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엑소시즘 가능성, 창작 무대에 변경은 없다
[김성호의 씨네만세 93] '우리 밀로 만든 이탈리아 피자' <검은 사제들>
▲ 영화 <검은 사제들>의 포스터엑소시즘의 불모지에서 만든 엑소시즘 영화. <검은 사제들>은 김윤석의 표현처럼 '우리 밀로 만든 이탈리아 피자' 같은 영화이다. 이런 영화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박수 받아 마땅하다. ⓒ CJ 엔터테인먼트
"예수님께서 건너편 가다라인들의 지방에 이르셨을 때, 마귀 들린 사람 둘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너무나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다닐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하고 외쳤다.
마침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 놓아 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마귀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쫓아내시려거든 저 돼지 떼 속으로나 들여보내 주십시오'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가라'하고 말씀하시자, 마귀들이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돼지 떼가 모두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물속에 빠져 죽고 말았다." - <마태오 복음> 8장 28~32절 중에서
이 영화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누구도 한국에서 엑소시즘을 소재로 한 영화가 제작되리라고 믿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판이 제아무리 창조적인 세계라지만, 십 수세기 뿌리 깊은 유교문화권 한국에서 엑소시즘 영화라니…. 대체 어느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말이다.
고백하자면 나도 그중의 하나였다. 서양인이 허공을 날며 장풍을 쏘고 검을 휘두르는 무협영화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지 않듯 동양인이 가톨릭 사제복을 입고 구마를 행하는 엑소시즘 영화는 만들어질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사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냥 그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동안 한국에서 엑소시즘 영화가 나오지 않은 건 바로 이와 같은 생각들 때문이다. 누가 먼저 엑소시즘에 국적을 붙인 것도 아닌데 우리가 먼저 우리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상상력이 강조되는 창작의 무대에서 다루지 못할 이야기란 없는 것인데도, 누구도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고정관념이란 이토록 무섭다. 상상력을 갉아먹고 마침내는 금기로 자리 잡아 어떠한 상상도 자라나지 못하게 만든다.
창작의 무대에 변경은 없다
▲ <검은 사제들> 속 팬서비스영화 속 팬서비스. 이 장면을 기억하는가? 강동원의 필모그래피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영화가 하나 있다. ⓒ CJ 엔터테인먼트
그런 의미에서 <검은 사제들>을 만든 장재현 감독은 한국영화계의 소중한 발견이다. 김윤석과 강동원에게 사제복을 입히고 기도문을 외우게 하며 성가를 부르고 악귀와 맞서 싸우도록 하는, 이전까지 누구도 해본 적 없을 상상을 영화로 구현했기 때문이다. 앞서 주연배우 김윤석은 이 영화를 '순수 우리 밀로 만든 이탈리아 피자'라는 비유를 들어 소개한 바 있다. 이는 매우 적절한 표현이다. 편견과 고정관념에 맞서 창작의 무대에 변경이 없다는 사실을 입증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장재현 감독은 박수받아 마땅하다.
<검은 사제들>은, <엑소시스트>와 같이 구마행위 그 자체에만 충실한 주류 장르영화와 궤를 달리한다. 구마만큼이나 캐릭터에 집중하는 신세대 엑소시즘 영화에 가깝다. <엑소시스트>는 아이의 몸속에서 악령을 쫓아내기 위한 신부의 구마행위, 즉 악령과 신부의 대결과정에서 장르적 재미를 끌어내는데 주력한다. 반면 <검은 사제들>은 구마행위와 부제의 성장기를 병렬로 배치해 드라마를 강화하는 선택을 했다.
<엑소시스트>가 엑소시즘 영화의 교범으로 자리 잡은 이후 구마행위자가 겪는 내적 고뇌를 양념 정도로 활용하는 영화가 주류였다는 점을 떠올려 보자. 내면의 갈등을 극복하고 진정한 구마사로 거듭나는 최 부제의 이야기가 강조되는 <검은 사제들>이 더욱 돋보이는 이유이다. 물론 그와 같은 영화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엑소시즘 영화의 불모지인 한국에서 전형적이지 않은 엑소시즘 영화를 만들어냈다는 것만으로도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
김윤석이란 검증된 배우, 스타에서 배우로 성장해가는 강동원, 주목받는 신예 박소담까지 출연하는 어느 배우 한 명 빠지지 않는 연기를 펼쳤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상영시간 대부분을 이 세 명의 배우가 책임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단순한 구성이지만 이들의 연기만으로도 두 시간이 가득 찬 것처럼 느껴질 만큼 배우들의 풍성한 연기가 돋보였다.
희생과 변화에 대한 이야기, <검은 사제들>
▲ 최 부제신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최 부제(강동원 분)를 단적으로 표현한 장면. 그러나 그는 단 몇 시간만에 심대한 내적 변화를 겪는다. ⓒ CJ 엔터테인먼트
<검은 사제들>은 희생에 대한 이야기다. 내면에 상처를 가진 평범한 젊은이가 세상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성직자로 성장해가는 이야기다. 평범한 신학생 최 부제(강동원 분)가 김 신부(김윤석 분)의 보조사제로 구마행위에 나서며 겪는 변화가 구마행위가 주는 장르적 재미와 함께 영화의 주요한 두 축이다.
영화는 김 신부가 새로운 보조사제를 구해 구마행위에 나서는 며칠 동안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나마도 러닝타임 대부분은 구마행위로 채워진다. 구마행위가 시작되고 끝나기까지 단 몇 시간 동안 최 부제가 겪는 변화가 사실상 영화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시간 동안, 최 부제는 맞지 않는 신학교 생활을 억지로 해나가던 젊은이에서 성 프란체스코의 모습이 엿보이는 성직자로 거듭나게 된다.
