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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간 엄마가 가족에게 미안함을 표하는 법

[다섯언니의 오키나와 가출여행기 3편] '아무것도 안 하려고 온 여행', 그런데 쇼핑 시간이...

등록|2016.01.05 18:32 수정|2016.01.05 18:32
"우리 오늘 뭐 할까?"

K언니가 아침에 우리를 모아 놓고 이야기를 꺼냈다. 일본을 가장 많이 가봤고, 일본어가 되는 K언니가 모든 일정과 예산을 담당하고 있었다. 기상 악화로 하루 앞당겨 나하시에 왔기 때문에 일정을 갑작스럽게 바꿔야 했다. 혼자 다니는 여행이면 내 마음대로 변경하면 되지만, 다섯 명이 움직이는 거라 다같이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원래는 K언니가 짜 놓은 일정에는 슈리성을 갈 계획이었지만, 여러 가지 가능성을 두고 이야기를 나눴다. Y언니는 오키나와까지 와서 '만자모'(万座毛)를 못 가보면 아쉬울 것 같다고 했다. 이동하는 거리가 멀어서 고민했지만 결국 만자모로 가기로 했고, 돌아와서는 피로를 풀 수 있는 온천을 가기로 했다. 

우리는 뚜벅이 여행이라 버스를 타고 만자모를 갔다. 일본에서 버스를 타는 것은 또 다른 체험 같았다. 일본 버스는 출입구가 앞에 하나만 있다. 그 이유는 내릴 때 버스 기사에게 버스 요금을 정산하고 나가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버스를 타면 앞에서 번호표를 뽑고 탄다. 그 번호표는 버스를 탄 지점을 말한다. 그 지점 번호가 전광판에 뜨고 일정 구간을 지날 때 금액이 올라간다. 내릴 때는 전광판을 보고 해당하는 번호의 금액을 버스기사에게 주고 내리면 된다. 일본에서 버스 요금은 비싸지만, 오키나와의 인기 코스인 '아메리칸 빌리지' '류큐무라 민속촌' '국제거리'를 다 갈 수 있으니 한 번 정도는 버스 여행을 떠나 보는 것도 추천한다. 

▲ 오키나와에서 버스타고 여행하기 ⓒ 이애경


만자모는 침식작용으로 절벽에 코끼리 코 모양의 바위가 만들어진 국립공원으로 바위 위에는 널찍한 들판이 있다. 그 들판에 만 명은 족히 앉을 수 있다고 해서 만자모로 불리운다. 바다와 절벽이 이루는 광경도 멋있지만, 만자모는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 촬영지로 더 유명해진 곳이다. Y언니도 이 드라마를 보고 가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드라마처럼 걸어다닐 순 없었지만

▲ 만자모 ⓒ 이애경


만자모에 도착하니 관광버스가 주차장에 가득했다. 역시나 관광지라서 그런지 외국인들도 많았다. 드라마의 모습만 기대하고 만자모를 가면 실망할 수도 있다. 만자모 위 들판은 출입금지라 드라마 주인공처럼 만자모 위를 돌아다닐 수는 없다. 멀리서 사진을 찍는 걸로 만족을 해야 한다.

그렇지만 카메라 렌즈 쏙 만자모의 모습을 보면 그 아쉬움은 저 멀리 날라 간다. 바다와 푸른 들판, 이색적인 코끼리 코 바위의 조화가 마치 유명한 작가의 조각 작품을 보는 것 같다. 자연이 만들어주는 조각품.

▲ 만자모 국립공원을 걷다가 절벽 부근에 다다르면 만자모를 볼 수 있다 ⓒ 이애경


"오길 잘 했다. 여기는 사진 찍기 좋은 코스네"

단체사진은 잘 찍지 않던 우리이지만, 바닷바람을 맞으며 만자모 앞에서는 계속해서 사진을 찍었다. 지나가는 한국인 부부에게 우리의 사진기를 맡겨서 단체사진을 찍기도 했다.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며 우린 만자모를 기억에 담았다.

만자모의 짧은 관광을 마치고 다시 나하시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멀미를 해서인지, 슬슬 느껴지는 여행의 피로인지 우리는 열심히 버스 창문에 머리를 박아가며 숙면을 취했다. 반짝반짝 네온사인이 빛나는 나하시로 버스가 들어서자 모두들 잠에서 깼다. 아침에 온천으로 여행을 마무리하기로 했었기에 나하시에 도착해서의 이동 경로를 정하자고 K언니가 제안을 했다. 하지만 막상 이야기를 나눠보니 모두가 온천을 가는 것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대중목욕탕을 간 지 30년도 지난 것 같아. 나는 숙소에 있을게. 다녀와."
"쇼핑을 더 하고 싶은데…. 아기들 약도 좀 사고 싶고."
"나는 어디든 상관없지만 다 같이 이동했으면 좋겠어."


좀처럼 의견이 모아지지 않았다. 결국 온천을 가는 계획을 접고, 일단은 국제거리에서 내렸다. 만자모를 다녀오니 훌쩍 시간이 지나 저녁시간 때가 되서 우린 먼저 식사를 하기로 했다.

싱싱한 스시를 먹고 싶다는 나의 제안에 따라 우린 국제거리 옆 마키시 공설시장으로 갔다. 지나가다 시장 상인에게 물어보니 근처 수산시장을 알려주었다. 노량진 수산시장처럼 직접 해산물을 보고 살 수 있는 곳이었다. 우린 수산시장 근처 가게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메뉴판을 보니 생각보다 가격이 꽤 나갔다.

"어떡할까? 회 정식이 있는데 가격이 꽤 나가네."
"먹어요. 마지막 밤이니까 먹고 싶은 거 맘껏 먹어요."


