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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뒤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죽음의 자각, 진짜 삶의 시작

[리뷰] 영화 <이웃집에 신이 산다>가 보여주는 발칙한 전복

등록|2015.12.27 15:43 수정|2015.12.28 10:29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편집자말]
지금보다 나이가 어릴 때는 명동 같은 곳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사람을 만나면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치기 어리게 합장을 하고 "옴~마니밧메훔! 사바하사바하! 훠이훠이~!"라고 장난을 걸었다. 그것도 재미가 없어지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오심즉여심! 곧 있으면 후천개벽!"이라고 소리쳐 전도하던 아저씨에 맞섰다. 아저씨가 화가 나서 커다란 십자가를 머리 위로 치켜들고 쫓아오면 "폭력지옥! 평화천국!"이라고 큰 소리로 떠들어대며 힘껏 내뺐다.

세상은 언뜻 보아도 절대 조화로워 보이지 않았다. 신이 계신다면 세상을 이런 형태로 둘 리 만무했다. 종교에 묘한 반발심 같은 게 자리했다. 특히 유일신을 내세우는 종교에 대한 감정이 더 그랬다. 아무래도 <이웃집에 신이 산다>의 감독 자코 반 도마엘은 그 정도가 나 같은 보통 사람보다 훨씬 심했나 보다. 하필이면 크리스마스이브에 개봉한(국내개봉일 선정은 신의 한 수!) 이 영화에는 발칙하고 위태로운 설정이 크리스마스트리의 장식처럼 풍성하다.

영화는 "태초에? 태초라는 시간은 없다. 시작은 없다"라는 도발적인 내레이션으로 출발한다. 초장부터 기독교의 시간관에 역행한다. 이어서 등장하는, 가족에게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가부장이 신이란다. 늘 술과 담배에 절어있고 아내와 딸에게 호통을 치거나 매를 들기 일쑤다. 요즘 유행하는 말인 '개저씨' 그 이상이다.

▲ 영화 <이웃집에 신이 산다>에서 신의 딸로 등장하는 에와. 아버지 신의 방을 엿보며 인류의 구원을 위한 탈출을 결심하고 있다. ⓒ (주)엣나인필름


이 고약한 아저씨, 신(브누와 뽀엘부르드 분)의 유일한 낙은 자신이 만든 인간을 괴롭히는 것이다. 폭군 아버지의 패악에 반기를 든 아들 JC(Jesus Christ의 약자)는 집을 나갔다가 작은 조각상이 되었다. 오빠를 따라 세상을 구원하려는 딸 에와(필리 그로인 분)는 지구에 사는 모든 인간에게 남은 수명을 휴대전화 메시지로 전송하고는 집을 나선다. 그렇게 이 전복적인 이야기는 급물살을 탄다.

인간을 괴롭히는 신과 인간을 구원하려는 신의 딸

에와가 보낸 '남은 수명 문자'에 세상은 발칵 뒤집힌다. 자기가 죽을 날을 알게 된 사람들은 혼란에 빠진다. 남은 시간을 허투루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제 '지금 여기'를 산다. 개인만 변한 것이 아니다. 국가 간 전쟁의 포화도 멈춘다. 신은 진노한다. "사람들이 죽을 날을 몰라 우리말을 듣는 것!"이라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에와는 조각상이 된 오빠 JC의 조언에 따라 새로운 신약성서(영화의 원제이기도 한 'The Brand New Testament')를 쓰려고 여섯 명의 사도를 찾아 나선다. 여섯 명의 사도는 사회의 소수자에 해당하는 존재이다. 한쪽 팔이 없는 여성, 진짜 꿈과는 무관한 "알량한" 사회생활에 인생을 저당 잡힌 채 사는 중년의 회사원, 포르노에 미친 성도착증 청년, 남편과 사랑 없는 일상을 사는 늙은 여자, 킬러,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어린 소년이다.

