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제주 여행에서 렌터카는 필수? 이건 모르시는군요

[30일, 제주를 달리다 32] 그 스물아홉 번째 날

등록|2015.12.01 13:31 수정|2015.12.01 13:31

▲ 동문시장 내부모습 ⓒ 황보름


게스트하우스에서 동문시장까지는 걸어서 30분 정도 걸린다고 했다. 아침을 먹고 느지막이 방에서 나온 후 지도 어플을 켜고 어플이 일러주는 대로 걷기 시작했다. 나는 리지에게 미리 말을 해 놓았다.

"길을 헤맬 수 있어. 너무 당황하지마. (난 길치야…)"

리지는 길을 헤매는 게 무슨 걱정이냐며 자기는 이렇게 걷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다고 했다. 한국에 처음 와 보는데 지난 며칠은 제대로 구경하지도 못했다면서. 하긴, 외국에선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좋지 않나. 나도 그랬으니까, 지금 리지도 그렇겠지.

어김없이 길을 잘못 들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바삐 어딘가를 향해 가던 동네 주민에게 도대체 동문 시장은 어디쯤에 있는 거냐고 물어야 했다. 동네 주민은 나와 리지를 힐긋 보더니 자기를 따르라 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방향만 일러주시면 된다고, 너무 죄송하다고 말을 하며 따라가는 내게 동네 주민은 손가락으로 정면을 가리키며 다 왔다고 말한다. "저게 동문시장이에요." 코앞에서 얼마나 헤매고 있던 걸까.

사실 나는 동문시장을 둘러볼 마음이 별로 없었다. 며칠 전에 와보기도 했고, 그때도 별 감흥을 느끼지는 못했다. 제주 특산물을 판매하고 있다는 것 외에 동문 시장은 가끔 가보곤 하는 동네 시장과 거의 비슷했다. 젓갈만 사면 그걸로 오늘 이곳에서의 용무는 끝인 셈이었다.

시장 안으로 들어선 나는 주위를 대충 훑으며 빠른 걸음으로 젓갈을 찾아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아차, 했다. 너무 빨리 걸은 것 같다. 뒤를 돌아보니 리지가 저만치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게 보인다. 아 맞다, 리지는 외국인이지. 나는 다시 돌아가 리지 뒤에 섰다. 리지 속도에 맞춰 움직이기로 했다. 외국인의 눈엔 이곳이 어떻게 보일까.

▲ 동문시장에서 열심히 사진 찍는 리지 ⓒ 황보름


리지가 사진기에 담고 있는 것들은 내겐 너무 익숙한 것들이었다. 이를 테면 멍게, 고등어, 갈치, 문어, 회 떠놓은 것, 말린 옥돔. 상하이에서도 해산물은 먹는다고 했다. 스시도. 그런데 멍게는 처음 본단다.

"이게 뭐야?"
"아 그건 … 해산물. 그거 맛있어."(멍게는 영어로 뭘까)

시장 골목을 차례대로 다 구경했다. 리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연신 사진기를 눌러댄다. 귤을 살 땐 직접 흥정을 하기도 한다. 과일이 너무 먹고 싶었다는 리지는 산 자리에서 바로 귤을 까먹기 시작했다. 우리는 귤을 먹으며 젓갈집으로 향했고 나는 계획대로 젓갈 두 통을 샀다. 오메기떡을 파는 떡집도 보였다. 줄이 어마어마하게 길다. 동문 시장 근처에 유명한 고기 국수집이 있다고 들었는데, 이 떡집도 맛집으로 소문이 난 모양이었다. 난 떡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그냥 패스.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관덕정

동문시장을 나온 우리는 관덕정을 향해 걸었다. 동문시장에서 관덕정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 걸린다. 이곳에 오기 전 관덕정에 대해 좀 알아보니, 관덕정은 세종 30년인 1448년에 제주목사가 병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지은 건물이라고 했다.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란다.

▲ 관덕정 들어가는 길 ⓒ 황보름


▲ 관덕정에서 활 쏘는 리지 ⓒ 황보름


관람료를 내고 입구로 들어서자 마치 아는 사람을 반기듯 우리를 반겨주는 사람들이 있다. 관덕정 내부에는 무료 체험소가 두 곳 있었는데, 과거 조선시대 옷을 입어볼 수도 있고, 화살을 쏠 수도 있었다. 나는 리지에게 좋은 경험일 것 같아 한복을 입어보라 권했다. 쑥스러워하긴 했지만 리지가 한복을 입었다. 예쁘게 잘 어울렸다.

태어나 처음으로 활을 잡아보기도 했다. 옆에서 도와주시는 분의 설명을 따라 발 위치를 잡고 활에 화살을 끼고 힘껏 쏴봤다. 슝, 첫 번째 화살이 원안에 제대로 꽂힌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두 번째 활도 힘껏 날렸고, 역시나 제대로 원 안으로! 아무래도 소질이 있는 것 같다는 옆의 분의 말에 전율한 나는 자신감을 갖고 세 번째 활을 쐈다.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모두 땅으로 슝,슝,슝,슝. 잘하고 싶다는 마음만 들면 왜 매번 모든 걸 망치게 되는 걸까! 도움을 주시던 분은 원래 그런 거라는 요상한 격려의 말을 건네준다. 어찌 됐건 예기치 않게 활까지 쏘게 해준 이곳 관덕정이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관덕정에서는 왜 이런 체험을 제공해주고 있는 걸까. 특히, 활쏘기는 왜? 그 이유는 관덕정이란 이름과 관련이 있다. 관덕정은 "평소 마음을 바르게 하고 훌륭한 덕을 닦는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는 '활을 쏘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을 보는 것이다'라는 뜻의 '사자소이관성덕야( 射者所以觀盛德也)'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활쏘기를 통해 몸을 단련하면서 정신도 함께 닦았던 옛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무료 체험을 통해 가볍게나마 후손들에게 전해지고 있는 셈이었다.

