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이브, '무등산 타잔' 사형 "우리 오빠는 중앙정보부에 자수했다"
[최후의 진술 ① 박흥숙 편] 무등산 타잔, 박정희 시대가 조작한 청년의 죽음
모든 법정 최후 진술에는 사람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어떤 사건이 나와는 상관없는 뉴스라거나 케케묵은 역사책 속에나 나오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한 시대를 상징하는 사건들의 최후 진술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위치가 어디쯤인지도 가늠해보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그는 그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날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1980년 12월 24일, 그 날은 여느 성탄 전야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전국의 성당과 교회에서는 구세주의 탄생을 기념하는 미사와 예배가 열렸고, 성탄절을 맞은 길거리에는 가족, 친구, 애인들로 붐볐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명동에는 많은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피로 얼룩진 1980년이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영업 시간이 자정까지로 연장됐지만 유흥업소들은 밤 10시가 되자 대부분 일찍 문을 닫아걸었다고 한다. 독재 정권의 하수인들은 서울 은광여고 브라스밴드 59명을 불러 청와대 비서실 앞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을 연주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들답게', 그들이 선택한 사형 집행일은 하필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5.18로 구속됐다가 재판 받고 나오는 날이었어요. 눈이 왔었는데... 그 날 집행됐다고... 안타까웠죠." (위인백 5.18 교육관 관장)
그 날, 사형대에는 한때 법관을 꿈꿨던 청년도 서 있었다. 박흥숙, 그 때,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천장에 숨겨놨던 30만 원이 재로 변하는 광경을 지켜보며 울부짖던 어머니가 스쳐갔을지 모른다. 자신의 손으로 철거반원 4명을 죽였던 그 순간이 다시 떠올랐을지 모른다. 그에게, 1977년 봄은, 참혹했다.
"우리 오빠는 중앙정보부에 자수했다"
▲ 1977년 4월 21일자 <경향신문>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20일 하오 2시 쯤 광주시 동구 운림동 산 143 해발 500 미터 무등산 계곡 증심사가 있는 속칭 덕산골에서 무허가 건물을 철거하던 광주시 동구청 철거반장 오○○씨(42)와 구청 소속 일용잡급직 이○○씨(30) 등 7명이 집을 헐린 심금순씨(52)의 2남 박흥숙(22)에 의해 사제총으로 위협을 받고 빨랫줄로 양손을 묶인 채 해머로 뒤통수를 얻어맞아 그 중 오씨와 이씨가 현장에서 숨지고 양○○씨(27), 윤○○씨(37)가 조선대 부속병원으로 옮겨 응급가료 중 숨졌으며 김○○씨(31)는 위독하다." (1977년 4월 21일자 경향신문, 피해자 이름 및 사실과 일부 다른 부분은 지움)
그야말로 세상을 경악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게다가 범인의 종적 또한 묘연한 상태. 택시를 타고 광주 시내 쪽으로 달아났다거나 "집이 철거됐으니 고향으로 내려가야겠다"는 목격담 정도만 알려졌다. 경찰은 범인이 광주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으로 보고 시내 일원에 비상망을 펼치는 한편, 현상금 50만 원을 내걸고 그의 사진 전단 1만 장을 뿌렸다. 세간의 관심이 집중된 사건인 만큼, 경찰은 검거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로부터 사흘 뒤 서울에서 범인이 잡혔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상계동 이모집에 은신 중 시민 제보로 잡혔다"고 했다. 하지만 박흥숙의 동생 박정자(59·여)씨는 최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오빠는 자수했다"고 주장했다.
"우리 때문에 자수를 했어요. 엄마하고 나하고 잡혀 있었거든요. (당시 박정자씨는 살인방조혐의로, 어머니 신금순씨는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구속된 상태였다) 나중에 오빠한테 들었어. 나, 자수했다고. 서울로 가는 도중에 간첩으로 의심되는 사람을 만났다고 해요. 그래서, 중앙정보부에 신고하고 '내가 박흥숙'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자수했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 당시에는 다 숨겼어. 자수한 것 자체를 다 숨겼어."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하지만 사건 당시 구명운동을 했던 노영숙 오월어머니집 사무총장 역시 면회 과정에서 같은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노 사무총장은 "당시 공로를 인정받아 승진한 경찰들도 있었고, 아무래도 간첩 이야기가 나오다보니까 그 부분을 애매하게 넘겼던 것 같다"고 말했다. 2심 재판 과정에서 이기홍 변호사의 사무장으로 일했던 위인백 5.18 교육관 관장 역시 "그때 본인이 자수했다고 말했었다"고 증언했다.
