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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역사자료 더 소멸되기 전에 관심 둬야"

교내에 교육역사관 개관한 김해선 군산중앙초등학교 교장

등록|2015.12.05 16:55 수정|2015.12.05 16:55
고종(高宗)은 1895년 2월 2일 <교육입국조서>를 공포한다. 조선 개국 이후 처음으로 임금이 전 국민을 향해 새로운 교육에 의한 입국(立國)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조서는 학교를 많이 세워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국가 중흥과 보전에 직결됨을 밝히고 있다. 그 후 교육입국 정신에 따라 소학교, 중학교, 사범학교 등 관립학교가 잇달아 설립된다.

전북 옥구(군산)에도 최초로 공립학교가 세워진다. 교명은 옥구항공립소학교(沃溝港公立小學校). 대한제국 정부가 광무 3년(1899) 5월 1일 군산을 개항하고 사회경제 변화에 대응할 인재 육성을 위해 소학교를 세우도록 한 것. 옥구 부윤은 소학교 위치를 옥구향교 양사재(養士齋)로 정한다. 그리고 그해 10월 향교 재장(齋長) 전준기가 부(副) 교원으로 임용된다.

대한제국이 설립한 학교, 교장은 계속 일본인이 맡아

▲ 군산공립보통학교 제5회 졸업사진(1913). 일본인 교사들은 손에 칼을 쥐고 있다 ⓒ 중앙초등학교


옥구항공립소학교는 군산지역 근대 교육의 효시로 현 중앙초등학교 모태이다. 개교일은 기록이 없으나 한성사범학교 졸업생 한필수가 교원으로 임용되는 등 지속적으로 운영되다가 1906년 9월 1일 공립학교 지위를 상실한다. 그해 8월 '보통학교령'을 공포한 통감부가 대한제국 황제 명으로 설립한 소학교를 폐쇄하고 1907년 5월 공립군산보통학교(4년제)를 세운 것.

초대 교장은 일본인 상도겸삼랑(桑島兼三郞)이 부임한다. 중앙초등학교 연혁도 그를 초대 교장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후 광복이 되는 1945년 8월까지 일본인 6명이 릴레이 하듯 교장을 맡는다. 교직원도 대부분 일본인 교사였다. 이렇듯 조선인학교도 군복에 칼(日本刀)을 찬 일본인 교사들에 의해 교육이 이루어졌다. 당시 학생들 졸업사진에도 잘 나타난다.

▲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자료, 1908년 조사에서 교장이 이광래로 되어 있다. ⓒ 조종안


연혁에 이광래(李匡來)란 이름이 보이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확인이 안 된다. 다만 일제가 조선을 완전히 병탄할 목적으로 통감부를 설치한 1906년 2월부터 경술국치(1910)까지 군산 지역도 두 관청(옥구부와 이사청)이 양립하여 행정을 집행했던 것으로 미루어 설립 초기 조선인 교장 파견 근무자로 추정된다.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대한제국 직원록(1908)은 이광래 교장, 상도겸상랑 교감으로 명시하고 있다.

1908년 기록에 공립군산보통학교는 6개 학년으로 나타난다. 1906년 8월 공포된 '보통학교령'에 따르면 4개 학년만 있어야겠지만 공립군산보통학교가 모태로 하는 군산의숙이 주민의 높은 교육열을 반영하여 고등과를 설립하고 있어 쉽게 없애기 어려웠을 것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일본인 교사들이 학교를 장악하면서 4년제로 단축되고 교육 내용도 변한다.

일제강점기 군산공립보통학교는 주로 군산 옥구 지역 조선인 부잣집 자녀들이 다녔던 것으로 알려진다. 사춘기를 넘기고 입학하는 학생이 많아 같은 학년이라도 나이 차가 심하였다. 머슴의 등에 업혀오는 어린 도련님이 있는가 하면 결혼하여 상투를 튼 애아버지 학생도 있었다는 것. 매월 수업료가 15전이어서 중간에 학업을 포기하는 학생도 많았다고 한다.

군산공립보통학교는 조선인 교육 요람

1908년 5월 이화학당에서 화류회(운동회)가 열렸다. 난생처음 여학교 운동회를 구경한 사람들은 '처자들이 정숙하게 발걸음을 같이하는 자태나 경주하는 모습은 진취적 기상으로 가르침의 힘'이라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가 하면 '과년한 여자들이 다리를 벌리고 운동을 하다니 말세가 왔다'고 탄식하며 임금에게 상소를 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한다.

▲ 군산공립보통학교 학생들 마스게임 모습. (박정옥의 1937년도 졸업사진첩에서) ⓒ 동국사


공립군산보통학교는 1909년 남녀공학이 된다. 교내 운동회도 열린다. 1911년 군산공립보통학교로 개칭되고 1921년 6년제 인가를 받는다. 자료에 따르면 4년제였던 1911년 재학생은 320명(남 240명, 여 80명)이었다. 1935년에는 전교생 1557명(24학급)에 직원도 26명으로 증가한다. 광복 후 1950~1960년대에는 5000명에 육박하기도 했으나 2015년 11월 현재 149명(8학급)에 교직원 20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군산공립보통학교는 조선인 교육의 요람이었다. 1920년 이후 빠른 인구증가로 입학난이 심각해지자 제2 보통학교 설립을 목적으로 기성회가 조직된다. 그리고 1929년 4월 개교하면서 군산 제1 공립보통학교로 교명이 바뀐다. 그러나 갈수록 더해지는 가난과 일제의 교묘한 시험제도 시행으로 입학자가 줄어 1934년 제2 보통학교가 폐교되면서 다시 합병한다.

