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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내 또래 보면 답답... 그래도 쫄지 말자!" 그는 여전히 '열정 같은 소리'를 하고 있었다

[인터뷰] 연기의 보폭 점점 넓혀가고 있는 '애드리브'의 화신, 정재영... "난 철없는 배우"

등록|2015.11.18 13:30 수정|2015.11.18 13:56

▲ 영화 <열정 같은 소리하고 있네>에서 하재관 역을 두고 정재영은 "나쁜 기성 세대인 건 맞다"면서도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어딘가에 꼭 있을 거 같은 사람"이라 소개했다. ⓒ 이정민


한때 정재영은 한국영화계에서 거친 남성성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양아치 역할을 도맡아 했다. 데뷔 초만 하더라도 조연으로 불량배, 제비, 택시 강도 등을 연기하며 이야기의 한 구석을 채워온 그다. 물론 그의 골수팬이라면 <실미도>(2003)에서의 속정 깊은 군인 한상필이나 멜로영화 <아는 여자>(2004)에서 여심을 울렸던 동치성, 혹은 <이끼>(2010)의 광기 어린 마을 이장이 있지 않으냐며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다.

둘 다 맞다. 그때도 정재영이었고, 지금도 정재영이다. 달라진 게 있다면 데뷔 19년 차를 맞이한 그가 어느새 보폭을 넓혀 관객에게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 기존의 강한 캐릭터성을 그대로 가져가면서 동시에 한층 편안한 생활연기까지 소화한다. 그의 드라마 데뷔작 KBS2TV <어셈블리>가 전자고, 최근 개봉한 홍상수 감독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와 곧 개봉할 <열정 같은 소리하고 있네>가 후자다.

묵직하게 자신만의 영역을 확장 중인 배우 정재영을 지난 17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보영이는 날 기성세대로 보겠지, 휴...."

▲ 영화 <열정 같은 소리 하고 있네>의 스틸컷. 정재영은 스포츠지의 데스크 하재관으로 분하여 수습기자 도라희(박보영)를 열심히 '갈군다'. 자신은 기성세대가 아니라고 인터뷰 중에 주장했지만, "그래도 보영이는 나를 기성세대로 보겠지"하며 한숨을 쉬었다. ⓒ NEW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열정 같은 소리하고 있네>에서 그는 한 스포츠지 연예부 부장인 하재관 역을 맡았다. 수습기자 도라희(박보영 분)는 물론이고 부원들을 달달 볶으며 특종만을 외치는 인물. 진실 보도는 저 멀리 던져버리고 오로지 대중 관심사에 목을 맨다. 힘들어하는 부하들에게 열정이 없다며 결과를 위한 온갖 수단을 강요한다.

그 모습을 떠올리며, 지난 16일 영화평론가협회 시상식에서 남자연기상(홍상수 감독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을 받은 그에게 "축하한다" 말을 건넸다. "받은 건 받은 거고, 일단 영화가 잘 돼야 한다"며 웃어 보이는 정재영은 영락없는 하재관이었다.

"연예부 기자 생리를 잘 모르지만 일단 시나리오 자체가 리얼했다. 굳이 기자가 아니더라도 사회생활 하다 보면 하재관 같은 사람도 있고, 도라희 같은 이도 있다. 그걸 더 이해 가도록 하는 게 내 몫이었지. 조직생활 경험이 없다고 볼 수도 있지만 크게 보면 작품마다 다른 조직과 일하는 것이니 배우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사실 촬영 전에 모 신문사에 며칠 있어 보려고도 했으나 여건상 불발된 게 좀 아쉽긴 하다.

하재관은 기성세대 전체는 아니고 나쁜 기성세대를 대변하는 인물이긴 하다. 근데 또 사람이 절대 악은 없잖나. 진짜 나쁜 놈이었으면 한 회사에서 부장 자리까지 못 가겠지. 다만 밑에 있는 사람이 봤을 때 악마처럼 보일 수는 있다(웃음). 그렇다고 하재관이 원래는 착한 사람이었는데 살다 보니 변했다고 보는 것도 이상하다. 그는 원래 그런 성격인 거다. 그 나름의 애환과 고민을 담으려 했다."

