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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부동' 공무원 해법, 빅 소사이어티는 어떨까?

[주장] '영혼 없는 관피아 철밥통'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등록|2015.12.07 14:22 수정|2015.12.07 14:22
'박현채'를 만나고 한국이 '불행사회'가 된 근본적 원인을 찾았다. 오늘날 '헬조선'으로 전락한 역사적 병인의 실마리를 박현채로부터 얻었다. 박현채의 손을 잡고 7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사회 불행의 씨앗을 발견할 수 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가까운 도서관에 가서 '민족경제론'을 주창한 박현채의 역저 '한국경제구조론'만 한번 잘 읽어보면 된다.

그 해방 전후사 부근을 두 눈 부릅뜨고 꼼꼼히 살펴보니 손에 '물컹' 하고 잡히는 게 있다. 오늘날 불행한 한국사회는 '반민족적 친일파·숭미파 관료체제'의 구조악으로부터 발아됐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영혼이 없는 공무원들'이 문제였다. 총독부 근무자 출신의 친일파, 지주, 기업가 출신의 미국, 영국 등 유학파, 그리고 기독교 미션계 학교를 다닌 기독교 등 이른바 '미 군정 관료체제 3인방'이다.

박현채에 따르면, 일제는 1930년대부터 순수한 농민들의 소작쟁의, 순결한 노동자들의 노동쟁의를 모두 공산주의자들의 준동이라며 매도하고 잔혹하게 탄압했다. 이때부터 '반공'은 일제의 주된 선전자료로 악용됐고 수많은 기회주의적 친일단체들이 반공을 표방하며 새로 조직됐다. 이들은 악의적으로 '좌익'을 점차 '항일'과 동의어로 간주하고 설파하기 시작했다.

이같은 뒤틀린 의식은 미국인들의 군정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미군정의 정치기반은 '반공'이라는 군사적 논리와 냉전논리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반공'으로 재미를 톡톡히 본 친일파 등 식민지 지배동조세력과 미군정은 서로 어제의 적이 아닌 '오늘의 동지'로서 동업자관계를 이루게 된다. 이때부터 '반공', '빨갱이' '종북'은 오늘날까지 한국을 지배하고 있는 친일·숭미파들에게는 저항 세력, 혁신 세력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전가의 보도같은 고성능 무기로 작동하고 있다.

서울시청 앞 광장의 농민대회. ‘철밥통’ 공무원들은 농민들의 ‘함께 살자’는 절규를 얼마나- ⓒ 정기석


친일파, 미·영 유학파, 기독교도 등이 일제와 미제의 앞잡이·끄나풀로 

또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등 민족주의자들의 애국적 활동은 미국의 고정된 선입견에 의해 공산주의 운동으로 간주되었다. 게다가 이는 민족주의적 지하세력의 심판과 보복을 두려워 한 일제에 의해 강조되고 악이용된다. 그래서 해방 직후 남한에서 일본과 미국은 '민족주의자는 곧 공산주의자'라는 공동의 반공 이데올로기로서 마치 동맹국처럼 의기투합한다.

이때 조선의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는 승전국 연합군 최고사령관에게 결정적인 전문을 띄운다. "공산주의자와 선동가들이 해방 후 조선의 평화와 질서를 교란하고 있다"며 치안유지 권한을 요구한다. 이에 연합군 최고사령관은 기다렸다는듯 즉각 회답한다. "미군이 책임을 떠맡을 때까지 38선 이남의 한국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통치기구를 보전할 것을 지시한다"고. 두 제국주의자들 사이에 식민지 조선이라는 먹잇감을 놓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상호호혜적 거래가 성사된 것이다.

결국 조선은 해방됐지만 일본은 물러가지 않았다. 겉으로는 일제 식민지로부터 독립을 쟁취했으나 친일파는 전혀 청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경찰의 훈련을 받고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한 한국인 85%가 미 군정의 경찰로 살아남았다. 정부가 수립이 되고나서도 한국 전체 경찰의 50%는 독립군과 애국지사를 때려잡는 데 앞장 선 일본경찰의 앞잡이들로 채워졌다.