군산공립보통학교는 일제의 황국신민화 교육 정책에 따라 1938년 4월 군산소화공립심상소학교로 바뀌고 1941년 4월 군산소화공립국민학교로 명칭이 변경된다. 광복 후에는 1946년 8월 31일 군산중앙공립국민학교로 개명하여 중앙국민학교로 불리다가 1996년 3월 1일 일제잔재 청산작업의 하나로 군산중앙초등학교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른다.

잦은 교명 변경에서 굴곡의 역사 느껴져

▲ 제20회 졸업기념 사진(1928) ⓒ 중앙초등학교


식민지교육 체제는 경술국치(1910) 이후 더욱 공고해진다. 일제는 공립군산보통학교에 파견된 일본인 교사들을 통해 학교를 장악해가면서 수업 연한을 단축하고 조선인 자녀들을 일왕에게 순종적인 청년으로 양성하는 교육장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군산 지역의 다양한 야학과 학원을 폐쇄하고 군산공립보통학교를 중심으로 황국신민화 교육 체재로 재편해나갔다.

군산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1919년 3월 군산 영명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설애장터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이노우에(井上瀀) 교장이 학생들에게 압력을 가하자 재학생 70여 명이 동맹을 맺고 14일 자퇴서를 제출하며 항거한다. 23일에는 방화로 교사(校舍)가 소실된다. 경찰은 학생들을 무더기로 검거 고문하였고, 김수남, 이남율, 권재길 등 10여 명은 방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옥고(1년~10년)를 치른다.

▲ 교육칙어와 소화천황 사진을 봉안한 봉안전 ⓒ 동국사


1938년에는 본관 앞동산에 정원이 조성된다. 돌다리와 괴석, 석등, 인공연못 등을 갖춘 일본식 정원이었다. 다람쥐와 칠면조 등을 기르는 사육장도 있었다. 정원조성 목적은 학생들의 휴식이나 정서 발달이 아니라 황국신민화 교육의 하나에 불과했다. 한쪽에 '교육칙어'와 소화 천황 사진이 걸린 '봉안전'을 지어놓고 성지로 만들어 학생들에게 참배를 강요한 것 등이 사실을 말해준다.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킨 1937년, 그해 7월 20일치 <동아일보>는 '군산공립보통학교 김정균(3학년), 김갑균(1학년) 생도는 남매 사이로 그동안 저금한 돈에서 정균 여학생은 위문편지와 함께 10원을 갑균 남학생은 5원을 암연(岩淵) 교장에게 황군위문금으로 헌납하였다. 교장은 즉시 군산 헌병 분소에 신청해서 조선군 사령부 애국부로 송금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1942년 12월에는 특별청년연성소가, 1944년 4월에는 여성청년특별연성소가 부설된다. 일제는 학생들의 몸과 마음을 단련하기 위해 연성소를 설치한다고 명분을 내세웠지만, 속내는 그게 아니었다. 세뇌교육을 통해 학생과 학부모들을 충실한 황국신민으로 만들고, 태평양전쟁에 필요한 가미카제 특공대를 배출하는 군사훈련장 같은 곳이었다.

한국전쟁(1950~1953) 때는 북한군과 유엔군이 교대로 주둔하였고, 전세가 어려워지자 머리띠를 동여맨 군산 지역 학도병(학도의용군) 1000여 명이 집결했던 군산중앙초등학교, 1세기를 훌쩍 뛰어넘는 시간이라 하지만,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자주 바뀌는 교명과 변천 과정, 사건·사고 등에서 험난했던 굴곡의 역사가 오롯이 느껴진다.

흩어진 옛 자료들 모아 '중앙교육 역사관' 개관

▲ 중앙교육 역사관에서 김해선 교장 설명을 듣는 방문객들 ⓒ 조종안


군산중앙초등학교(교장 김해선)가 지난 10월 23일 '중앙교육 역사관'(아래 역사관)을 개관했다. 앞에서 말했듯 중앙초등학교는 116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김해선 교장은 예산이 없어 고민하다가 전북도교육청이 시행한 100주년 이상 된 학교 역사박물관 지원 사업(2015학년도)에 선정되어 추진하게 됐다고 전한다.

역사관은 3개 전시실과 한 개의 다목적 시청각실로 꾸며졌다. 제1실은 '연혁으로 보는 중앙교육의 역사', 제2실은 '사진으로 보는 중앙교육의 역사' 제3실은 '학교를 빛낸 인물과 사건들을 통한 중앙교육의 역사'라는 주제로 전시되고 있다. 현관, 복도 등에 걸린 사진과 옛 정원 답사를 통해서도 '100년의 역사'를 엿볼 수 있다. 아래는 김 교장이 전하는 교육관 설치 동기이다.