"짐승 쫓으려고 만든 딱총"을...
▲ 2005년 방영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박흥숙 편' ⓒ MBC
사건 당시 묻혔던 물음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아니, 이를 따지는 것조차 무의미했다. 경찰에게는, 언론에게는, 나아가 박정희 정권에게는 '느낌표'만이 필요했다. 어떻게든 대중에게 이 사건을 납득시켜야 했다. 자칫 당시에 숱하게 이뤄지고 있었던 강제 철거에 대한 불만을 폭발하게 만드는 뇌관으로 작용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물음표는 도대체 어떻게 청년 한 명이 다섯 명을 상대해 그 중 네 명을 죽음에 이르게 했냐는 것이었다. 우선 피해자들을 위협한 쇠파이프 사제총 이야기가 좀 더 근사해야 됐다. "산중에 외롭게 살고 있기 때문에 호신용으로 만든 것"이라는 사연이 더해졌다. 원래부터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만들기 충분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동생 박정자씨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런 생각은 180도 달라진다.
"산 속이니까, 멧돼지나 그런 것들 많았었고, 그때만 해도 늑대도 있었거든요. 실제로도 봤어요. 그 때는 늑대인 줄 몰랐는데, 꼬리가 굉장히 길고 털이 뿌옇고 치렁치렁하더라고요. 눈은 시베리안 허스키처럼 '희멀떡한' 색깔? 갈색털이었는데, 내가 개인 줄 알고 다가갔더니 도망가더라고요. 그때는 그랬어요. 짐승들이 집 근처까지 막 내려오고 그랬으니까, 짐승들 쫓으려고 만든 거죠. 그렇지 않았으면, 오빠가 뭐 한다고 총을 만들었겠어요. 그냥 소리만 나는 딱총이었어요. 화약 넣어서 '빵' 소리만 나는."
물론 그 소리에, 처음에는 철거반원들도 놀랐을 것이다. 사건 당시 박흥숙은 한 번의 '빵' 소리를 냈다. 놀란 철거반원들이 포박에 응하게 된 이유였다. 하지만 그들 또한 딱총의 조악함을 곧 눈치채고 대항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철거반원에게는 그럴 수밖에 없는 절박한 사정이 있었다. 박흥숙은 그들을 데리고 광주 시장에게 항의하러 가려고 했다. 진짜 그렇게 되면, 박봉의 일용직인 자신들에게 화가 미칠 가능성이 높았다. 그들에게도 가족의 생계가 걸린 일이었다.
아마도 이 '사실'을 알고 있던 누군가의 머릿속에는 박흥숙의 평소 사진을 보다가 1970년대 인기를 끌었던 '미드' <타잔>이 떠올랐을 것이다. 근육질의 몸매로 산 속을 누비는 타잔, 박흥숙은 사자를 제압할 정도로 강력한 '힘'의 소유자여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게 보이기에 박흥숙은 키가 작았다. 165cm의 작은 체구로 철거반원들을 혼자 상대하기 위해서는 '이소룡'이 더해져야 했다.
그래서 박흥숙은 평소 무예를 익히고 칼 던지기 등 십팔기에 능숙하며, 태권도, 유도, 기합술 등을 두루 섭렵한 무예의 고수로 소개됐다. "평소에 뒤틀린 영웅심리가 잠재해 있었을 것"이라는 해설도 빼놓지 않았다. '무등산 타잔'이라는 소설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무등산 타잔, 야만의 시대가 왜곡한 청년
▲ 박흥숙이 평소 체력 단련을 열심히 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동생 박정자씨는 "평소 오빠가 다리에 납을 각각 차고 다니면서 체력 단련을 했다"고 말했다. 타잔이나 이소룡이 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박흥숙은 법관이 되고 싶었다. ⓒ MBC
박흥숙이 평소 체력 단련을 열심히 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동생 박정자씨는 "평소 오빠가 다리에 납을 각각 차고 다니면서 체력 단련을 했다"고 말했다. 타잔이나 이소룡이 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박흥숙은 법관이 되고 싶었다. 중학교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했으나 교복 살 돈이 없어 진학을 포기했던 그로서는 사법고시가 지긋지긋한 가난의 탈출구였다.
하지만 검정고시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통과하고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가 절감한 한계는 '머리'가 아니라 '몸'이었다. 박정자씨는 "오빠가 공부하다가 많이 쓰러졌었다"며 "체력이 약하다는 생각에 운동을 시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몇 년을 운동하면서 사법고시라는 '문'을 두드렸을 즈음, 그의 몸은 "사법고시 패스하기 전에 전국체전에 한 번 나가고 싶다"고 동생에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해졌다.