영화엔 세대론과 한국의 어두운 단면이 어느 정도 담겨 있다. 취업난에 일단 무조건 취직하고 보자는 도라희가 있고, 그 심리를 이용해 싼값에 인력을 후려치는 스포츠 신문사가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하재관이 자리 잡고 있으니 말이다.

정재영도 이 분석에 동의했다. 다만 "난 기성이 아닌 신세대다"라고 뜬금없이 '차별화'를 선언했다. "그리 말하는 게 오히려 더 기성세대 같아 보인다"는 기자의 말에 발끈하는 척하며 그가 말을 이었다.

"나도 40대 중반(만 45세)이지만 내 또래를 만날 때마다 답답하다. 뭐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생각이 꽉 막힌 사람이 많더라. 내가 생각하는 기성세대는 우리 아버지 세대인데 말이지. 근데 내가 아무리 이렇게 설명해도 보영이는 날 기성세대로 보겠지. 휴."

열정의 정재영

▲ 기성세대와 신세대를 구분짓는 큰 차이점으로 정재영은 언어를 꼽았다. 젊은 친구들이 쓰는 용어를 잘 못알아듣겠다면서도 그는 끈임없이 자신은 신세대임을 강조했다. '철들지 말자'. 배우로서 그가 지키고 있는 하나의 덕목이었다. ⓒ 이정민


'열정이 있으니 다 되잖나'라며 윽박지르는 하재관을 떠올리며, 정재영의 신인 시절을 소환했다. 20여 년 전, 연극 무대와 영화 촬영장을 전전하던 신인배우 정재영은 단역임에도 현장에서 애드리브(대본에 없는 즉흥연기)를 치다가 동료들을 당황하게 하던 이였다. 양아치 역을 실감 나게 하려고 사전에 이야기 되지 않은 채 주연 여배우 몸을 만지려 들다가 한소리 들을 정도였다. "진짜 무식하게 충실했지"라며 그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런 날 안성기 선배 같은 좋은 분들이 따뜻하게 격의 없이, 하재관과는 정반대로 감싸주셨다"고 전했다.

"그 덕에 지금도 연기하지. 그러고 보니 지금 내가 딱 그때 안성기 선배 나이인데 왜 이렇게 난 철이 없지? (웃음) 솔직히 일부러 철이 없으려고 하는 거다. 너무 철들면 사람이 관조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다 이해해버리면 열정이 떨어진다고 해야 하나. 자유로울 줄 알아야 한다. 뭔가 하나를 철저하게 믿거나 그러면 안 될 거 같다. 의심할 줄 알아야 해. 특히 배우는 더!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사람이 너무 쫄면 안 된다. 하재관이 도라희에게 '시키는 거나 해!' 이러다가 나중엔 '시키는 것만 하냐?'고 타박하잖나. 사람이란 게 다 자기중심적으로 말하다 보니 모든 걸 곧이곧대로 들을 필요가 없다. 너무 말에 집중하다 보면 오해가 생기곤 한다. 그래서 말 한마디에 쫄지 말라고 하는 거다. 보영이에게도 뒤풀이 때 딱 그 말 한마디만 했다. 쫄지 말고 편하게 하자고. 나도 보영이 때 두려웠고, 지금도 항상 두렵다. 연극의 첫 공연, 영화의 첫 촬영 때 그렇게 떨리더라. 쫄지 말자는 생각을 평소에도 한다."

영화를 보고 관객들이 조직생활의 쓴맛만 느낀다면 정재영 입장에선 매우 아쉬울 법했다. 그는 "영화가 그린 현실이 웃기면서도 씁쓸해 보이지만, 그래도 이걸 보면서 상사든 부하든 각자 노력해보자는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그러면서도 "(소통을 위해) 도라희가 총대를 메니 그제야 다들 도와준다, 한국 사회의 현실을 나름 보여주는 것 같다"고 웃어 보였다.

