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더 셰프>, 2010 <파스타> 보다 못한 실패작
[김성호의 씨네만세 92] 요리와 드라마의 무덤 <더 셰프>
▲ 더 셰프아담 존스(브래들리 쿠퍼 분)를 따라 플레이팅에 집중하는 스위니(시에나 밀러 분). 전작 <아메리칸 스나이퍼>에서 부부로 출연했던 둘은 이번엔 연인으로 발전하는 주방장과 보조요리사를 맡아 연기했다. ⓒ (주)이수C&E
바야흐로 셰프의 시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셰프라는 단어조차 생소했는데 이제 셰프라 불리는 유명 요리사 몇 명의 이름은 상식이 되어버린 듯하다. 먹방과 쿡방부터 오디션까지, 각양각색 TV 프로그램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는 요리사들의 모습은 3D업종의 하나로 꼽히던 요리사들의 세계가 적어도 외부에서 바라볼 때만큼은 선망의 대상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요리사들이 선망의 대상이 되었으니 영화와 드라마의 소재로 요리와 요리사가 쓰이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예, 셰프!" 이 한 마디 대사로 여심을 사로잡았던 TV 드라마 <파스타>는 그 대표격이라 할 만한 작품이다. 철저히 위계질서에 복종하는 남성 우월주의적 공간 주방을 배경으로 바위틈에서 피어나는 고운 꽃 같은 연애담을 요리한 이 드라마는, 요리를 소재로 한 창작물의 전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선균을 단박에 톱스타의 자리로 올려놓은 <파스타> 이후 요리와 요리사를 등장시킨 수많은 작품이 쏟아졌다. 그러나 예능에서 요리사들이 누리는 만큼의 인기를 얻은 작품은 아직 없다.
지난 5일 개봉해 이제 1주 일차를 맞은 <더 셰프>는 5년 전 <파스타>가 보여준 요리사 드라마의 전형을 그대로 답습한 작품이다. 앞서 적은 것처럼 남성 우월주의적 공간인 주방이 이야기의 주요 무대이며, 수석 요리사와 보조 요리사 사이의 사랑 이야기를 무게감 있게 다뤘다는 점에서 비슷한 구석이 한둘이 아니다. 주인공인 수석 요리사 캐릭터도 까칠한 성격에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으며 내면에는 아물지 않은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공통점이 있다고 하겠다.
마초적으로 인물들을 장악하는 리더격 주인공이 내면에 아픈 상처가 있고 이를 주변인과의 관계를 통해 치유해간다는 설정은 식상하기 이를 데 없다. 유치함의 측면에서는 동화 속 공주님이 왕자의 키스를 받고 저주에서 해방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수준이다. 주인공을 연기하는 인물이 주체적으로 그려지긴 하지만 과거의 상처로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고 이를 채워주는 게 언제나 여주인공이란 점에서 그렇다. 동화와 마찬가지로 이성이 매력적으로 생각할 법한 배우가 주인공을 연기한다는 점 역시 전형이라 할 만하다.
전형적인 이야기를 막장드라마처럼 표현하다
▲ <더 셰프>의 포스터관계를 주제로 한 영화에서 관계가 살아나지 못했다는 것, 그건 이 영화를 볼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 (주)이수C&E
전형적인 이야기를 줄거리로 채택한 영화가 주의해야 하는 건 언제나 표현이다. 전형적인 이야기가 진부하게 표현되면, 그보다 실망스러운 작품이 없다. 물론 전형성이 나쁘기만 한 건 아니다. 진부한 설정일지라도 참신하게 표현되면 관객들이 이야기에 더욱 쉽게 빠져든다는 건 대표적인 장점이다. 관객이 이야기에 몰입하는 '비등점'이 빨리 찾아온다는 건, 제한된 러닝타임 내에 더욱 풍부한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수많은 장르영화가 기꺼이 오래된 전형을 차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배우이자 제작자, 연출자로 여러 방면에서 활약해온 존 웰스 감독은 <더 셰프>에서 요리사가 등장하는 기존 작품들의 전형을 적극 빌렸다. 앞서 적은 것과 같이 전형의 장점을 누리기 위한 선택인데, 이번에는 그만 전형성이 독으로 작용하고 말았다. 연출력이 너무도 부족했던 나머지 어느 두 캐릭터 사이의 관계도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다. 에피소드는 자극적일 뿐이며 전환은 우연에 우연이 이어지는 형국이다. 총체적 난국이란 말은 이 영화에 딱 어울린다.
