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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활에는 시간이 필요한데, 입원은 짧다니...

[휠체어에서 마라톤까지 ⑨] '대한민국 재활 유감', 기한되면 퇴원해야 하는 병원의 현실

등록|2015.12.24 09:15 수정|2015.12.24 09:15
우리 사회에서 환자와 병원, 환자와 의료진 사이처럼 일방적인 갑을 관계가 있을까? 2005년 끔찍한 사고를 당해 만 3년간 병원치료를 받으면서 의료진과 병원의 일방적 요구와 처사에 서러웠던 경험이 내게는 있다. 병원치료를 스스로 거부하고 이른바 자가 재활로 내 재활의 최종목표였던 '완전한 재활'을 목전에 둔 지금 오래전 그 기억을 들춰내 '대한민국 재활 유감(遺憾)'이란 제목으로 글을 시작함은 병원과 의료진의 부당한 요구에 시달려야만 하는 장애인들과 일반 치료하듯 재활치료 하는 의료진이 지금도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 기자말

긴 시간 의식을 잃었다가 회복하자마자 서둘러 경추 수술을 하고 할로배스트를 한 낯선 모습으로 재활해야 했던 2005년 초가을 어느날, 하루 일정을 마치고 병실의 내 침대에서  아내의 도움을 받아가며 저녁식사를 할 때였다.

담당 주치의가 와서 아내에게 '왜 아직까지 퇴원날짜에 대한 말이 없냐?'라고 물었고 나는 그 의사의 태도가 거슬렸지만, 자초지종을 모르기에 처음에는 듣고만 있었다. 전부터 퇴원을 요구했던 모양이었다. 아내는 "서울의 병원에 입원신청을 하고 연락을 기다리는 중"이라며 조금만 더 시간을 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 의사는 "더는 기다려 줄 수 없으니 개인병원이든 집이든 얼른 퇴원하라"라고 말했다.

할로배스트에 적응이 안 돼 식사조차 어려웠던 나는 그 말에 격분해 "이 거추장스런 몰골로 어디로 가라는 말이냐?"라고 항변했지만, 그 의사는 "할로배스트를 하고 전화도 받고 일을 하는 사람도 많다, 생활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라는 말을 하곤 나가버렸다.

당시의 난 걷기는커녕 일어설 수조차 없어 휠체어를 이용했고 갓 3살이었던 사랑하는 딸 형서를 아이의 이모 집에 맡겨놓고 날 24시간 간호해야 했던 아내도 경황이 없어 옮길 병원을 알아보는 일은 다른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가족들이 애쓴 덕에 그 일이 있고난 얼마 후 난 병원을 옮길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내 치료를 담당했던 주치의와의 일은 내게 큰 충격이었다.

할로배스트를 한 이 모습으로 퇴원을 강요당해야 했다. 경추 수술 후 할로배스트를 한채로 퇴원할것을 강요하던 주치의로 인해 내 힘힘으로 할 수 있는게 없던 난 큰 마음의 상처를 받아야 했다. ⓒ 서치식


내 힘으로 일어설 수조차 없어 일상 생활조차 아내의 도움을 받아야 했으며 거기에 할로배스트를 한 내게 퇴원을 강요하는 병원의 처사는 서러움을 넘어 장애를 얻은 내가 자리할 곳이 이 세상에는 없다는 위기감으로 다가왔다.

몸이 아픈 사람에게 병원이 어떤 의미인지는 경험해 본 사람은 누구나 알 것이다. 병원이란 곳이 질병을 치료하는 기능도 있지만 현실에서 무기력 할 수밖에 없는 환자에게 병원은 피난처·안식처의 역할을 한다. 그런 병원에서 내 치료를 주도하는 주치의로부터 그런 일을 당했으니 내가 받은 상처는 클 수밖에 없었다.

큰 상처를 입은 어린 새가 힘겹게 찾아 든 도피처에서 내몰린 심정에 비유할 수 있을까? 넓고도 깊었던 당시의 상처로 생긴 위기감이 지난한 세월 이른바 자가 재활에 매달리게 해 오늘의 완전한 재활을 가능하게 한 요인이 되기도 했지만 그 과정에서 얼마나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려야 했는지 모른다.

