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드축제로 유명한 보령엔 성주사지도 있다
백제의 멸망을 기억하는 성주사지... 근처 짬뽕도 별미
충청남도 보령의 성주면에 있는 성주산은 높이 680m에 불과하지만 선(禪)과 선(仙)의 규모를 이루고 있는 산이다. 기암으로 이루어진 산세 때문에 그 기세가 남다르다. 이 산을 성주산이라고 부르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신라 태종 무열왕의 8세손인 무염(無染)이 당나라로 가서 오랜기간 수행한 뒤 귀국하여 이 산에 있는 오합사(烏合寺)에서 입적하였는데 성승(聖僧)이 살았던 절이라 하여 성주사(聖住寺)라 부르고, 그 산의 이름을 성주산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백제 법왕때 창건한 오합사가 성주사로 불리웠으나 그 성주사는 지금 남아 있지 않고 사찰이 있었다는 흔적만이 남아 있기에 성주사지라고 부른다. 총 5120여 자의 긴 비문이 이곳에 빼곡히 적혀져 있다. 무염대사가 성장하고 출가한 후 중국에서 30여 년간 유학하여 공부하는 과정과 성주사를 창건하게 된 과정도 같이 기록되어 있다.
예전에 왔을 때 이 비석은 복원하기 위해 작업 중이어서 보지를 못했다. 무려 1000여 년의 세월 동안 이 자리에서 성주사가 있었다는 것을 알리며 성주산 기슭에 있어 왔다. 성주산은 보령시가 매년 해넘이 및 해돋이 행사를 여는 곳이다. 그만큼 보령의 진산으로 자리잡아 온 지가 오래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기초라고 말할 수 있는 주춧돌은 과거에는 건물의 기초를 튼튼히 하기 위해 기둥 밑에 꼭 넣어야 하는 중요한 돌이었다. 주로 석재가 많이 쓰이는데 기둥 위의 무게를 견디도록 땅을 다지거나 입사 기초를 한다. '주춧돌이 되라'라는 의미는 큰 재목감이 되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성주사지 석등은 통일 신라 말기에 세운 것으로 사진으로 보면 알겠지만 지붕돌에 비해 등불을 두는 화사석과 밭침기둥이 가늘게 만들어졌다. 파괴되었던 것을 근래 수습하여 복원해두었다. 높이는 220cm이다. 석등은 등불을 안치하는 공양구의 하나로 불교에서는 등불을 밝히는 것을 공양중에 으뜸으로 하고 있다. 등불을 안치하는 화사석은 사찰마다 조금씩 형태가 다르지만 사각형, 육각형, 팔각형이 대부분이다.
성주사지 석불의 얼굴 모양은 타원형으로 세월의 흔적을 이기지 못하고 심하게 풍화되었다. 왼쪽 귀는 없어진 상태였고 코 부분 일부만 시멘트로 보수한 상태이다. 오른손을 내리고 왼손을 들어 배에 대고 있는 형태이나 손은 없어졌다. 고려 후기부터 조선시대 사이에 민불로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형태에서 보듯이 소박한 느낌의 불상이다.
성주사지의 중심에 위치했을 것으로 보여지는 성주사지 5층 석탑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이 있다. 통일신라 후기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는 석탑의 일부 양식에는 백제의 흔적도 보여진다. 지금은 사라진 사찰이 있었던 터를 의미하는 사지는 옛 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지로 가장 잘 알려진 곳은 왕궁리 미륵사지와 신라의 황룡사지로 동양 최대의 가람으로 알려져 있으나 아쉽게도 사지로만 남아 있어 기록이 미미하다.
한적하고 조용한 마을에 위치한 성주사지이지만 고요한 가운데 기세가 느껴진다. 성주산의 정기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겨울의 쓸쓸한 느낌보다 따뜻하게 다가온다. 세상에는 영원한 것은 없다. 우리는 삶을 살면서 수없이 만나고 헤어진다. 우주의 시간으로 볼 때 인간의 생명은 티끌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삶 역시 우주의 일부를 채워나가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혼자 사색에 잠겨 걷다보니 어느새 배가 고파졌다. 점심시간에 가면 30분 이상을 줄서서 먹는다는 이 중국집은 보령에서는 가장 유명한 짬뽕을 만드는 집이다. 고명으로 적지 않은 돼지고기와 오징어가 올려져 있어서 섭섭하지가 않다. 국물은 담백하면서도 자극적이지 않다.
성주산은 자연휴양림과 편백나무 숲때문에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모란꽃 모양의 명당이 8곳이나 있다는 성주산에는 화장골이 있고 그 골짜기에는 물이 흐른다. 성주산의 기슭에 자리한 성주사지는 한때 2000여 명이 거주할 정도로 큰 사찰이었다. 성주사의 전 이름이었던 '오합사'에는 슬픈 이야기가 전해진다. 백제 멸망을 슬퍼하며 흰 말이 울어 나라 잃은 슬픔을 대신했다는 이야기다.
