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에 단돈 만원, 이 정도면 남는 장사
[10만인클럽 '만인보' 캠페인⑦] 김용국 시민기자가 호소합니다
법은 더디다. 세상보다 느리게 바뀌고, 시대의 변화에 앞서기는커녕 저만치 뒤처지지 않으면 다행이다.
봉건적 가족제도의 상징인 호주제도는 2005년 민법개정이 되고 나서야 폐지되었고, 수십년 동안 성적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는 비난에 직면했던 혼인빙자간음죄나 간통죄도 최근에야 형법에서 사라졌다.
법은 더디지만 대신 효과는 강력하다. 예컨대 오랜 기간 동안 폭도들의 반란 정도로 매도당했던 5·18이 '민주화 운동'으로 공식 평가받게 된 것도, 4·3 희생자들이 부족하나마 명예를 회복하게 된 것도 뒤늦게 특별법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현행법에 따르면 이승만 시대 부정선거에 맞선 3·15의거, 4·19혁명, 6·3한일회담 반대운동, 3선개헌 반대운동, 유신헌법 반대운동, 부마항쟁, 광주민주화운동, 6·10항쟁이 모두 민주화 운동이다. 이건 역사적 평가일 뿐 아니라 법적 판단이다.
반면, 박정희의 5·16과 전두환의 12·12는 '군사쿠데타'로 법적인 단죄가 내려졌다. 더 나아가 유신시대 긴급조치가 위헌·무효라는 대법원(2010년 전원합의체 판결 이후)과 헌법재판소(2013년)의 판단으로 피해자들이 법적인 구제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헌법조차 무시되기 일쑤
이제 민주주의는 한 발 더 성큼 나아간 걸까. 불행하게도 '그렇다'는 대답을 내리는 데 주저하게 된다. 요사이 어렵사리 법이 인정했던 부분까지 거꾸로 돌리려는 움직임이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법 중의 법이라는 헌법조차 무시되기 일쑤다.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는 헌법 전문(前文)과 달리, 최근엔 1948년 대한민국이 탄생했다고 보는 견해가 대세(?)처럼 되어가고 있다.
1948년 건국을 인정하면 그 이전 일제에 항거한 활동은 '국가'와 관련이 없게 된다. '건국세력'이 친일의 불명예를 지우고 정통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볼 수밖에 없다. 그뿐인가. 요즘엔 공인들의 친일문제를 제기만 해도 되레 '종북좌파'로 몰리기 십상이다.
국정교과서 문제는 어떤가. 헌재는 20여 년 전에 이미 헌법소원 결정문(89헌마88)을 통해 정부의 국정교과서 발행권에 우려를 표명했다. 즉 ▲ 학생들의 창의력 저해 둔화 우려 ▲ 상황변화에 능동적·탄력적 대처 곤란 ▲ 정부의 일방 결정으로 획일화 강제는 자유민주주의 기본이념과 모순 ▲ 교사·학생의 교재선택권 침해 ▲ 교과서 중심의 주입식 암기식 교육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헌재가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의 보장이라는 헌법의 이념"을 강조했지만 대통령과 정부는 '혼을 정상화'하는 '올바른 역사교과서'를 만들겠다며 국정화를 밀어붙이고 있다.
헌법이 보장하는 집회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는 또 어떤가. 깊게 생각할 것도 없다. 최근 광화문 집회에서 경찰의 차벽설치는 집회의 자유를 가늠하는 잣대다. 2011년 헌재는 "불법 폭력 집회나 시위가 개최될 가능성이 있더라도 이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는 개별적,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필요최소한의 범위에서 행해져야 한다"며 경찰의 서울광장 차벽설치에 대해 위헌결정을 내린 바 있다. "일체의 집회를 금지하고 일반시민의 통행조차 금지하는 전면적이고 광범위하며 극단적인 조치"라는 평가다.
하지만 집회 현장의 차벽은 갈수록 견고하고, 또 진화하고 있다. 헌재의 결정이 있은 뒤로도 경찰은 "차벽 설치 자체가 위헌은 아니다"라는 논리로 간단히 집회의 자유를 외면한다. 더구나 최근엔 강력한 물대포와 식용유까지 진압장비로 등장했다. 집회의 자유가 갖는 헌법적 의미를 갖는다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2003년 헌재의 결정문 중 일부다.
"집회의 자유는 사회·정치 현상에 대한 불만과 비판을 공개적으로 표출케 함으로써 정치적 불만이 있는 자를 사회에 통합하고 정치적 안정에 이바지하는 기능을 한다. 특히 집회의 자유는 집권세력에 대한 정치적 반대의사를 공동으로 표명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서, … 소수의견을 반영하는 창구로서 그 중요성을 더해가고 있다.