행정부 공무원들도 친일파 일색이었다. 일본인 밑에서 훈련받고 일본에 충성을 다 한 친일파 관리들이 새 행정부의 대다수와 상부를 차지했다. 그들 친일파 공무원을 제외한 미 군정의 최고위간부급은 영어회화능력이 있는 사람들 뿐이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내걸었던 애국자들, 민족주의자들은 여전히 풍찬노숙 처지였다. 어이없게도 친일·숭미파가 해방된 조국의 행정부를 장악하게 된 것이다.

당연히 미 군정은 이들 친일·숭미 공무원들을 앞잡이이자 끄나풀로 요긴하게 활용했다. 이들은 미 군정을 대신해 일본인 공장 노동자자주관리를 부정하고, 민족주의자들이 자주적으로 주도한 농지개혁을 부정했다. 미 군정은 이들의 노고와 충성심에 보상을 아끼지 않았다.통역, 매판 상인자본, 일본농장 마름 등에게 권력과 재산을 쥐어주며 독립주권과 민족경제의 씨앗을 압살하도록 채찍질과 당근을 아끼지 않았다.

결국 해방 직후 한국은 사실상 미국 군인들이 아니라 이른바 '미 군정 관료체제 3인방' 손아귀에 들어간다. 총독부 근무자 출신의 친일파, 지주, 기업가 출신의 미국, 영국 등 유학파, 그리고 기독교 미션계 학교를 다닌 기독교도들이다. 그리고 해방 7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조국을 배신한 '미 군정 공무원 3인방'들이 국정과 행정을 농단하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된다. 오늘날 '신식민지 반봉건사회' 같은 '헬조선', '불행사회, 한국'의 악의 고리는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끊어야 한다.

광장에 모여든 시민들의 각종 민원과 기대를 공무원들은 잘 새겨듣고 있는지? - ⓒ 정기석


'철밥통 공무원'은 한국 청년들의 꿈  

물론 당시의 일제 앞잡이, 미제 끄나풀은 지금 공무원 사회에 더 이상 없다. 다 퇴직했다. 하지만 그들 선배 공무원들이 구축해놓은 '한국 공무원 사회의 기강과 질서, 또는 문화'는 여전히 잔존해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영혼 없음', '복지부동', '철밥통', '관피아' 등으로 대변되는 그들의 존재감은 참으로 독특한 것이다. 여전히 각종 부정과 비리의 사건으로 우리 사회 곳곳에 유령처럼 출몰하고 있다. 현대의학으로 아직 치유할 수 없는 암세포처럼 건재하다. 

그리스의 국가부도도 결국 '철밥통 공무원'이 문제였다. 그리스는 지나치게 많은 공무원 수와 과도한 특혜를 줄이거나 없애는 개혁에 철저히 실패했다. 그리스의 공무원이란, 정치인들이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철밥통으로 챙겨준 산물이기 때문에 손을 댈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정치후견주의 또는 정·관유착의 적폐가 어떤 비극을 초래하는 지 여실히 보여주는 표본이다.

그리스의 노동가능 인구 5명 중 1명인 85만 명이 공무원이라고 한다. 게다가 평균 임금은 민간 보다 1.6배나 더 높다. 그래서 공무원의 월급 총액은 국내총생산(GDP)의 50%가 넘는다. 퇴직연금도 퇴직 이전 월급의 95%를 챙겨줘야 한다. 정년퇴직이나 의원면직 말고는 해고당하는 일도 거의 없다. 가히 신화의 나라 그리스 답게 그리스의 공무원은 '신의 직장'이라 부를만 하다

그런데 그리스의 일이 남의 일로만 생각되지 않는다. 요즘 한국도 공무원이 '신의 직장' 대접을 받는다. 통계청이 발표한 '경제활동인구 청년층 및 고령층 부가조사 결과'에 따르면 청년 취업시험 준비생의 34.9%가 공시족(공무원시험 준비생)이다. 사법·행정·외무고시 등 고시족 9.8%까지 포함하면 청년 취업준비생의 절반 가량이 공무원에 청년의 미래를 걸고 있다. 예상 채용 경쟁룔은 10배가 넘는다.