경추 수술 후 할로배스트를 한 채로 퇴원을 강요당하는 설움 속에서 시작된 나의 병원 순례는 서울의 영동세브란스(지금의 강남 세브란스)를 거쳐 신촌세브란스 등 여섯 군데의 병원을 여덟 번 옮겨 다니며 만 3년 간 이어졌다. 이는 환자의 상태가 아닌 순전한 경제적 이유로 환자의 입·퇴원을 강요하는 병원의 행태로 인한 것이었다.

재활병원들은 입원하면서부터 미리 퇴원 날짜를 정하는 게 불문율처럼 돼 있어서 입원 신청을 하고 입원을 허락할 때 '2개월 후에 퇴원 한다'는 약속을 받고 입원을 시킨다. 그러니 한 병원에 입원할 때 다음 병원을 예약해둬야 공백 없이 병원 치료를 이어갈 수 있었으며 자칫 잘못해 공백이 생기면 집에서 대기하다가 다음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병원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자일 수밖에 없는 환자나 보호자들은 이 병원 저 병원 옮겨 다녀야만 했다. 재활 환자들은 거동이 불편해 대개는 보호자가 붙어서 간호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집과 가까운 병원에 있어야 보호자라도 수시로 집안일을 볼 수 있는데 2~3개월에 한 번씩 병원을 옮겨야 하니 그 불편이 얼마나 크겠는가? 

당시의 난 순진하게도 병원의 수용 능력에 비해 환자수가 너무 많아서 벌어지는 현상이라 생각했다. 병원들이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이유도 입원을 기다리는 대기 환자수가 너무 많아서라고 했다.

하지만 이는 결국 냉정한 자본의 논리에서 비롯된 것임을 난 병원치료를 마치고서야 알 수 있었다. 환자가 새로 입원하면 병원의 시설을 이용해 각종의 검사를 해 수익을 올리게 되고 장기 입원환자는 낮게 책정된 진료비를 의료보험 공단에서 지급받게 되니 병원으로서는 입원 환자를 강제로라도 퇴원시키고 새로운 환자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게 일반화돼 있어 2~3개월에 한번 환자를 '밀어내기식'으로 퇴원시켜 주기적으로 재활환자들의 거대한 이동이 이뤄졌다. 이에 따라 하지 않아도 될 검사를 반복하는 과잉 진료가 공공연히 벌어진다. 과잉 진료를 막기 위해 장기입원 환자의 진료 수가를 낮춘 것이 결국 더 큰 과잉진료를 불러오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재활치료는 긴 시간이 소요되는 치료인지라 두 달여 마다 병원을 옮기는 일은 환자와 보호자에게는 여간 큰 부담이 아니었다. 병원치료 과정에서 어떤 환자는 병원에 수천만 원을 기부하고 긴 시간 입원을 보장 받는 경우도 있었고, 병원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을 통해 장기입원을 보장 받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시도가 시작되고 있었다. '환자가 중심'에 있고 '환자가 존중받는' 병원을 짓기 위한 푸르매 재단이 2005년 3월 9일 설립된 것이다. 설립자인 백경학 상임이사는 영국 여행 중 사고를 당한 부인의 재활치료를 하면서 열악한 국내의 재활여건을 알게 돼 잘 나가던 언론사 기자직을 그만두고 이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곳은 민간기부 재활센터인 '세종마을 푸르메 센터'를 2012년 개관해 운영하는 등 장애인 전문지원단체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민간의 이런 노력과 더불어 보건소 재활은 정착단계를 넘어 활성화되고 있다. 전국에 150여 개 보건소가 재활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게 됐다(관련 기사 : 어디서나 누구나 쉽게 무료로 하는 보건소 재활).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개선하려는 노력은 공공과 민간에서 다양하게 시도돼 재활 환경은 많이 개선됐지만, 내가 겪어야 했떤 일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관련 기사 : 몸 굳어가도... 장애아동들 '병원 유랑민' 신세).

건강한 사회인으로 복귀해 근무중인 사무실 건강한 사회인이 되어 2015년 9월 주민센타에서 구청으로 발령받아 근무 중인 사무실 모습 ⓒ 서치식


내가 받은 아픔과 설움을 이 땅의 장애인들이 더는 겪지 않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하나씩 차근차근 시작하려고 한다. 뇌병변 2급 장애의 몸으로 하프 마라톤 완주를 당당하게 이룬 후 재활치료의 문제와 재활병원들의 횡포에 대해 수요자(需要者)의 입장에서 목소리를 높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덧붙이는 글 네이버 카페 '아리아리 재활'에 중복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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