헌법이 집회의 자유를 보장한 것은 관용과 다양한 견해가 공존하는 다원적인 '열린 사회'에 대한 헌법적 결단인 것이다."(헌법재판소 2003. 10. 30. 선고 2000헌바67 결정)
재정난에 허덕이는 진보언론
최근 많은 이들이 정부나 대통령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래선지 누구나 인터넷에 글을 쓸 수 있는 2015년에도 대통령 비판 전단이 길거리에 뿌리거나 대통령을 풍자하는 '그래피티'가 게시되는 등 비정상적인 방식이 동원되고 있다. 표현의 자유가 제대로 보장되는 사회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그래도 이만하면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묻고 싶다. 만일 당신이 공무원 임용시험이나 대기업 입사시험 면접을 본다고 가정해보자. 면접관 앞에서 국정교과서의 문제점을 소신있게 얘기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헌법상 노동 3권을 강조하면서 노동조합에 가입하겠다는 의사를 표출할 수 있겠는가.
그뿐인가. 최소한 형식적 공정성은 담보된다고 믿었던 대통령선거에 국가정보기관이 개입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인터넷 여론 조작을 위해 국가공무원들이 동원됐는데도 몇몇이 처벌받았을 뿐 사회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흘러가고 있다.
또한 대한민국에서 단체행동권은 그림의 떡이다. 합법파업을 하는 일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 만큼 어렵다. 파업 한 번 했다가는 수억, 수십억 원 손해배상과 형사처벌을 감수해야 하는 노동자들에게 노동 3권은 사치일 뿐이다.
헌법에 보장된 집회의 자유, 표현의 자유, 노동3권 등을 마음껏 누리지 못한다면 불행한 사회임이 분명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집권 초기부터 국민들에게 '법치주의'를 강조해왔다. 하지만 법치주의는 국민들의 투철한 준법정신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국가가 자의적인 기준이 아니라 헌법과 법률에 근거하여 엄격한 기준에 따라 공권력을 행사하고, 법의 목적과 내용이 정의에 합치되도록 끊임없이 돌아보는 것이 법치주의에 더 부합된다.
상황이 이런데도 법으로 보장된 권리조차 침해되고 있는 현실에 분개하는 언론은 그리 많지 않다. 아니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이른바 '진보언론'으로 분류할 수 있는 언론사는 몇 곳 되지도 않는다. 그나마도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겠다.
어느 진보성향의 인터넷 언론사가 포털사이트에서 인기검색어 '장사'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참담했다. 그 언론사는 이른바 어뷰징 기사를 양산하고 있었다. 기자 이름 대신 온라인뉴스팀이라는 명칭으로 인기검색어가 들어가는 기사를 내용만 조금씩 바꿔가며 계속 포털에 보내고 있었다.
이 언론사의 기사들은 진보적인 논조를 유지하며 정권과 각을 세우고 있었지만, 조회수를 의식한 어뷰징 기사는 아무것도 따지지 않았다. 기사를 클릭하면 사방이 광고로 도배돼 본문을 읽기조차 힘들었다. 이 언론사를 탓할 의도는 없다. 이게 인터넷 언론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기사 잘 보고 있습니다"에 답합니다
연말이 되면 미담 기사가 넘쳐난다. 평생 행상으로 번 돈을 기부한 노인의 사연, 이름 모를 독지가가 해마다 쌀을 몰래 가져다 놓는다는 얘기는 수없이 들어보았으리라. 많은 이들이 여기에 감동해 한 푼 두 푼 쌈짓돈을 보탠다.
하지만 정작 내가 제대로 말할 자유를 위해, 내 얘기를 들어줄 언론사를 위해 후원을 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불우이웃을 돕는 따뜻한 마음은 넘치지만 제대로 된 언론을 지키는 데 지원하거나 기부하는 일은 아직 인색한 게 사실이다.
인터넷 신문은 조회수를 올려주거나 댓글을 다는 것 말고도 좀 더 적극적인 연대의 손길이 필요하다. 연대를 표시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1만 원이면 된다.
누군가 '연대는 입금'이라고 했다. <오마이뉴스>가 조회수나 광고에 연연하지 않고 좋은 기사, 속시원한 기사를 쓸 수 있도록 10만인클럽에 가입하면 그것이 지지이자 연대이고, 후원이다.
나는 <오마이뉴스>만이 연대의 대상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시민저널리즘의 상징인 <오마이뉴스>가 무너진다면 여론의 불균형은 불보듯 훤하다.