청년들이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는 이유는 단순하다. 안정적이라는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 만큼은 국가가 해결해준다는 믿음이다. 그저 "영혼이 없이 복지부동할 수 있다면 평생 철밥통 하나만큼은 확실히 챙길 수 있다"는 매력이 있다는 것이다. 설마 그리스처럼 국가가 부도나서 월급이 체불되거나 해고 당할 리는 없다는 생각도 작용한다. 성취동기, 창의력, 혁신의지 같은 건강하고 건전한 청년정신이 밥을 먹여주지 않는다는 항변이다. 그러니 그건 "개나 갖다 주라"는 냉소를 날릴 뿐이다. 그래서 청년들이 책임질 조국의 미래는 암울하다.

‘복지부동’ 농정공무원을 향한 농민들의 원성과 원망(전남도청)- ⓒ 정기석


'관피아'는 한국 공무원의 특권

'영혼 없음', '철밥통' 처럼 한국의 공무원들을 특징짓는 수사는 얼마든지 더 있다. 역시 비꼬거나 조롱하거나 나무라는 말투다. '관피아'가 그것이다. 관(官)과 마피아가 합쳐진 '관피아'는 고위 공무원이 퇴직한 후 공기업이나 유관기관·단체에 재취업하면서 요직을 독점하는 현상을 말한다. 한국의 공직사회와 기업·기관의 잘못된 유착 관계를 고발하는 조어다. 재무부처 출신 모피아, 국세청 출신 세피아, 해수부 및 해경 출신 해피아, 보건복지부, 식약처 출신 팜피아 등 그 종류와 활동분야는 다양하다.

그래서 출신성분, 전문분야별로 활동영역이 구분되는 관피아는 낙하산 인사와는 다르게 취급된다. 낙하산 인사는 정치권에서 해당 직무와 무관한 '엉뚱한' 사람을 일방적으로 내려보내는 예측불가능하고 돌발적인 '보은 인사'에 가깝다. 그러나 '관피아 인사'는 쌍방향성이고 상호호혜적인 거래관계가 대부분이다. 서로 실질적인 도움과 이익을 주고받을 수 있어야 양자 간에 거래가 성립된다.

따라서 '관피아 인사'는 유관부처 출신이 공공연히 도맡아놓은 경우가 많다. 관계와 업계에서는 뿌리깊은 일종의 거래관행처럼 받아들이고 있을 정도다. 어느덧 그들만의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미풍양속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인사철이 되면 얼마든지 관련 업계의 후임 인사는 예측이 충분히 가능하다.

문제는 업계 재취업에 성공한 '관피아'의 책무와 소임은 공정하거나 당당한 경우가 드물다는 것이다. 온갖 부정과 비리의 온상 구실을 맡게 된다는 점이다. '세월호 참사'도 해양관련 공무를 담당하던 유관기관을 장악한 해수부 출신 등 '해피아'들의 부도덕과 불의 때문이었다. 이렇게 이들 관피아들의 임무와 활용가치는 명확하다. 이들이 보유한 전관예우 특권을 무기 삼아 전 직장인 정부를 상대로 로비와 공작을 벌여 각종 특혜를 받아내는 것이다.

미국 등 선진국은 전관예우도, 관피아도 개념과 현상이 없다. 공직자가 퇴직한 뒤에 재취업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유사업무일 경우에는 재취업 자체를 금지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한국도 최근, 관피아들의 특권·전횡·독점·불법·갑질 등을 해결하려고 일종의 관피아방지법인 '공직자윤리법 개정안'을 마련했다. 이로써 기존 2년으로 제한했던 퇴직 공직자의 관련 기관 취업 제한 기간은 3년으로 1년이 더 연장되었다. 퇴직 공직자들의 업무 관련성 범위도 '부서의 업무'에서 '기관의 업무'로 확장됐다.

'관피아방지법'이 마련되자 희비가 엇갈렸다. 시민사회단체는 환영했으나, 공무원의 보호막이 사라지게 될 것을 우려한 대기업, 공기업 등 재계와, 재취업의 문이 좁아지면서 달콤한 권력의 끈이 끊어질까 걱정하는 관계는 울었다. 당황하기 시작했다. 개정 법안에 따라 사기업 취업 심사도 함께 강화돼 고위 공무원의 재취업은 사실상 힘들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이 예비 관피아들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해피아’로 인해 발생한 세월호 참사 추모 분향소(순천시청) - ⓒ 정기석


