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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수군 함대 12척 손에 넣다

이순신, 장흥 회령진에서 배설로부터 함대 인수 받아

등록|2015.11.17 12:00 수정|2015.11.17 12:00

▲ 장흥 회진항 풍경. 정유재란 때 조선수군을 재건하면서 명량으로 가던 이순신이 배설로부터 12척의 조선 함대를 인수받은 곳이다. 당시 지명은 회령진이었다. ⓒ 이돈삼


1597년 8월 18일(양력 9월 28일), 이순신은 김명립과 마하수가 구해 온 향선 10척에 전라도 내륙에서 확보한 병참물자를 싣고 보성 군영구미를 출발했다. 목적지는 회령진(전남 장흥군 회진면 회진리)이었다(관련기사 : 조선수군 함대 12척을 찾아서).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된 뒤 처음 바다로 나가는 출항이었다. 바다로 나간 것은 그동안 내륙에서의 병참활동이 끝났음을 의미한다. 이순신이 회령진으로 간 것은 경상우수사 배설과 함께 머물고 있는 조선수군의 함대를 찾아서였다.

회령진은 조선 초기 광산 김씨 김민경이 처음 들어왔다고 전해진다. 마을은 전라우수영에 소속된 수군만호가 주둔하면서 형성됐다. 1895년 성의 이름을 따서 '회진'이 됐다. 여기에 진이 설치된 것은 조선 초기였다. 전쟁 때에는 수군의 집결 장소로, 평상시엔 식량과 군기를 쌓아두는 보급기지 역할을 했다.

▲ 복원된 회령진성. 회진 마을의 뒷산을 이용해서 쌓은 성이다. 1490년에 쌓기 시작해 1554년에 완공한 만호진 성이었다. ⓒ 이돈삼


▲ 복원된 회령진성과 주변 풍경. 성곽을 중심으로 회령진 역사공원이 조성돼 있다. ⓒ 이돈삼


회령진성은 이 마을의 뒷산을 이용해서 쌓았다. 1490년(성종 21년)에 쌓기 시작해 1554년(명종 9년)에 완공한 만호진 성이다. 둘레가 6000m로 큰 성이었다. 석축의 너비는 2∼4m에 이른다. 흙과 돌을 섞어 쌓았다. 동쪽의 벽은 벼랑 위에 쌓았다. 남해에 출몰하는 일본군을 소탕하는 수군진이었다.

진성에는 중선(군함) 4척, 별선(수색함) 4척, 그리고 수륙군 472명, 함선 수리공 4명이 상주했다. 성 안에는 아사청, 객사, 관청, 사령청이 있었다. 덕도와 노력도, 대마도, 대구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진성을 감싸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성벽의 길이는 616m에 이른다. 군데군데 성벽과 석축이 남아 있다. 성문 터도 일부 남아있다. 250여 년 전 마을주민들이 이순신을 기리기 위해 심었다는 팽나무도 성내에 있다. 마을이 당시 성을 중심으로 형성돼 있다. 골목마다 돌담이 많다. 마을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도 아름답다. 노력도가 저만치 보인다.

▲ 회령진 역사공원에 세워진 이순신 어록 표지판. '필사즉생 필생즉사'가 새겨져 있다. ⓒ 이돈삼


▲ 회령진에 모인 조선수군들. 임금에 충성을 맹세하는 숙배 행사를 하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 전남도


이순신이 도착한 회령진에는 진성에 주둔하고 있던 장수들이 마중을 나와서 반겼다. 조선함대도 유진하고 있었다. 경상우수사 배설은 보이지 않았다. 배멀미를 심하게 해서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이순신은 회령포구에서 전선과 기물을 점검했다. 배설의 휘하에 있던 조선수군의 잔류 함대도 회수했다.

다음날 아침, 이순신은 회령포구에 모든 군사들을 모이게 하고 숙배(肅拜) 행사를 열었다. 숙배는 임금에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며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는 군례다. 일종의 충성 서약식이다.

이순신은 장수와 장병들에게 선조 임금이 내린 교서와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임명 교지를 공개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교서에 큰절을 하며 충성을 다짐했다. 이순신은 이어 임금이 내린 교서를 들어 보이며 군사들에게 외쳤다.