개인적으로 여러 매체에 글을 쓰지만 일반 '시민'의 자격으로 글을 쓰는 곳은 <오마이뉴스>뿐이다. 누구나 글을 올릴 수 있고, 더 나아가 여론을 주도(!)할 수 있는 유일한 매체에 누구나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연대의 손길이 1만 명이 넘어서면 나는 <오마이뉴스>에 시민기자 원고료와 취재지원을 좀 더 현실화(?)하라고 요구할 참이다. 그것이 좋은 기사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가져오리라 믿기 때문이다.
내가 10년째 <오마이뉴스>에 글을 쓰는 걸 아는 주변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소리가 있다.
"기사 잘 보고 있어요."
나는 매번 답변을 얼버무렸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답해야겠다.
"기사를 봐줘서 고맙습니다. 도움이 되셨다면 그리고 저를 응원하다면 한 달 만에 1만 원씩만 후원하세요. 저에게 밥을 사는 것보다 더 큰 이익으로 돌아옵니다."
두 시간짜리 영화 한 편 보는 비용으로 한 달을 후원할 수 있다. 언론의 자유, 내가 말할 자유를 지키는 대가로 1만 원이면 남는 장사 아닌가? 지금 바로 클릭하시라!
[10만인클럽 '만인보' ➀] "아버지는 사전적 의미로 독재자"
[10만인클럽 '만인보' ➁] 50세 가장의 비극, <오마이뉴스> 먼저 찾았습니다
[10만인클럽 '만인보' ➂] 이해 못할 대통령 지지율, 궁금하시죠?
[10만인클럽 '만인보' ➃] 지난 대선, 눈물 흘리며 곱씹었던 약속 기억합니다
[10만인클럽 '만인보' ⑤] "박정희, 공산당 들어가 혼자 살고 남 다 죽인 사람"
[10만인클럽 '만인보' ⑥] 백남기 선생 쾌유 농성장에 백만원 들고 갔습니다
봉건적 가족제도의 상징인 호주제도는 2005년 민법개정이 되고 나서야 폐지되었고, 수십년 동안 성적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는 비난에 직면했던 혼인빙자간음죄나 간통죄도 최근에야 형법에서 사라졌다.
법은 더디지만 대신 효과는 강력하다. 예컨대 오랜 기간 동안 폭도들의 반란 정도로 매도당했던 5·18이 '민주화 운동'으로 공식 평가받게 된 것도, 4·3 희생자들이 부족하나마 명예를 회복하게 된 것도 뒤늦게 특별법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현행법에 따르면 이승만 시대 부정선거에 맞선 3·15의거, 4·19혁명, 6·3한일회담 반대운동, 3선개헌 반대운동, 유신헌법 반대운동, 부마항쟁, 광주민주화운동, 6·10항쟁이 모두 민주화 운동이다. 이건 역사적 평가일 뿐 아니라 법적 판단이다.
반면, 박정희의 5·16과 전두환의 12·12는 '군사쿠데타'로 법적인 단죄가 내려졌다. 더 나아가 유신시대 긴급조치가 위헌·무효라는 대법원(2010년 전원합의체 판결 이후)과 헌법재판소(2013년)의 판단으로 피해자들이 법적인 구제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헌법조차 무시되기 일쑤
이제 민주주의는 한 발 더 성큼 나아간 걸까. 불행하게도 '그렇다'는 대답을 내리는 데 주저하게 된다. 요사이 어렵사리 법이 인정했던 부분까지 거꾸로 돌리려는 움직임이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법 중의 법이라는 헌법조차 무시되기 일쑤다.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는 헌법 전문(前文)과 달리, 최근엔 1948년 대한민국이 탄생했다고 보는 견해가 대세(?)처럼 되어가고 있다.
1948년 건국을 인정하면 그 이전 일제에 항거한 활동은 '국가'와 관련이 없게 된다. '건국세력'이 친일의 불명예를 지우고 정통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볼 수밖에 없다. 그뿐인가. 요즘엔 공인들의 친일문제를 제기만 해도 되레 '종북좌파'로 몰리기 십상이다.