활을 쏜 후 우리는 관덕정 안으로 더 들어가 봤다. 나는 비로소 어제 그 중국인이 왜 이곳을 추천해줬는지 알 것 같았다. 눈 앞엔 사방이 개방된 정자 같은 건물 하나가 서 있었는데, 외국인들의 눈엔 분명 신기하고 독특한 건물일 거였다.

우리는 건물을 한 바퀴 돈 후 그 앞 돌계단에 앉아 좀 쉬기로 했다. 그렇게 앉아 있는데 마음이 더없이 편했다. 계속 앉아 있고만 싶었다. 리지가 준 귤을 까먹으며 나는 이곳의 역사와 이름이 품고 있는 의미를 설명해 주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건물은 몇 번의 중수를 거쳐 지금 이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거라는 말도 해주었다.

나는 요샌 이런 곳이 좋다고 리지에게 더듬더듬 말했다. 시끌벅쩍한 장소에 가거나 삐까뻔쩍 한 것을 보면 뭔가 마음이 불편하다고. 새로운 것에만 열광하는 삶이 너무 무의미하게 여겨진다고. 지금 멈추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새로운 것만 좇다가 정작 내가 좋아하는 것이 뭔지도 모르고 죽을 것 같다고.

리지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중국도 지금 그게 무엇이든 새로운 것이면 다 좋다는 식으로 사람들을 몰아가고 있다고. 그 바람에 문화가 사라지고 있다고. 그냥 두어도 좋을 것들이 다 사라지고 있다고.

우리는 서양인 할머니, 할아버지가 천천히 우리 주위를 돌다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며 하지 않아도 될 것을 집중적으로 너무 많이 하는 인간들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귤로는 채워지지 않는 허기가 슬슬 느껴진다. 나오는 길엔 연못가에 잠시 서서 잉어들을 구경했다. 입을 뻐끔거리며 인사를 건네 오는 잉어에게 손을 흔들며 관덕정을 나왔다.

점심은 즉석떡볶이로 골랐다. 중국인들이 많이 온다는 떡볶이집 내부엔 중국어 메뉴가 한국어 메뉴보다 더 많았다. 소스도 중국인 입맛에 맞춰 사장님이 직접 개발한 특제 소스라고 했다. 내 입맛은 중국인 입맛인 것 같았다. 소스 맛이 아주 좋았다.

▲ 가끔은 나처럼 해안도로를 달리는 사람을 보게 된다 ⓒ 황보름


▲ 제주에 머물렀던 마지막 저녁, 하늘과 바다 모습 ⓒ 황보름


제주에서 마지막으로 달리기

다시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온 후 리지는 운전면허장으로 갔고, 나는 게스트하우스 카페에서 글을 쓰려다 미친 듯 졸음이 와 그냥 잠을 잤다. 꼬박 2시간 30분을 자고 일어나니 어느덧 오후 6시 30분. 밖을 보니 하늘에 구름이 가득하다. 그렇다는 건, 뛰기에 좋은 하늘이라는 말. 얼른 옷을 갈아입고 해안도로로 나와 달리기 시작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헐떡거리며, 사람들을 피해가며, 차에 치지 않게 조심하며, 바다를 힐끗 거리며.

3.5km 지점에서 달리기를 멈췄다. 도로가에 놓인 돌에 털썩 앉았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온몸에 감겨온다. 제주도에서 저녁 바람을 맞는 것도, 반짝이는 빛을 내뿜으며 고기를 잡는 고기잡이 배를 보는 것도, 구름 너머에 숨어 있는 태양이 뿜어내는 은은한 석양빛을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

거침없이 달려가는 차 소리를 들으며 나는 차 속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나 혼자 보고 있다는 생각에 행복해졌다. 천천히 하나하나 저 멀리 고기잡이 배들의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스물이 넘는 배를 헤아리며, 뺨을 슬며시 어루만져주는 바람에 환호하며, 나는 눈 앞의 것들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다.

눈물이 찔끔 나려고 했다. 그냥, 이렇게 세상을 살면 될 것 같았다. 아름다운 것이 없어서, 바라볼 것이 없어서 흔들릴 때는 오래도록 바라보면 될 것 같았다. 오래도록 바라보면 모든 것은 아름다워지리라. 관심과 사랑을 준 모든 것들은 아름다워지리라. 새삼 가슴이 벅차올랐다. 몸에 에너지가 가득 채워진 느낌. 일어나니 몸도 더없이 가볍다. 왔던 길로 다시 뛰기 시작했다.

가슴 벅찼던 건 벅찬 거고 내 가슴은 다시 힘에 겨워 헐떡대기 시작한다. 그래도 힘을 내 속도를 조금 높였다. 사람을 피해, 차를 피해, 피로감을 잊으며 다리에만 집중했다. 느긋이 해안도로를 걷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홀로 뛰는 즐거움. 뚝뚝 떨어지는 땀이 주는 쾌감. 모든 소리는 사라지고 남은 내 거친 숨소리. 헉헉. 나는 뛰면서 바다를 향해 (속으로) 외쳤다.

"잘 있어, 또 올게. 그동안 고마웠어!"
덧붙이는 글 2015년 5월 26일부터 6월 24일까지, 30일간의 제주 여행 연재글입니다.
이 기사는 황보름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