▲ 낭혜화상탑비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 최홍대
백제 법왕때 창건한 오합사가 성주사로 불리웠으나 그 성주사는 지금 남아 있지 않고 사찰이 있었다는 흔적만이 남아 있기에 성주사지라고 부른다. 총 5120여 자의 긴 비문이 이곳에 빼곡히 적혀져 있다. 무염대사가 성장하고 출가한 후 중국에서 30여 년간 유학하여 공부하는 과정과 성주사를 창건하게 된 과정도 같이 기록되어 있다.
▲ 복원된 비최치원이 지은 글 ⓒ 최홍대
예전에 왔을 때 이 비석은 복원하기 위해 작업 중이어서 보지를 못했다. 무려 1000여 년의 세월 동안 이 자리에서 성주사가 있었다는 것을 알리며 성주산 기슭에 있어 왔다. 성주산은 보령시가 매년 해넘이 및 해돋이 행사를 여는 곳이다. 그만큼 보령의 진산으로 자리잡아 온 지가 오래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 주춧돌성주사지의 주춧돌 ⓒ 최홍대
지금으로 말하면 기초라고 말할 수 있는 주춧돌은 과거에는 건물의 기초를 튼튼히 하기 위해 기둥 밑에 꼭 넣어야 하는 중요한 돌이었다. 주로 석재가 많이 쓰이는데 기둥 위의 무게를 견디도록 땅을 다지거나 입사 기초를 한다. '주춧돌이 되라'라는 의미는 큰 재목감이 되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 석등성주사지 석등 ⓒ 최홍대
성주사지 석등은 통일 신라 말기에 세운 것으로 사진으로 보면 알겠지만 지붕돌에 비해 등불을 두는 화사석과 밭침기둥이 가늘게 만들어졌다. 파괴되었던 것을 근래 수습하여 복원해두었다. 높이는 220cm이다. 석등은 등불을 안치하는 공양구의 하나로 불교에서는 등불을 밝히는 것을 공양중에 으뜸으로 하고 있다. 등불을 안치하는 화사석은 사찰마다 조금씩 형태가 다르지만 사각형, 육각형, 팔각형이 대부분이다.
▲ 석불성주사지 석불입상 ⓒ 최홍대
성주사지 석불의 얼굴 모양은 타원형으로 세월의 흔적을 이기지 못하고 심하게 풍화되었다. 왼쪽 귀는 없어진 상태였고 코 부분 일부만 시멘트로 보수한 상태이다. 오른손을 내리고 왼손을 들어 배에 대고 있는 형태이나 손은 없어졌다. 고려 후기부터 조선시대 사이에 민불로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형태에서 보듯이 소박한 느낌의 불상이다.
▲ 5층석탑성주사지 5층석탑 ⓒ 최홍대
성주사지의 중심에 위치했을 것으로 보여지는 성주사지 5층 석탑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이 있다. 통일신라 후기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는 석탑의 일부 양식에는 백제의 흔적도 보여진다. 지금은 사라진 사찰이 있었던 터를 의미하는 사지는 옛 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지로 가장 잘 알려진 곳은 왕궁리 미륵사지와 신라의 황룡사지로 동양 최대의 가람으로 알려져 있으나 아쉽게도 사지로만 남아 있어 기록이 미미하다.
▲ 성주사지터만 남아 있는 성주사 ⓒ 최홍대
한적하고 조용한 마을에 위치한 성주사지이지만 고요한 가운데 기세가 느껴진다. 성주산의 정기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겨울의 쓸쓸한 느낌보다 따뜻하게 다가온다. 세상에는 영원한 것은 없다. 우리는 삶을 살면서 수없이 만나고 헤어진다. 우주의 시간으로 볼 때 인간의 생명은 티끌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삶 역시 우주의 일부를 채워나가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 짬뽕보령 황해원의 맛 ⓒ 최홍대
혼자 사색에 잠겨 걷다보니 어느새 배가 고파졌다. 점심시간에 가면 30분 이상을 줄서서 먹는다는 이 중국집은 보령에서는 가장 유명한 짬뽕을 만드는 집이다. 고명으로 적지 않은 돼지고기와 오징어가 올려져 있어서 섭섭하지가 않다. 국물은 담백하면서도 자극적이지 않다.
성주산은 자연휴양림과 편백나무 숲때문에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모란꽃 모양의 명당이 8곳이나 있다는 성주산에는 화장골이 있고 그 골짜기에는 물이 흐른다. 성주산의 기슭에 자리한 성주사지는 한때 2000여 명이 거주할 정도로 큰 사찰이었다. 성주사의 전 이름이었던 '오합사'에는 슬픈 이야기가 전해진다. 백제 멸망을 슬퍼하며 흰 말이 울어 나라 잃은 슬픔을 대신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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