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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 못 하는 선생님, '캘리그라피' 하는 사연

[로또교실⑤] 아이를 키워 학교에 보내는 모든 부모님께 감사드리며

등록|2016.01.15 17:55 수정|2020.01.02 13:46

▲ 야매라고 인정하니 부끄러움이 사라진다. ⓒ 이준수

붓도 못 쥐는 초등학교 선생이 있을까? 예스! 바로 나, 7년(군대 빼면 5년)이나 선생을 해놓고도 1년에 한 번씩 미술에 서예라도 나오면 땀을 흘리는 선생이 되겠다. 애들 앞에서 시범을 보여야 하는 선생으로서는 서예는 참으로 곤란한 영역이다. 곤란해지면 피하고 싶고, 피할 수 없게 되면 싫어지게 된다.


나는 언제부터 서예가 싫었을까? 사연을 들어보자.


2008년도 임용시험을 치를 때 학원 문제집에서 단구법·쌍구법을 입이 닳도록 외웠다. 서예를 잘 쓰지는 못해도 예시 작품들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열심히 서예 작품들을 사랑했건만(!) 정작 임용시험에는 관련 내용이 나오지 않아 배신감을 느꼈다. 열렬한 사랑의 결과가 늘 '그린라이트'일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런 치졸한 이유로 인해 우리 반 학생들의 서예 수업 시간 질은 다른 반에 비해 떨어졌으리라 여겨진다.


그러던 중 갑자기 말과 글에 흥미가 생기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전혀 엉뚱한 사건 때문이었다. 아기의 옹알이!


 

▲ 부모는 아기의 모든 음성을 언어로 해석한다. ⓒ 이준수

2015년 8월 18일, 아이가 태어났다. 아기가 발가락만 꼼지락거려도 신기하고 놀라웠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입으로 먹고 빨고 우는 것 이외에 옹알이를 하기 시작했다. 오~ 놀라워라! 아기가 언어 같은 것을 쓰려고 하다니 과연 인간의 자식이로구나.


"에음마"

"그래 그래, 엄마라고! 방금 엄마라고 분명히 그랬어. 이건 기적이야!"
"에우으ㅁ..."


"거봐! 내가 뭐랬어? 자기한테 엄마라고 했다고!"

아기가  동물울음소리에 가까운 음성을 내어도 부모의 욕심 많은 귀를 거치면 모두 완벽한 단어가 돼 들렸다.


출산 휴가가 끝나고 학교에 돌아간 날 나는 우리 반에 앉아있는 15명의 언어영재들을 봤다. 쉼 없이 말하는 그들의 수다력과 말꼬리를 잡으며 재미지게 놀이를 하는 유창함은 분면 언어영재의 특징이었다.


'내가 지금껏 아이들의 목소리에 이렇게 귀 기울인 적이 있었던가... 이 녀석들 우리 딸이랑 10살밖에 차이 안 나는데 대단하네.'


집에서 금이야 옥이야 키워졌을 모습들을 생각하니 아이들이 새삼스레 느껴졌다. 귀가 떨어져 나갈 만큼 떠드는 아이들의 말이 부모님들에게는 천사의 나팔소리 같았겠지. 그 부모님들이 비싼 세금내서 보석 같은 요놈들을 내게 보내셨다.



내게는 아이들의 몸짓 하나, 말 한 마디, 글 한 토막을 소중히 다룰 의무가 있다. 그래서 아이들의 언어와 시간들을 기록하기로 했다. 워드프로세서로 타이핑하기에는 말 뽄새와 감각이 너무 세서 붓으로 그리기로 했다(감히 서예도 못하는 주제에 쓴다는 표현을 사용하면 불손한 듯해 그린다는 단어를 골랐다).


캘리그라피를 배운 적 없고, 잘 하지도 못하고, 기본도 없다. 야매로 닥치는 대로 아무 재료나 가지고 단원평가 이면지에 써가면서 한다. 준비물은 귀와 눈이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도구로 아이들을 기억하고 싶다. '야매캘리'는 현재까지 진행형이다. 앞으로도 쭉 그럴 거다.
 
덧붙이는 글 다음카카오에서 서비스하는 브런치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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