변화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는다. 물이 단 3분 만에 팔팔 끓어오르듯 사람 역시 단 몇 시간 만에 중대한 내적 변화를 이룰 수 있음을 영화는 자연스럽게 그려낸다. 중요한 건 '물을 끓일 만큼 뜨거운 불이 지펴질 수 있느냐'이고 김 신부와 함께한 몇 시간의 충격적 경험은 최 부제에게 충분히 뜨거운 불길이 되어주었다.
"신발을 찾으러 왔습니다"
▲ 아가토와 베드로신발을 찾으러 온 아가토(강동원 분)와 그를 맞이하는 베드로(김윤석 분). 신발은 영화 속에서 중요한 상징이다. ⓒ CJ 엔터테인먼트
영화에서 변화를 나타내는 매개는 신발이다. 최 부제는 어린 시절 개의 공격에 동생을 잃은 상처를 간직한 인물이다. 그는 구해달라며 붙잡는 동생을 뿌리치고 달아나다 신발 한 짝을 잃어버렸고 이후 그때의 아픔을 잊지 못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동생을 천국으로 보내겠다는 일념 아래 맞지 않는 신학교 생활을 억지로 견디던 최 부제가 악령이 깃든 소녀를 구하기 위한 구마의식에 참여하게 된 건 그래서 운명적이다.
처음 최 부제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충격적인 구마의식을 견디지 못하고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도망쳐 나온다. 오래전 개에게 물린 동생을 놔두고 도망친 것처럼. 하지만 그는 돌아온다. 세 번이나 예수를 부인하고 도망친 베드로가 예수 사후 그리스도교의 지도자로 거듭나고 마침내 로마에서 순교했듯 최 부제는 돌아와 성장하며 순교하듯 악령을 끌어안고 한강으로 몸을 던진다. 영화에서 최부제의 세례명이 구마사 '아가토'로 설정된 것만큼이나 김신부의 세례명이 '베드로'인 점도 의미심장하다 하겠다. 어쩌면 최 부제가 걷게 될 길은 이미 김신부가 걷고 있는 베드로의 길일지도 모른다.
명동 한복판을 도망쳐 달려가던 최부제를 돌려세운 건 자신의 맨발이었다. 과거 개에게서 도망치며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린 것처럼 맨발로 도망치던 제 모습을 직시한 최 부제는 결국 다시 구마행위가 벌어지는 골목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자신을 기다리는 김신부에게 신발을 찾으러 왔노라고 답한다. 그의 귀환은 악마가 깃든 소녀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며 과거 동생을 구하지 못한 자신을 이겨내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 이 영화는 악령으로부터 약자를 구하려 희생하는 성직자의 이야기인 동시에 최 부제가 신발을 되찾는 성장드라마다. 이 영화가 '사제들 비긴즈'처럼 여겨지는 건 그 때문이다.
아쉬운 점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 <검은 사제들>의 박소담메이저 자본이 들어간 영화에서 처음으로 두드러진 연기를 펼친 박소담 ⓒ CJ 엔터테인먼트
<검은 사제들>은 처음으로 등장한 한국판 엑소시즘 영화치고는 뜻밖에 안정된 작품이었다. 하지만 부족한 점도 없지 않았다. 무엇보다 드라마와 구마행위를 병렬적으로 가져가며 시간상 둘 모두를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 부분이 아쉬웠다. 특히 영화는 두 차례에 걸쳐 김 신부에게 드라마적 연기를 할 공간을 허용하는데, 드라마적 캐릭터인 최 부제와 달리 장르적 캐릭터인 김 신부의 오열은 영화 전반의 분위기와 따로 논다는 인상이 들기도 한다.
문제가 된 두 장면은 김 신부가 바티칸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는 장면과 소녀를 구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오열하는 장면이다. 이 두 장면에서 김 신부는 예외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격하게 표출하는데 이전까지 특별한 드라마 없이 절제된 캐릭터로 표현된 그였기에 관객이 낯설게 느낄 수도 있을 법하다. 영화는 김윤석과 박소담이 연기한 김 신부와 영신의 캐릭터를 장르적으로 활용하고, 강동원이 연기한 최 부제만을 입체적인 인물로 다룬다. 그런데 갑자기 김 신부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 두 장면이 일시적으로 어색한 인상을 준다.
<검은 사제들>은 구마행위 뿐 아니라 진정한 성직자로 거듭나는 최 부제의 성장드라마를 병렬로 배치했다는 점에서, 신세대 엑소시즘 영화라고 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최 부제를 연기한 배우가 무려 강동원이었다는 점에서 일종의 컬트적 팬덤을 형성할 수 있는 저력이 엿보였다. 이미 온라인상에서는 '그의 품에 안긴 돼지가 부러웠다'거나 '성가를 부르고 라틴어 대사를 읊는 최 부제에게 반해 성당에 나가겠다'는 등의 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어찌 보면 반쪽짜리 드라마에 불과할 수 있는 작품을 멋들어진 작품으로 만들어낸 데는 강동원의 공이 적지 않은 듯하다.
장르영화로서도 단순히 구마행위 그 자체에 매몰되지 않고 일종의 반전이라 할 만한 추격극을 후반부에 배치해 긴장감을 높인 선택이 주효했다. 정적인 데다 취향을 타는 엑소시즘 영화의 단점을 드라마뿐 아니라 기존 장르영화의 장점과 적절히 배합한 점은 영화의 성공에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한국에서 나올 엑소시즘 영화는 <검은 사제들>과의 비교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시간의 심판을 이겨내고 제법 오랫동안 살아남을 몇 안 되는 작품 가운데 한 편이라는 뜻이다.
○ 편집ㅣ곽우신 기자 |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