▲ 역사교과서 국정화 강행 규탄 집회 '국민의 목소리 들어라'정부가 역사교과서의 국정화 확정 고시를 강행한 3일 오후 서울 중구 파이낸스센터 앞에서 열린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강행 규탄 긴급 결의대회에 참석한 학생과 시민들이 촛불을 들어보이며 정부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철회를 촉구하고 있다. ⓒ 유성호
국정교과서 문제는 어떤가. 헌재는 20여 년 전에 이미 헌법소원 결정문(89헌마88)을 통해 정부의 국정교과서 발행권에 우려를 표명했다. 즉 ▲ 학생들의 창의력 저해 둔화 우려 ▲ 상황변화에 능동적·탄력적 대처 곤란 ▲ 정부의 일방 결정으로 획일화 강제는 자유민주주의 기본이념과 모순 ▲ 교사·학생의 교재선택권 침해 ▲ 교과서 중심의 주입식 암기식 교육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헌재가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의 보장이라는 헌법의 이념"을 강조했지만 대통령과 정부는 '혼을 정상화'하는 '올바른 역사교과서'를 만들겠다며 국정화를 밀어붙이고 있다.
헌법이 보장하는 집회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는 또 어떤가. 깊게 생각할 것도 없다. 최근 광화문 집회에서 경찰의 차벽설치는 집회의 자유를 가늠하는 잣대다. 2011년 헌재는 "불법 폭력 집회나 시위가 개최될 가능성이 있더라도 이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는 개별적,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필요최소한의 범위에서 행해져야 한다"며 경찰의 서울광장 차벽설치에 대해 위헌결정을 내린 바 있다. "일체의 집회를 금지하고 일반시민의 통행조차 금지하는 전면적이고 광범위하며 극단적인 조치"라는 평가다.
하지만 집회 현장의 차벽은 갈수록 견고하고, 또 진화하고 있다. 헌재의 결정이 있은 뒤로도 경찰은 "차벽 설치 자체가 위헌은 아니다"라는 논리로 간단히 집회의 자유를 외면한다. 더구나 최근엔 강력한 물대포와 식용유까지 진압장비로 등장했다. 집회의 자유가 갖는 헌법적 의미를 갖는다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2003년 헌재의 결정문 중 일부다.
"집회의 자유는 사회·정치 현상에 대한 불만과 비판을 공개적으로 표출케 함으로써 정치적 불만이 있는 자를 사회에 통합하고 정치적 안정에 이바지하는 기능을 한다. 특히 집회의 자유는 집권세력에 대한 정치적 반대의사를 공동으로 표명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서, … 소수의견을 반영하는 창구로서 그 중요성을 더해가고 있다.
헌법이 집회의 자유를 보장한 것은 관용과 다양한 견해가 공존하는 다원적인 '열린 사회'에 대한 헌법적 결단인 것이다."(헌법재판소 2003. 10. 30. 선고 2000헌바67 결정)
재정난에 허덕이는 진보언론
최근 많은 이들이 정부나 대통령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래선지 누구나 인터넷에 글을 쓸 수 있는 2015년에도 대통령 비판 전단이 길거리에 뿌리거나 대통령을 풍자하는 '그래피티'가 게시되는 등 비정상적인 방식이 동원되고 있다. 표현의 자유가 제대로 보장되는 사회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그래도 이만하면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묻고 싶다. 만일 당신이 공무원 임용시험이나 대기업 입사시험 면접을 본다고 가정해보자. 면접관 앞에서 국정교과서의 문제점을 소신있게 얘기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헌법상 노동 3권을 강조하면서 노동조합에 가입하겠다는 의사를 표출할 수 있겠는가.
그뿐인가. 최소한 형식적 공정성은 담보된다고 믿었던 대통령선거에 국가정보기관이 개입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인터넷 여론 조작을 위해 국가공무원들이 동원됐는데도 몇몇이 처벌받았을 뿐 사회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흘러가고 있다.
또한 대한민국에서 단체행동권은 그림의 떡이다. 합법파업을 하는 일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 만큼 어렵다. 파업 한 번 했다가는 수억, 수십억 원 손해배상과 형사처벌을 감수해야 하는 노동자들에게 노동 3권은 사치일 뿐이다.
헌법에 보장된 집회의 자유, 표현의 자유, 노동3권 등을 마음껏 누리지 못한다면 불행한 사회임이 분명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집권 초기부터 국민들에게 '법치주의'를 강조해왔다. 하지만 법치주의는 국민들의 투철한 준법정신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국가가 자의적인 기준이 아니라 헌법과 법률에 근거하여 엄격한 기준에 따라 공권력을 행사하고, 법의 목적과 내용이 정의에 합치되도록 끊임없이 돌아보는 것이 법치주의에 더 부합된다.