영화는 한 요리사의 재기 과정을 다룬다. 한때 프랑스 최고의 요리사로 불렸던 아담 존스(브래들리 쿠퍼 분)가 그 주인공이다. 요리에 대해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자신을 절제하지 못한 아담은 방탕한 생활 끝에 쌓아온 모든 기반을 잃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친다. 그리고 3년의 세월이 흘러 타지에서 방황하던 그는 런던에서 요리사 최고의 영예인 미슐랭 3스타를 목표로 재기하기로 한다. 이후 영화는 아담이 동료들을 모아 자신의 주방을 꾸리며 겪게 되는 온갖 종류의 어려움과 그 속에서 조금씩 변화해나가는 모습을 그려낸다.
▲ 더 셰프존 웰스 감독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유명배우들을 잘 캐스팅한다는 것이다. 전작 <어거스트 : 가족의 초상>에서 메릴 스트립, 줄리아 로버츠, 베네딕트 검버배치 등을 출연시킨 그는 이번엔 엠마 톰슨과 우마 서먼을 무려 극의 흐름과 따로 노는 조연으로 활용했다. 엄청난 낭비다. ⓒ (주)이수C&E
문제는 관계를 통해 변화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영화의 핵심임에도 그 관계가 살아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물과 인물의 관계를 보여주는 드라마가 매우 약하며 껍데기뿐인 에피소드의 나열과 배우들의 연기만으로 부족한 부분을 메우려는 미봉책이 곳곳에서 엿보인다. 나는 지난해 봄 개봉한 존 웰스 감독의 전작 <어거스트 : 가족의 초상>을 '겉멋만 잔뜩 든 막장영화'로 평가한 적이 있다. 그런데 해가 바뀌고 새로운 영화를 들고 찾아온 감독의 수준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듯 보인다. 아니, 더 나빠졌다.
전작은 메릴 스트립과 줄리아 로버츠의 열연으로 아침 드라마보다 못한 막장적 구성이 어느 정도 상쇄됐다. 그러나 <더 셰프>는 브래들리 쿠퍼, 시에나 밀러, 다니엘 브륄, 오마 사이, 엠마 톰슨, 우마 서먼 등 유명배우가 여럿 출연함에도 캐릭터 간의 드라마가 조금도 살아나지 못하고 있다. 관계를 주제로 한 영화에서 관계가 살아나지 못했다는 것, 그건 이 영화를 볼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소리 지르고 접시만 깨부수는 게 셰프?
살지 않는 건 드라마만이 아니다. 요리도 껍데기뿐이다. 상반기 <아메리칸 셰프>, 중반기 <심야식당>이 있었다면 하반기를 대표하는 요리영화가 바로 <더 셰프>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배경만 주방일 뿐 제대로 된 요리 하나 맛깔나게 등장하지 않는다. 음식을 보러 극장을 찾은 관객을 당혹감에 빠뜨린다.
앞선 두 영화의 경우 영화를 보는 내내 입맛을 다셨다며 찬사가 쏟아졌지만, <더 셰프>와 관련해선 이런 평을 들어본 적이 없다. 이유는 명확하다. 요리가 조연 중의 조연이기 때문이다.
감독은 요리를 전면에 내세워 식감을 자극하는 대신 꾸미고 늘어놓고 대화로 처리한다. 대신 단순히 먹어대는 장면만 주구장창 삽입하는 선택을 통해 관객이 요리를 어떤 물건처럼 여기게 만든다. 스크린에서 요리되는 것들이 내가 먹을 수 있는, 혹은 먹고 싶은 것으로 다가오지 않기에 관객들이 입맛을 다시지 않는 것이다.
<아메리칸 셰프>가 샌드위치 하나를 만드는 장면에 온전히 몇 분을 할애하고, 음량을 조절하며 관객의 감각을 장악해나갔던 데 반해 <더 셰프>가 음식을 노출하는 방식은 소재를 보여준다는 의무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 더 셰프요리보다 더 많이 등장하는 플레이팅 장면. 대체 요리를 먹으라고 만드는 건지 보라고 만드는 건지 구분이 안 갈 정도. ⓒ (주)이수C&E
시종일관 접시를 깨고 물건을 부수고 호통치는 주방장의 모습을 감내해야 할 이유는 영화 속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극 중 인물들은 억지로 만나 마법처럼 관계가 생겨났고, 이야기 내내 이어진 갈등은 어처구니없는 우연으로 봉합된다.
요리영화를 표방한 작품에서 맛깔나게 그려지는 음식 하나 나오지 않는다. 과정에서의 즐거움을 찾기도 어렵다. 브래들리 쿠퍼와 시에나 밀러의 고군분투는 배의 침몰을 막기엔 역부족이다.
지난 10일까지 15만이 넘는 관객을 모으며, 박스오피스 3위에 이름을 당당히 올리고 있는 <더 셰프>가 실은 이토록 초라한 작품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사람이 나 뿐은 아닐 것이다.
○ 편집ㅣ곽우신 기자 |
덧붙이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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