'복지부동'은 한국 공무원의 주특기 

한국의 공무원들은 '가만히 있는 게' 주특기다. 일이 주어지면 일단 몸을 사리는 '복지부동(伏地不動)'은 한국 공무원으로서 갖추어야 할 최고의 덕목이다. 그래서 누구보다 먼저 나서거나 애써 새로운 일을 찾거나 벌이지 않는다. 그래봤자 월급을 더 받는 것도 아니고 괜히 나섰다가 감사에 지적만 당하는 바보 취급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누가 정권을 잡든 변하지 않는다. 복지부동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역사 속에서, 선배나 동료들의 낭패와 봉변으로부터 배웠다. 물론 이 정부에서도 마찬가지다. 복지부동의 정도는  더 진화했다. '복지부동 3.0'이라는 말까지 새로 등장했을 정도다. 행정자치부가 정부 경쟁력 제고를 목표로 추진하는 '정부 3.0'을 빗대며 조롱하는 투의 표현이다.

1970년대 무렵의 복지부동 1.0 버전은 그냥 나태와 게으름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개발도상국 시기의 공무원들은 일하는 방법도 잘 몰랐고 일 하기도 싫어했다는 것이다. 2000년대에 접어들어 국민정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나라안팎으로 할 일이 많아지면서 소신껏 일하다 험한 꼴을 당하는 공무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우리도 저 꼴 난다"며 몸을 사리는 복지부동 2.0 버전이 발동, 공무원 사회에 대대적으로 보급되었다고 한다.

복지부동 3.0의 특징은 한마디로 무기력증으로 설명된다. 관피아 척결, 공무원연금 축소, 행정수도 이전 등으로 공무원 사회는 집단 무기력증, 우울증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민원만 미루지 뒤는 챙겨주지 않는 정치권에 대한 원망도 깊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생활하는 세종시의 공직자들은 기회만 있으면 청사를 떠날 생각을 한다고 한다. 그런 '복지부동 3.0' 공무원들에게 '국민의 공복(公僕)'이란 호칭과 덕담은 이미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공무원의 특징이자 특권처럼 자리잡은 '복지부동'은 마치 법이 보장하거나 독려하고 있는 꼴이다. 공무원은 금고 이상 실형 또는 파면이 아니면 강제 면직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한국의 공무원은 설사 놀고 먹는다해도, 아무리 게으름을 피워도 큰 사고만 치지 않으면 무사히 지낼 수 있다는 말이 된다. 한 때 서울시 등에서 의욕적으로 도입했던 '공무원 3% 퇴출제'도 슬그머니 폐지되었다.

'영혼 없는 공무원'은 부정선거의 불씨

한국의 공무원은 '영혼'도 없다. 공무원 스스로도 서슴없이 하는 말이다. 공무원이라는 자신의 불가피한 처지를 자조하거나 변명하는 말로 대놓고 비굴하게 고백한다. 그래야 오래,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한다. 국민을 위해 봉사하고 국민들로부터 신뢰받고 존경받는 '공복(Civil Servant')은 오직 사전적 의미다.

한국 공무원사회에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주군이 바뀔 때마다 소신도 줏대도 없이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공무원들이 적지 않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눈치도 잘 보면서 줄도 잘 서야 한다. 그게 공무원에게 요구되는 주요한 능력요건이 되었다. '영혼도 없는 공무원'이란 그런 철새같은, 또는 해바라기 같은 공무원을 싸잡아 비하하는 말이다.

심지어 '영혼이 없다'는 이유로 불법적으로, 또는 아무런 죄 의식 없이 대선 등 공직선거에 개입하는 공무원까지 다발한다. 결국 공직선거 주무부처인 행자부장관 마저 집권여당의 연찬회에서 '총선필승'을 외치는 무법천지가 되었다. 행자부는 국가의 선거지원사무를 총괄하고, 공무원 선거개입을 감독하는 권한을 독점하고 있다. 선거사범을 수사하는 경찰청도 사실상 행자부 산하 기관이다. 헌법기관인 중앙선관위도 행자부의 눈치를 볼 정도로 막강한 권력이다.