▲ 언론노조 "취재진 과잉진압은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전국언론노동조합, 방송기자연합회, 한국사진기자협회,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 한국인터넷기자협회, 민주언론시민연합, 언론개혁시민연대, 언론소비자주권행동, 자유언론실천재단,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새언론포럼,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회원들이 18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지난 14일 민중총궐기 대회 당시 경찰의 취재방해와 과잉진압을 규탄하고 있다. ⓒ 유성호
상황이 이런데도 법으로 보장된 권리조차 침해되고 있는 현실에 분개하는 언론은 그리 많지 않다. 아니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이른바 '진보언론'으로 분류할 수 있는 언론사는 몇 곳 되지도 않는다. 그나마도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겠다.
어느 진보성향의 인터넷 언론사가 포털사이트에서 인기검색어 '장사'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참담했다. 그 언론사는 이른바 어뷰징 기사를 양산하고 있었다. 기자 이름 대신 온라인뉴스팀이라는 명칭으로 인기검색어가 들어가는 기사를 내용만 조금씩 바꿔가며 계속 포털에 보내고 있었다.
이 언론사의 기사들은 진보적인 논조를 유지하며 정권과 각을 세우고 있었지만, 조회수를 의식한 어뷰징 기사는 아무것도 따지지 않았다. 기사를 클릭하면 사방이 광고로 도배돼 본문을 읽기조차 힘들었다. 이 언론사를 탓할 의도는 없다. 이게 인터넷 언론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기사 잘 보고 있습니다"에 답합니다
연말이 되면 미담 기사가 넘쳐난다. 평생 행상으로 번 돈을 기부한 노인의 사연, 이름 모를 독지가가 해마다 쌀을 몰래 가져다 놓는다는 얘기는 수없이 들어보았으리라. 많은 이들이 여기에 감동해 한 푼 두 푼 쌈짓돈을 보탠다.
하지만 정작 내가 제대로 말할 자유를 위해, 내 얘기를 들어줄 언론사를 위해 후원을 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불우이웃을 돕는 따뜻한 마음은 넘치지만 제대로 된 언론을 지키는 데 지원하거나 기부하는 일은 아직 인색한 게 사실이다.
인터넷 신문은 조회수를 올려주거나 댓글을 다는 것 말고도 좀 더 적극적인 연대의 손길이 필요하다. 연대를 표시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1만 원이면 된다.
누군가 '연대는 입금'이라고 했다. <오마이뉴스>가 조회수나 광고에 연연하지 않고 좋은 기사, 속시원한 기사를 쓸 수 있도록 10만인클럽에 가입하면 그것이 지지이자 연대이고, 후원이다.
나는 <오마이뉴스>만이 연대의 대상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시민저널리즘의 상징인 <오마이뉴스>가 무너진다면 여론의 불균형은 불보듯 훤하다.
개인적으로 여러 매체에 글을 쓰지만 일반 '시민'의 자격으로 글을 쓰는 곳은 <오마이뉴스>뿐이다. 누구나 글을 올릴 수 있고, 더 나아가 여론을 주도(!)할 수 있는 유일한 매체에 누구나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연대의 손길이 1만 명이 넘어서면 나는 <오마이뉴스>에 시민기자 원고료와 취재지원을 좀 더 현실화(?)하라고 요구할 참이다. 그것이 좋은 기사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가져오리라 믿기 때문이다.
내가 10년째 <오마이뉴스>에 글을 쓰는 걸 아는 주변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소리가 있다.
"기사 잘 보고 있어요."
나는 매번 답변을 얼버무렸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답해야겠다.
"기사를 봐줘서 고맙습니다. 도움이 되셨다면 그리고 저를 응원하다면 한 달 만에 1만 원씩만 후원하세요. 저에게 밥을 사는 것보다 더 큰 이익으로 돌아옵니다."
두 시간짜리 영화 한 편 보는 비용으로 한 달을 후원할 수 있다. 언론의 자유, 내가 말할 자유를 지키는 대가로 1만 원이면 남는 장사 아닌가? 지금 바로 클릭하시라!
[10만인클럽 '만인보' ➀] "아버지는 사전적 의미로 독재자"
[10만인클럽 '만인보' ➁] 50세 가장의 비극, <오마이뉴스> 먼저 찾았습니다
[10만인클럽 '만인보' ➂] 이해 못할 대통령 지지율, 궁금하시죠?
[10만인클럽 '만인보' ➃] 지난 대선, 눈물 흘리며 곱씹었던 약속 기억합니다
[10만인클럽 '만인보' ⑤] "박정희, 공산당 들어가 혼자 살고 남 다 죽인 사람"
[10만인클럽 '만인보' ⑥] 백남기 선생 쾌유 농성장에 백만원 들고 갔습니다
○ 편집ㅣ홍현진 기자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