"우리는 지금 임금님의 명령을 다 같이 받들었다. 한 번의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하는 것이 무엇이 그리 아깝겠는가. 의리상 같이 죽는 것이 마땅하다. 오직 우리에게는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이순신의 말이 끝나자 군사들이 연호했다. 군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다. 숙배를 마친 이순신은 곧바로 회수한 조선함대 12척을 판옥선으로 개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 회진마을 풍경. 당시 성을 중심으로 형성돼 있다. 골목마다 돌담도 많다. ⓒ 이돈삼


▲ 회령진성에서 내려다 본 회진마을과 포구. 제주를 오가는 배를 타는 노력항이 저만치 보인다. ⓒ 이돈삼


당시 일본군은 전투에서 조선함대에 가까이 접근해 판옥선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백병전을 벌이기 일쑤였다. 일본군은 백병전에 능했다. 일본군의 장점을 무력화시키고 조선수군의 전투력을 높이기 위해선 전선의 수리가 필요했다. 이순신은 김억추를 전함수리 책임자로 지정하고, 함선을 거북 모형의 구선(龜船)으로 바꾸도록 했다.

김억추는 곧바로 전함 수리작업에 들어갔다. 관하 군관 권준, 임준영, 송희립, 배문길, 조기 등이 김억추와 함께 참여했다. 이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함 개조에 매달렸다. 전함 개조는 판옥선을 몸통이 둥근 나무통 모양의 목앵(木罌)으로 만들어 거북배로 꾸미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폭이 좁은 수로에서 전투를 해도 떠내려가지 않을 물통 모양이었다. 적의 화기로부터 전투원을 보호하는 데도 유리한 구조였다.

거북배로 개량된 판옥선은 선체가 높고 견고했다. 일본군이 근접해서 배의 난간에 올라와 백병전을 시도할 수 없는 구조였다. 해전에서 아군의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는, 요새화된 판옥선이었다. 이렇게 요새화된 판옥선이 모두 13척이었다. 배설에게서 회수한 8척의 판옥선과 전라도 본영에서 모집한 4척의 군함에다 발포만호 송여종이 갖고 온 판옥선까지 더해졌다.

판옥선의 개조로 이순신의 수군재건 전략이 일단락됐다. 전라도 내륙의 구례와 곡성에서 군사를 충원하고, 순천을 거치면서 군기와 막강한 화약무기를 확보했다. 연해안 지방인 보성에선 군량을 확보하고, 장흥에서 군선까지 회수했다.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돼 조선수군 재건에 나선 지 17일 만이었다.

▲ 회령진 역사공원의 기념 조형물. 이순신의 조선수군 재건을 도운 전라도 백성들을 표현하고 있다. ⓒ 이돈삼


▲ 복원된 회령진성에서 내려다 본 회령진 역사공원 기념 조형물. 그 너머로 수확기를 보낸 들녘이 펼쳐져 있다. ⓒ 이돈삼


이렇게 이순신이 짧은 기간에 조선수군을 재건할 수 있었던 것은 전라도 백성들의 도움 덕분이었다. 그동안 전장에 함께 참여했던 군관 배흥립, 송희립, 최대성, 정사립, 김북만, 이기남 등이 동참했다.

연해안에서 연해민 마하수, 김명립과 궁장 지이, 퇴귀생, 선의, 대남 등도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강진의 황대중은 배 10척에 곡식 100석을 싣고 왔다. 장흥의 마하수는 향선을 동원해 해상 이동을 도왔다. 일반 백성들도 가족을 뒤로 하고 의병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병참활동을 마무리한 이순신은 8월 20일 다시 바다로 나아간다. 건곤일척의 싸움이 기다리고 있는 울돌목, 명량으로 향한다.

▲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의 조선수군 재건길. 보성 군영구미를 출발한 이순신이 회령진으로 오는 과정을 토대로 만든 여행길이다. ⓒ 이돈삼


덧붙이는 글 남도 이순신길 조선수군재건로 고증 및 기초조사(전라남도), 이순신의 수군재건 활동과 명량대첩(노기욱, 역사문화원), 명량 이순신(노기욱,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등을 참고했습니다. 지난 11월 1일 다녀왔습니다.

이 기사는 전남새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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