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에 대한 '묻지마 지지'가 부산 정서를 바꿨다
박정희 정권에 대항하던 YS, 그에 대한 향수가 지역감정으로 변질
▲ 1970년대 부산 서구의 한 초등학교에서 전교 조례를 하는 모습. 이 지역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은 마치 영웅처럼 여겨졌다 ⓒ 박석철
필자가 나고 자란 부산광역시 서구에서는 한동안 김영삼 전 대통령이 마치 영웅이자 신처럼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1960년대에 출생한 필자는 어려서부터 줄곳 김영삼 국회의원(아래 YS)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이 지역에 있던 경남중학교로 편입한 YS는 인근 경남고등학교까지 졸업하면서 마치 이 지역 출신처럼 여겨졌다.
당시 부산의 경남중학교와 경남고등학교는 부산·경남지역 최고 명문으로 여겨지던 때다. 초등학교때부터 과외를 해서 경남중학교에 입학하는 사례가 많았고, 합격자를 라디오를 통해 발표할 정도였다. 고향인 경남 통영에서 이곳으로 유학온 YS도 일단 그런 점에서 시민들에게 각인된 것 같다.
YS는 비록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지만 1960년 치른 제 5대 국회의원 선거 때 부산 서구에서 당선된 후 1963년, 1967년, 1971년, 1979년 잇따라 서구에서 당선되는 저력을 보였다. 그 저력의 바탕은 그가 경남중·고를 다녔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당시는 긴급조치법 위반으로 말 한마디 잘못하다 끌려가는 주민들이 허다하던 시절이었다. 밤 12시가 되면 야간통행금지로 길거리를 나다니지도 못했다. 이같은 철권통치속에 숨도 제대로 못쉬고 살아가던 부산 시민들은 YS의 거침없는 입담과 유신정권에 저항하는 강한 이미지에 대리만족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던 유아시절부터 필자가 YS를 입에 달고 살았다는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 걸 보면, 아마 YS의 영향력은 대다수 부산시민들에게는 엄청났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YS 지지하던 부산시민 정서가 부마사태 불러
YS를 향한 부산시민들의 정서를 대변하는 결정적인 사건은 1979년 벌어졌다. 그해 8월 9일 YH 무역 노조 조합원들이 당시 YS가 총재로 있던 서울의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하다 경찰에 진압되고, YS도 함께 박해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박정희 정권은 YH 무역 사건을 빌미로 1979년 10월 4일 YS를 의원직에서 제명했고, 당시 부산의 유력 석간지인 국제신보(현재 국제신문)에 실린 이 소식을 접한 부산 시민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의 동요가 시작되고 10일쯤 지난 것으로 기억된다. 드디어 부산시민들이 시내로 몰려나가 YS의 제명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였다.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던 필자도 우연히 부산 최고 중심가인 남포동에 갔다가 친구들과 함께 시위하던 시민들과 합류해 전투경찰과 대치했던 기억이 새롭다.
당시 마산에서도 시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언론들은 이를 두고 '부마사태'로 불렀다. 그로부터 10여 일 뒤인 10월 26일 결국 박정희 정권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부산시민들은 이를 YS의 저항력과 연결시키려는 분위기가 강했다.
10.26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국장 분위기가 강했지만 부산시민들은 암암리에 YS시대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부산시민들은 당연히 YS가 대통령이 될 것으로 믿었다. YS로 인해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이 어두운 시대가 끝날줄 알았다.
하지만 전두환이라는 더 무서운 군부세력이 나타나면서 이런 부산시민들의 기대도 물거품이 됐다. 하지만, YS에 대한 부산시민들의 환상은 좀처럼 깨지지 않았다. 이같은 현상은 후일 그가 3당합당을 통해 스스로 군부독재 세력과 손을 잡은 것까지 용인하는 결과로 나왔다.
하지만 상당수 부산시민들은 YS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나 YS를 비난했다. 이들은 3당합당과는 비교할 수 없는 폐해가 지역감정이라는 점, 지역감정을 유발한 책임 중 일부가 YS에게 있다는 사실을 3당합당을 통해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3당합당 보다 더한 YS의 실착은 지역감정 유발
1970년대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YS는 그때는 부산 시민들에게 한줄기 희망이자 영웅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특히, 그가 중·고교를 다닌 서구지역 주민들은 더 그랬다.
하지만 지역감정이라는 악습은 아이러니하게도 YS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에서 잉태되기 시작했다. YS가 대권에 다가가기 시작하던 1970년대부터 함께 민주화를 이끌던 김대중 전 대통령(아래 DJ)과 치열한 라이벌전이 시작되면서다.
부산 시민들의 YS에 대한 맹목적인 기대와 추종은 서서히 DJ에 대한 비토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 부산지역 변두리층, 노인층을 중심으로 "DJ는 빨갱이"라는 말들이 서슴없이 나왔다. 필자가 부산 서구를 떠나온 1990년대 초까지 이 지역 골목 구석구석에서 이런 말들은 회자됐다. "군부가 심어놓은 덫"이라는 일부의 외침도 YS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시나브로 이런 터무니없는 악소문들은 이 지역 주민들에게는 사실인양 퍼져갔고, 결국 YS가 스스로 군부독재와 손을 잡는 3당합당을 할 때도 "그럴 수 있는 일이다"라고 넘어가게 만든 배경이 됐다.
YS가 3당합당의 연기를 피우며 밀고 당기고 하던 당시, 부산의 일부 젊은층에서 YS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를 냈지만 대다수 시민들은 달랐다. YS에 대한 향수와 누군가 심어놓은 DJ에 대한 비토를 발판으로 3당합당을 용인하는 지역분위기가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같은 음습하고 암울한 부산지역 일부 계층의 인식은 그후 선거 때마다 부산의 '묻지만 여권지지'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부산에서는 새누리당 작대기만 꽂으면 당선된다'는 속설은 이미 민주화를 열망하던 부산시민들 사이에서 잉태되고 있었던 것이다.
○ 편집ㅣ장지혜 기자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