그런 그에게 야만의 시대는 '무등산 타잔'이라는 별명을 갖다 붙였다. 그리고 그가 살던 덕산골은 경치가 좋아 평소 굿을 하는 사람들이 자주 찾는다는 이유로 '무당촌'이 됐고, 박흥숙은 사이비 종교에 영향까지 받은 이상한 사람인양 묘사됐다. 집이 철거되면 공부방으로 쓰려고 파놓은 구덩이 또한 철거반원들을 죽이기 위해 철저히 준비한 것으로 각색됐다.
이런 왜곡의 반작용일까. 인터넷에는 박흥숙에 대한 과장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사법고시에 합격했으나 할아버지가 빨치산이라서 합격이 취소됐다는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이런 이야기가 도는 데에는 2005년 개봉한 영화 <무등산 타잔, 박흥숙>도 한몫 했던 것 같다. 영화 이야기를 꺼내자 박정자씨는 불편한 기색을 표시하며 "보기 싫다"고 했다. 그는 "거의 다 왜곡"이라며 "너무 많이 포장을 했다, 우리 오빠는 그저 열심히 살았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할아버지가 빨치산이란 이야기도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빨치산 그런 건 아니었고, 증조 할아버지가 동학난 때 영광군 동학대장을 하시다가 관군한테 총 맞고 돌아가셨다고 해요. 그래서 증조 할아버지 묘가 없어요. 영광군, 어디, 그냥 총 쏘고 묻어 버려서, 묘가 없어. 그때 집안이 완전히 풍비박산됐다고 해요. 그 전까지는 그래도 집안이 괜찮았대요. 백수인가?(영광군 백수읍) 그쪽에 집이 있었는데, 아름드리 나무 기둥도 쓰고, 집도 컸다고 들었어요."
아직도 유효한 물음표, 왜? 박흥숙은...
▲ 박흥숙의 어린 시절 모습 ⓒ 백상시네마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하는 부분을 공권력 쪽에서는 감추고 싶었겠죠. 그러니까 언론 쪽에, 이렇게 계속, 뭐냐하면, 찾아와 가지고, '불'이라는 단어를 쓰는 기자를 팔목까지 잡을 정도로, 못 쓰게 할 정도로... (중략) 시청 고위 간부들이 떼로 몰려와 가지고 2명, 3명이 기자 옆에까지 아니면 사회부 데스크까지 와서 이렇게 제발 불이라는, 불을 질렀다는 그걸 끝내 못쓰게." (박화강 당시 전남매일 기자, 2005년 방영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박흥숙 편' 중에)
1977년 4월 20일,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던 그 날의 물음표는 결국 다시 '왜'로 돌아간다. 왜 박흥숙은 흥분할 수밖에 없었을까. 박정자씨는 "그 때 오빠가 살림살이 같은 것들을 스스로 다 꺼내줬었고, 집에 불만 지르지 말아달라고 했었다"며 "철거반원들이 불을 지르고 그제야 방 한 칸이라도 마련하려고 천장에 모아놨던 돈이 생각나서 울부짖는 엄마를 그래도 말리고 참았었다"고 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오빠가 그랬어요. '저 사람들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위에서 시키는 일이다'. 그러면서 다른 집에는 제발 불지르지 말아달라고 했었거든요. 우리 동네에 환자 분들이 많았어요. 폐병, 당뇨병, 사회에서 거의 낙오되다시피 했던 분들, 오갈 데 없는 분들이 거기 와서 사셨고, 평소에 오빠가 그 분들을 돌봐드렸는데...
그런데 좀 있으니까 그 집에서 연기가 타오르고 하니까... 저보고 먼저 시장한테 가서 사정을 이야기하라고 하면서, '저 사람들 내가 데리고 시장한테 가서 따져야겠다', '오갈 데 없는 사람들한테 꼭 저렇게까지 해야겠냐'고, 내가 그래서 '오빠, 그러지 말라'고 말렸는데, 완전히 그때는 오빠가, 자기 정신이라기보다는, 그냥 이성을 완전히 잃은 거죠."
※ 이와 관련 사실 관계 확인을 위해 당시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김아무개씨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그는 정중하게 응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그리고 광주시장실 입구에서 "알아서 할 테니 가보라"는 말을 듣고 돌아섰던 동생은, 버스 안에서 오빠가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는 뉴스를 듣게 된다. 만약, 철거반원들이 불을 지르지 않았다면, 박흥숙은 지금 동생 곁에서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런 선택은 철거반원들에게도 불가능한 것이었다.