▲ 역사관 설치 동기를 설명하는 김해선 교장 ⓒ 조종안


"2014년 3월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학교를 한 바퀴 돌아보다가 안타까운 장면을 목격했다.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 때 자료를 모아놓은 방에 들어섰을 때였다. 학교 발자취를 더듬어볼 수 있는 흑백사진 60여 점이 퇴색되거나 붉게 변색하여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나마 학교 연혁이 적힌 인쇄물은 손질하면 재활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화단과 중앙동산(옛 정원)에 널브러져 있는 석조물 조각들과 일본인이 학교를 방문한 흔적, 일본식 한자가 새겨진 돌, 그리고 6.25사변으로 다른 학교 강당을 빌려 수업하다가 복교를 기념해 세운 복교비, 50회 졸업기념 비석 등 소중한 자료들이 험상궂은 모습으로 흩어져 있었다. 마음은 편치 않았지만, 그때부터 모두를 역사교육 자료로 활용할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인들이 조선인 학교를 성지로 여긴 이유

▲ 화단에 모아놓은 글이 새겨진 돌과 석조물 조각들. ⓒ 조종안


김 교장은 역사관을 설치하도록 자신을 부추긴 것은 아직도 구석구석에 남아있는 선배들의 흔적들과 석조물 조각들, 100주년 기념행사 자료들, 옛날에 수업하던 흔적들, 남아도는 빈 교실 등이었다고 부연한다. 특히 오래된 건물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자체가 유물이 되어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 그는 작업 중 발견한 돌에 새겨진 한자 문구를 소개했다.

鶴及嗊米段備一式/ 聖地參拜記念/ 紀元 二千六百年/ 參拜者 平川榮一 忌憎
(학급홍미단비일식/ 성지참배기념/ 기원 2600년/ 참배자 평천영일 기증)

기원 2600년은 서기 1940년을 가리킨다. 내용은 '학교를 방문한 평천영일이 성지(봉안전)를 참배하고 그 기념으로 박제한 학(鶴)을 함에 넣어 기증하다'로 풀이된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일인들이 조선인 자녀가 다니는 학교를 성지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정원에 소화 천황 사진이 내걸린 봉안전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일본의 초대 진무천황은 기원전 660년에 즉위한다. 이를 기점으로 하면 1940년이 이른바 황기(皇紀) 2600년이 된다. 일제는 이 해를 기념하기 위해 몇 해 전부터 각종 행사를 계획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40년은 일제가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창씨개명'을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군산에서도 1940년 6월 16일 부민(시민) 체육대회가 성대하게 열린다. 경기 종목은 원반던지기, 투포환, 초등부, 중등부, 일반부 100m 달리기, 400m 계주, 연식 야구 등 다양했다. 1938년 7월 조선체육회를 강제 해산시키고 각종 경기와 모임을 금지한 일제가 전시체제에 체육대회를 개최한 것은 부민들의 친목과 건강증진이 아니라 황기 2600년을 맞아 일본의 위상을 대내외적으로 홍보하고 황국사관을 뿌리내리기 위한 주입식 행사에 불과했다.

"학교 역사 기록하고 보존해서 후대에 전승해야"

▲ 복교 기념비 ⓒ 조종안


김 교장은 "대부분 학교는 공간도 없고, 자료도 그때그때 폐기해서 보존이 어렵지만, 중앙초등학교는 원도심권 공동화로 학생 수가 급감하면서 잉여교실이 많아 교육관을 설치할 수 있었다"며 "갈수록 사라지는 학교 역사를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보존하여 후대에 전승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소중한 자료들이 더 사멸되기 전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김 교장은 "역사관을 통해 학생들에게 교육의 가치와 학교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주고 역사인식 능력과 품성을 길러주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군산시가 구도심 지역 활성화 방안으로 추진하고 있는 체험학습 코스에도 한 축을 담당, 군산을 찾는 학생들이 일제강점기 초등교육 실체를 견학할 수 있는 체험의 장으로 꾸미고 싶다고 말한다. 이어 희망 사항도 내비쳤다.

"중앙교육 역사관은 과거를 통해 오늘을 배우고 미래를 내다보는 체험공간이다. 군산 근대역사박물관과도 연계, 역사관과 옛 정원, 서관 건물 등을 체험코스로 개발하여 재학생은 물론 외지인들도 투어를 통해 106년 역사에 빛나는 초등교육의 산실을 보고 느끼면서 자신의 학창시절을 연상하고 동심의 세계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되기 바란다."

▲ 가을이 깊어가는 중앙초 옛 정원, 붉은 벽돌 건물은 강당, 그 뒤에 교장 관사가 있었다. ⓒ 조종안


덧붙이는 글 자료출처: 디지털군산문화대전(교육)/ <군산시사>(2000)/ <군산야구 100년사>(조종안)/ 군산중앙초등학교 연혁,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와 매거진군산 12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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