신들이 아이들에게 그간 너무 예의 없었음을 인정, 그날 밤 예의 있게? 한다.
전체적으로 유쾌한 느낌의 3쪽 짜리 이 만화는 장애 여성들의 성만 이야기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성에 대한 그릇된 인식과 편견, 무지, 그로 인한 성폭력에 대해서도 이야기, 함께 생각하게 한다.
지치고 힘든 사람들을 토닥여주는 <또리네 집>
▲ <또리네 집> 책 속 한 장면. ⓒ 장차현실
기억에 남는 이야기 또 하나는 이처럼 재미있는 그림으로 이야기를 맺는 '눈이 내린 날에'. 늘 쪼들리고 사는 또리네는 새해를 앞두고 여행을 떠나자 한다. 그러나 돈 걱정에 결국 강 건너 물 좋다는 목욕탕에나 갔다 오기로 한다. 가족은 목욕탕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나온다. 그러나 이미 캄캄해진 그 사이 엄청난 눈이 내려 차가 눈 속에 묻혀 꼼짝을 하지 못한다.
가족은 한 시간 가까이 벌벌 떨면서 견인차를 기다리나 결국 견인차는 오지 않는다. 이에 가족은 할 수 없이 캄캄한 밤에 선명한 불빛으로 빛나고 있는 모텔로 향한다. 사방에 걸린 전신거울과 물침대를 보고 신이 난 또리네 가족. 가족 모두 물침대에 누워 포근한 잠에 빠져든다.
'26년 전 나는 스물여섯 살에 장애가 있는 은혜를 낳았다. 표현하기 힘들 만큼 슬프고 아이가 안쓰러웠다. 또 앞으로 펼쳐질 내 인생이 너무 암담했다. 그런데 그런 은혜 덕분에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작가가 되었다. 또, 전 남편과 헤어졌다. 그때 생긴 내 안의 분노와 상처를 안고 어찌 살까 했는데, 덕분에 지금의 멋진 남편을 만나게 되었다. 게다가 정말 예쁜 아들 또리가 생겼고, 은혜에겐 든든한 동생을 만들어 주는 벅찬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삶이 장밋빛 인생이 된 것은 아니다."일을 일답게 하고 싶다"를 외친 지 10년. 하지만 한 아이, 두 아이, 아니 남편까지 세 아이를 키우고 있는 나는 시간 빈곤 인간이 되어 있다. 그렇게 수없이 방해 받으며 게릴라처럼 일하는 구질구질한 작가가 되어버린 것이다. 건강이 점점 나빠지는 은혜를 돌보느라 기진맥진할 때가 많고 성인이 된 은혜의 무뚝뚝하고 신경질적인 태도 때문에 늘 신경이 곤두서 있다. 남편이랑 또리 교육 문제로 사사건건 부딪치고, 나이 차이가 있는 우리 부부를 바라보는 세상의 눈길은 여전히 이상하고 어설프다. 이렇게 괴로운 일이 닥칠 때면 나는 주문 외듯이 외친다. "좋은 일의 포석! 됐어! 꼭 잘될거야!"….' - <또리네 집> '작가의 말' 중에서.
사실 <또리네 집>을 한참 읽는 동안에까지 저자 장차현실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에 관심을 가진 한 만화가가 여러 유형의 문제를 안고 있는 한 가정을 설정하여 자신의 생각이나 대안을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만화로 이야기하는 것'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작가의 말을 읽노라니 작가 자신의 이야기였다. 필요에 의해 설정된 것이 아닌, 저자의 고민과 아픔이 바탕이 된 그런 이야기들이라니 훨씬 각별하게 와 닿는 것은 당연하다. 때문일까. 컴컴한 밤에 눈이 엄청 내려 꼼짝도 하지 못할 상황에 처한 가족이 그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고 행복한 잠을 이룬 모습을 표현한 이 그림과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작가의 말을 읽는 중에 인상 깊게 와 닿았던 몇몇 이야기들과 함께 이 이야기와 그림이 문득 떠오른 것은 나도, 만화가도, 그리고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누구나 수없이 겪어내고 넘어가는 삶의 고비, 그 끝의 평화와 행복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지난날 이제 끝났나 싶으면 다시 기를 쓰고 내게 달려들던 악재들을 힘들게 이겨냈던 내 경험 덕분에 공감이 컸기 때문이리라.
<또리네 집>은 이런 만화다. 책 속 이야기들은 이처럼 언뜻 재미있으나 동시에 무언가 생각하게 하고, 묵묵한 위로와 감동을 주는 것들이 많다. 이처럼 자신의 문제이거나 우리 이웃 누군가의 문제인 것들을 쉽고 재미있게 들려줌으로써 우리들이 함께 생각하고 풀어야 할 '그 뭔가'를 이야기한다. 그래서 공감은 훨씬 커진다. 아니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바란다.
작가의 말에 이어지는 '저자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지인의 추천사' 중에 깊이 공감되는 부분이 있어 그 말을 빌려 '또리네 가족의 좌충우돌, 그러나 희망의 이야기'들을 많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무언가 이겨내야 하는 것으로 지치고 힘든 사람들이 위로받기를, 그리하여 살아갈 힘을 얻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 말이다.
"독자는 은혜의 자리에 누군가를, 아니 무엇을 넣어 놓고 읽어 보아도 좋을 듯싶다, 도저히 견뎌낼 수 없는, 이겨낼 수 없는 인생의 그 무엇들을 대입시켜서 말이다. 20년 뒤에도 자기 옆에 있을 것들을 말이다." - <또리네 집> '추천의 글(화가 김미경)'에서.
덧붙이는 글
<또리네 집> 장차현실 (지은이) | 보리 | 2015-08-01 |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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