오키나와에서의 회 정식

▲ 오키나와에서 먹은 회정식. 1인 1500엔정도. 스시는 그날 가장 싱싱한 것으로 올라온다고 한다. ⓒ 이애경


우리는 여행 중 처음으로 호화로운 식사를 즐겼다. 회 정식은 생각보다 담백하니 맛있었다. 크게 배는 부르지 않았지만 섬나라에서 회를 먹는 것 만으로도 만족했다. 그리고 우린 여행의 피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자꾸만 우리의 대화는 식당 옆 테이블에서의 큰소리 때문에 끊겼다. 테이블에는 여러 술병이 놓아져있는 걸로 보아서는 일본인 청년들이 친구들과 술 한잔 하는 것 같았고, 건하게 취한 상태 같았다. 그런데 어찌나 목소리가 큰지 시선이 갔다.

"뭐야. 일본 사람들도 저렇게 크게 떠드네."
"그러게 다들 조근 조근 말하는 줄만 알았는데."


사실 아침에 버스 타러 이동할 때 사건이 있었다. 길에서 크게 떠들고 웃는 것이 혹시나 주변에 방해가 될까봐 K언니는 조심하자고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게 서운했던 언니들이 일본까지 와서 길에서 눈치를 봐야 하냐고 한번 터트렸었다. 그 일로 약간의 썰렁한 기운이 있었는데, 식당에서 크게 떠는 일본인을 보고 우린 약간의 시원함을 느꼈다.

식사를 마치고 오키나와에서 밤거리가 가장 화려한 국제거리로 나갔다.

"우리 아기 아토피 있어서 걱정인데, 흉 안 지게 하는 연고가 있다고 하네."
"나는 우리 막내 딸 줄 가루쿡(만들어 먹는 과자) 사야 하는데."


▲ 야자수 나무로 이색적인 낮의 국제거리. 국제거리는 낮부터 밤 10시까지 화려하다. ⓒ 이애경


언니들은 엄마 없이 4일을 버터야 하는 아이들에게 나름 달콤함 거래를 한 것 같았다. 아이들이 평소에 갖고 싶었던 장난감을 사가지고 올 테니 아빠 말 잘 듣고 있어야 한다는 거래. 그래서 각자 아이들이 원했던 물건을 찾느라고 국제거리를 많이 헤집고 다녔다.

국제거리는 쇼핑 천국이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고가의 수공예품부터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면세 쇼핑물인 돈키호테(ドン.キホ-テ), 캐릭터 쇼핑몰 하피나하(HAPINAHA) 등 다양한 샵들이 거리에 가득했다.

▲ 밤의 국제거리와 대형 쇼핑몰 돈키호테. 돈키호테는 5천엔 이상 구입시 세금을 환급해주는 혜택이 있다. ⓒ 이애경


돈키호테 쇼핑몰은 최저가 면세 쇼핑몰로도 유명하지만 지하층 드럭스토어(Drugstore)도 유명하다. 일본의 다양한 의약품을 파는 곳으로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돈키호테에서 사야할 것'이라고 검색을 하면 인터넷에서 쉽게 리스트를 볼 수 있을 정도로 한국에서도 유명한 품목들이 많다.

왜 자기 것은 안 사나요?

▲ 드럭스토어에서 구경을 하자면 하루종일도 할 수 있을 만큼 품목이 다양하다 ⓒ 이애경


우린 흩어져서 각자 쇼핑을 하고, 근처 카페에서 일정 시간이 되면 만나기로 했다. 오랜 쇼핑 시간으로 지친 K언니와 나는 카페에 앉아 나머지 언니들을 기다렸다. 모두 한자리에 모이자 어떤 것을 샀는지 이야기를 나왔다.

남편이 트레일 관련 일을 해서 발이 피로할 때가 많다고 발 순환에 좋은 패치를 사온 언니부터, 가족들과 나눠 먹을 생초콜릿을 한 보따리 사온 언니, 평소에 딸아이가 좋아하던 캐릭터 인형을 사온 언니까지….

내가 쓸 것, 내가 갖고 싶은 것을 고르기에 여념이 없는 나와는 다르게 언니들은 가족들에게 줄 것을 잔뜩 사가지고 왔다.

"왜 자기들 것은 안 사?"

K언니가 한마디 했다. 언니들은 별로 갖고 싶은 것이 없다고 했다. 같이 나누어 먹을 것을 샀으니 괜찮다고. '자기를 위한 선물, 한 가지씩이라도 사면 좋았을 텐데….' 이렇게 멀리 여행까지 왔는데 가족들 생각만 하는 언니들을 보자니 안쓰럽기도 했다.

언니들은 여행 내내 혼자만 여행 와서 가족들에게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다음번엔 가족들과 같이 오고 싶다고. 이번 오키나와 여행이 언니들에게는 처음으로 오직 자기만을 위한 여행이라는 것, 그래서 더 특별하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이번 여행이 수고한 '엄마', '아내' 그리고 '자신'에게 주는 선물인데, 당당하게 선물을 받지 못하는 언니들을 보자니 속상했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지금 여기 오키나와에서 우린 즐겁게 밤을 보내고 있다. 가족을 두고 혼자만 가는 것은 미안하다고 여행에 같이 못 간 언니들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염려들을 놓고 우린 떠났다. 그런 점들을 생각하면 여기 오키나와에 있는 이 언니들, 참 많은 용기를 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번 여행을 마무리하며 나는 언니들에게 말하고 싶다.

"언니들, 떠나온 것에 가족들에게 미안해하지 말아요. 그리고 우리 당당하게 이 선물을 누려요. 그것이 지금의 여행이든, 현재의 삶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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