그래서 최근 새정치민주연합 강동원 의원은 "본분을 망각하고 선거에 개입해 중립의무를 위반한 공무원들에 대해 처벌을 강화"하려는 목적의 공직선거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발의했다. 강 의원은 "공무원이 직무와 관련해 또는 지위를 이용해 선거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해도 처벌규정이 없으며 국가공무원법에 선거중립 의무위반 공직자에 대한 처벌조항 역시 미약하다"며 "앞으로 공무원이 각종 공직선거에 불법개입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처벌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지난 대선 부정선거 시비와 의혹이 사라지고 있지 않은 오늘날, 만시지탄이다. 

민관협치 ‘빅 소사이어티’의 실험장 ‘서울혁신파크’ - ⓒ 정기석


'공무원 관치'가 없는 '빅 소사이어티'로

아무리 생각해도 '영혼이 없는 복지부동형 관피아 철밥통'은 한국 공무원의 표준형에 가깝다. 한국의 공무원 사회는 태생적 역사를 살펴봐도, 구조적 현실을 들여다봐도 문제가 많다. 그렇다면 그런 공무원이 꼭 있어야만 하는가. 최소한 무능하고 부도덕한 공무원은 퇴출시켜 공무원 규모를 대폭 축소하면 안 되나. 대신 민간에서, 또는 민관 거버넌스 조직에서 공공의 서비스를 넘겨받아 감당하는 게 더 생산적이고 효율적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정부의 지출을 줄이고 공동체사회가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는 정치철학을 바탕으로 한 영국 캐머런 정부의 빅 소사이어티(Big Society) 전략에 출구가 있는 게 아닐까. 이렇게 "국가가 직접 개입하는 빅 거번먼트(Big Government)와는 다르게 민간과 지역사회가 자발적으로 참여를 늘려 사회안전망을 보완"하면 안 되는걸까. 공무원이 없으면 국정이나 공무가 안 되는걸까.

물론 일각에서는 2000년대 중반에 시작된 캐머런 보수당 정부의 빅 소사이어티가 "정부 지출을 줄이기 위한 명분일 뿐, 정부가 부담해야할 몫을 공동체에 떠넘기려 한다"는 비판이 없는 게 아니다. 또 "보수당이 공동체에 활기를 부여한다는 말장난으로 사회복지를 퇴보시키고 재정 지출 축소를 정당화하려는 것"이라고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다.

그럴 수 있다. 나도 평소 마을공동체니, 사회적 경제니 하는 해법과 대안을 모색할 때마다, 그리고 어김없이 출구와 돌파구가 잘 보이지 않을 때 마다 이렇게 오해와 의심을 하곤 한다.

"마을이나 사회적 경제는 다 옳은가, 그것 말고 다른 숨통은 없는가. 과연 우리가 마을이며, 사회적 경제를 잘 할 수는 있는 건가. 과연 국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국가의 근육과 완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본디 우리가 아닌 국가가 마을이나 사회나 경제를 책임져야 하는 건 아닌가. 괜히 국가가 우리에게 책임을 떠넘긴 건 아닌가. 우리도, 마을도, 사회도 국가의 폭력적 거짓말과 정책적 상술에 속은 건 아닌가."

하지만 '빅 소사이어티'의 중도적 가치는 분명 주목하고 경청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특히 기존의 영국 보수주의(대처주의)와 달리 경제적 성장 뿐 아니라 '사회정의'를 강조한 부분이 특히 그렇다. 연세대 홍석민교수도 "빈곤 감소와 사회정의, 책임화에 초점을 맞춰 정책을 개발하고 신자유주의 시장과 복지국가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상호부조에 기초한 보다 평등주의적인 '새로운 시민 국가'가 '빅 소사이어티'의 이상적인 비전"이라고 정의한다.

그런 관점에서 요즘 여와 야, 보수와 진보, 중앙와 지역, 호남과 영남 가릴 것 없이 성행하고 있는 '사회적경제', '공유경제', '민관거버넌스', '마을공동체' 등의 '빅 소사이어티' 지향 정책에 우려보다는 기대를 걸 필요가 있다. 보수적인 영국 보수당과 미국 공화당 조차 빅소사이어티, 공유경제 등을 통해 '사회적경제'를 정책적으로 수용하고 있기도 하고.

정부나 공무원 일방이 아닌, 민관거버넌스와 풀뿌리 민간자치 그룹이 '사회정의' 구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빅 소사이어티. '공무원 관치'의 구조악에서 초래되는 뿌리깊은 적폐가 그런 사회에서는 치유되고 제거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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