"드라마 <어셈블리> 하면서 내심 미안했다"

▲ 최근 KBS 드라마 <어셈블리>를 경험한 그는 "영화 촬영 현장의 장점과 드라마 촬영 현장의 장점을 잘 섞으면 합리적인 촬영 환경이 될 거 같다"고 제언했다. 주어진 예산 안에서 최대한 작품성도 살릴 수 있는 방안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 이정민


한국 사회 이야기에 드라마 <어셈블리> 얘길 빼놓을 수 없었다. 현대 정치를 끌어들인 드라마에서 정재영은 노동자 출신이자 여당 속 야당을 자임한 국회의원 진상필 역을 맡았다. 민생과 본분은 잊은 채 각종 이해관계로 싸우는 기성 국회의원들을, 진상필은 이리저리 찌르고 뒤집었다. 그는 분명 시청자들에게 큰 쾌감을 줬다.

"드라마 출연이 큰 결단은 아니었고 좋은 게 있으면 한다는 주의였다. <열정 같은 소리하고 있네> 촬영이 끝나자마자 급하게 들어가게 됐다. 좀 쉬고 싶었는데 정기훈 감독님(<열정 같은...>의 연출자)을 통해 대본이 들어왔다. 알고 보니 <정도전>을 쓴 정현민 작가님의 것이더라. <어셈블리>는 시청률을 떠나서 정말 좋은 작품이었다. 다만 내 체력이 좀 문제더라. 다음에 드라마를 하게 되면 제대로 준비를 해봐야겠다. 그래도 드라마 촬영 땐 술을 거의 못 마시니까 몸은 건강해지더라(웃음).

정치는 사실 이전까진 별 관심이 없었다. 평소에 백지처럼 살기도 하고 워낙 성격이 게으르다. 연극도 장기 공연은 못 한다. 금방 지겨워져서. 책도 장편 소설을 못 읽는다! 만화는 장편도 좋아하긴 하는데(웃음).

한국의 정치 현실은 답답하지. 다만 진상필 역할 자체는 자기 내키는 대로 하는 인물이라 시원했다. 동시에 내심 미안하기도 했다. 내가 이 역할을 할만한 사람은 아니니까. 평소엔 용기도 없고, 어쩌면 보통 사람보다도 못할 수 있으니 미안했지. 그 부분에 대해서 반성 좀 했다. 진상필까진 아니더라도 그 인물만큼 생각하며 살자고 결심했다."

올해 중반 들어 정재영은 생활 패턴을 간소화했다. 매니저도 없이 혼자 운전하며 모든 일정을 소화한다. 라디오 방송을 즐겨 들으며 조금 더 느리게, 여유롭게 사는 모습에서 그의 진솔함을 엿볼 수 있었다.

"내가 의도한 흐름은 없다. 하나씩 하다가 문득 돌아보니 작품이 쌓였고, 그러다 보니 (연기의) 폭도 넓어진 게 아닐까. 호평을 듣든 악평을 듣든 내가 거친 작품 하나하나가 다 친구 같고 자식 같고 분신 같다. 여러 작품을 할 수 있다는 게 참 감사하고 뿌듯하기도 하다. 여전히 드라마든 영화든 가리지 않는다. 특히 이번 드라마에서 애드리브도 쳤는데 되더라! 물론 다들 당황해하고 의아해하긴 했지만(웃음). 열정만 있으면 안 될 게 뭐 있어! 된다!"

그는 여전히 '열정 같은 소리'를 하고 있었다. 아니, 열정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 시종일관 유쾌하게 인터뷰에 응한 그를 두고 주위에선 "평소 성격 그대로 일에 임하는 사람"이라고들 평가한다. 그의 일관성은 곧 사람에 대한 그의 진솔한 태도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 이정민



○ 편집ㅣ곽우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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