여섯 명의 사도는 신의 딸 에와의 도움으로 자기만의 음악을 듣게 된다. 에와에 따르면 인간은 모두 자기만의 음악을 가지고 태어난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소명이다. 소명을 알게 된 이들은 상처로 얼룩진 과거의 자기 자신과 화해한다. 팔이 잘린 여자가 자신의 잘린 손과 악수하거나 킬러가 거울 속의 자기 자신과 뜨겁게 포옹하는 식이다.

사도들과 고릴라의 모습네 명의 사도와 성도칙증 사도의 여자친구 그리고 고릴라가 여섯 번째 꼬마 사도와 신의 딸 에와를 바라보고 있다 ⓒ (주)엣나인필름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단순하면서 심오하다. 감독은 신의 딸 에와의 입을 빌려 "죽음 뒤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천국은 여기예요"라고 말한다. 내세는 없다. 니체가 말했듯 저 세계를 위해 이 세계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선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밤하늘의 어둠이 깊을수록 별이 빛나듯 죽음에 대한 엄정한 응시가 우리 삶을 선명하게 한다. 죽음과 진짜로 직면해야 마침내 인간은 오늘을 산다. 지금 여기를 살 때 기만적인 윤리나 이데올로기도 비로소 발붙일 수 없게 된다.

"죽음 뒤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천국은 여기예요"

영화는 가부장으로 상징되는 남성적, 수직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으로 읽히기도 한다. 영화에서 세상의 대혼란을 구원하는 이는 남신에게 주눅이 들어 쥐죽은 듯 조용히 지내던 아내 여신(욜랜드 모로 분)이다.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지구에 내려와 여섯 사도에게 소소한 기적을 행하는 이는 딸 에와다. 에와와 꼬마 사도가 빌딩을 수직으로 걸어 올라가는 모습은 중력이 수평으로 작용한다는 설정이다. 수직적 세계관에 대한 수평적 세계관의 승리로 보인다.

그 외에도 여러 도발적인 상상이 영화 곳곳에 수놓아져 있다. 꼬마 소년 사도는 죽기 전에 여자가 되고 싶어 한다. 늙은 부인 사도는 고릴라와 사랑에 빠져 동거한다. 남성인 킬러 사도는 사랑에 빠진 후 임신하여 만삭이 된다. 에와가 꼬마 사도와 놀이터에서 회전 기구에 올라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나 여신이 턴테이블에 LP판을 돌리며 손쉽게 세상을 구원하는 장면에선 니체의 영원회귀(Ewige Wieder-Kunft) 개념을 떠올릴 수 있다.
   
"인생은 스케이트장이야. 수많은 사람이 넘어지거든" "그의 목소리는 30명이 동시에 호두를 까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는 대리석에 흩뿌려지는 진주 같은 웃음이 필요했다" "엄마의 시선은 쏟아진 압정 상자를 보는 듯 난감했다" 등의 영화 속 비유적 대사는 김애란의 소설을 읽는 것처럼 청신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OST로 흐르는 헨델과 슈베르트 등의 음악은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관객들의 귀를 즐겁게 한다.

▲ 영화 <이웃집에 신이 산다>의 공식 포스터 ⓒ (주)엣나인필름


반면 발칙한 도입부에 비해 뒤로 갈수록 유머가 약해지고 식상해지는 점은 다소 아쉽다. 신의 딸 에와가 여섯 사도와 만나 차례로 벌이는 에피소드도 지루한 면이 있다. 무엇보다 작품에 '전체적으로 보이는 기운'이 어떤 이들에게는 매우 불편했을 것 같다.

하지만 IS의 폭탄테러 등 잘못된 믿음이 낳은 비극이 세상을 떨게 하고, 내일의 불확실한 보상을 위해 확실한 오늘을 희생하는 것이 일상화된 시대를 사는 오늘날 이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 의미가 있다. 이 불확실한 세계에서 죽음만큼 확실한 미래도 없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Sein Zum Tode)이다. 우리는 사실 모두 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셈이다. 살아있는 동안 다른 누구의 인생도 아닌 자신의 삶을 힘껏 살아야 한다. "죽음 뒤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천국은 여기예요." 영화가 전하는 한마디 아포리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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