"철거만 해야지, 소각은 할 필요가 없잖느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데, 철거를 하고 소각하라는 것까지 다 상부 지시가 있었어요, 그때 당시, 본청에서 이제 이렇게 철거를 하고 보고해라, 소각을 해라, 그런 공문이 지금까지 있는가는, 이미 폐기가 돼서 없을 겁니다마는, 그렇게 내려왔어요." (김대옥 당시 광주시 동구청 건축지도계, 2005년 방영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박흥숙 편' 중에)
박흥숙 사건의 '불씨', 아직 남아있다
▲ 생전의 박흥숙 모습 ⓒ 백상시네마
많은 시간이 흘렀다. 적어도, 철거 현장에서 누가 불을 질렀다고 기사를 쓸 수 있는 시대는 됐다. 하지만.
용산구 효창동, 안산시 단원구, 김포시 풍무동, 부산 문현동. 이들 지역은 최근 한 달 사이 화재가 났던 곳들로 공통점이 있다. 모두 재개발 구역이다. 한결같이 방화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물론 보통 재개발 구역들은 화재에 취약하기 마련이다. 동절기라는 특성이 작용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다음 뉴스들은 꼭 그렇지만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인천의 대표적인 재개발사업지구인 도화지구에서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가 잇따르고 있다. 1일 인천 남부경찰서에 따르면 지난달 30일 오후 6시께 남구 도화동 111의 21 주택에서 불이 나 51㎡를 태우고 16분만에 진화됐다. 빈집이라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올 들어 도화지구에서 발생한 4번째 화재였다. 지난 해 12월 18일, 20일, 24일 발생한 화재까지 합치면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가 최근 한 달여 사이 도화지구에서만 7건이 발생한 것이다." (2012년 2월 1일자 연합뉴스)
"재개발에 반대하는 건물주와 세입자를 쫓아내고 보상금을 적게 지급하기 위해 재개발 지역 내에 수 차례에 걸쳐 고의로 불을 지른 철거업체 대표와 조직폭력배들이 경찰에 붙잡혔다. 지금까지 재개발 지역에서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가 발생할 때마다 철거업체의 소행이라는 소문이 떠돌았지만, 경찰 수사를 통해 사실로 확인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2009년 4월 28일자 문화일보)
2009년 보도된 사건의 경우, 최근까지 진행된 재판에서 이 철거업체 대표는 일반건조물 방화교사 및 살인 미수 혐의를 인정받아 징역 3년 6월을 선고받았다. 박흥숙 사건이 종료형이 아님을 뒷받침하는 오늘의 뉴스다. 그 이유를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는 "실제 추진되는 재개발 사업은 법이 정한 절차가 아니라 힘이 정하는 순서를 따른다"고 짚고 있다.
그는 <참세상>에 실렸던 '놓치지 말아야 할 용산 참사 진상 규명의 과제'란 제목의 글에서 "세입자가 권리를 깨닫는 순간 폭력에 직면하게 되고, 권리를 모르거나 알고도 포기하면 개발사업의 마지막 단계가 마무리되는 것"이라고 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많은 세입주들이 이제는 자신이 운영하는 가게에 "쫓겨날 수 없다"는 펼침막을 내걸고 있다. 그리고 폭력에 직면하는 업주들이 있다. 박흥숙 사건이 방화라는 폭력에서 비롯된 것처럼.
▲ 타버린 집터에 앉은 마을 주민지난 11월 원인 미상의 화재가 발생해 잿더미로 변한 강남 구룡마을에서 한 주민이 자신이 사용하던 집기들을 찾다 지쳐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 이희훈
박흥숙의 최후 진술에서 힘이 정하는 순서를 따르는 재개발에 대한 문제 의식이 읽히는 것은 그래서 어쩌면 자연스럽다. 동시에 안타까운 일이다. 아직도 1970년대 사건에서 자유롭지 못한 지금의 현실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니 말이다. 자신을 '무등산 타잔'이란 괴물로 만든 시대에 대한 분노가 담겨 있는 그의 최후 진술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나는 무등산 덕산골에 살며 77년 4월 28일 철거반 공무원 피습 사건의 주인공으로 '한국판 이소룡', '무등산 독수리', '무등산 타잔' 등등 수많은 악의 대명사를 걸머진 그야말로 끔찍하고 흉악무도한 살인마로 알려진 박흥숙이다."
*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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