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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미련을 버린 화순옹주의 죽음

등록|2016.01.19 20:46 수정|2016.01.19 20:46
영조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것으로 알려진 화순옹주(1720~1758)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당찬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은 비극에 가까웠다. 충남 예산에 있는 화순옹주 홍문은 그녀의 사후에 정조가 1783년에 열녀문을 세우면서 그녀의 죽음을 조금이나마 애도해주는 공간으로 자리했다.

화순옹주는 영조와 후궁인 정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딸로, 언니는 그녀가 태어나기 전에 죽었고 영조의 첫 아들인 효장세자는 여섯 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불과 9살의 나이에 요절했다. 화순옹주의 어머니인 정빈 이씨는 화순옹주를 낳고 나서 이듬해에 병으로 죽었으니 그녀가 의지할 곳은 아버지인 영조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궁궐 생활을 하던 화순옹주는 1732년에 영의정 김홍경의 아들인 김한신과 백년 가약을 맺으며 다시금 안정을 되찾는다. 그러나 화순옹주는 불임으로 둘 사이에 자식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성위 김한신과 화순옹주는 행복한 부부생활을 영위했다고 한다.

세상에 없을 것 같은 행복은 39살의 젊은 나이에 김한신이 죽자 세상에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었던 화순옹주는 14일을 굶어 남편의 뒤를 따르게 된다. 이때 영조가 음식을 먹으라고 간절히 권했으나 이를 따르지 않아 영조는 불효라 여겨 열녀문조차 내리지 않았다.

화순옹주 홍문충남 예산에 위치한 화순옹주 홍문 ⓒ 최홍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된 화순옹주 홍문에는 건물터만이 남아 있는 상태이다. 화순옹주는 기댈 혈육도 없었고 김한신이 죽자 가족이 해체되는 불행한 경험을 다시하게 되면서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가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남부러울 것 없는 왕실에서 태어났지만 실상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재산이나 지위가 아닌 따뜻한 말 한 마디 건넬 수 있는 가족이었다.

월성위 김한신묘두 부부가 합장된 무덤 ⓒ 최홍대


화순옹주 옹문 바로 옆에는 월성위 김한신과 화순옹주가 함께 묻힌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죽어서 함께 할 수 있었던 그들은 지금은 평안함을 느낄수 있을까. 어릴 때부터 죽음에 익숙해져 있던 그녀는 그 어떤 것도 남편의 빈자리를 대신해줄 수는 없었다.

특히 화순옹주의 부군인 월성위 김한신은 일찍이 사도세자와 관계가 안 좋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한신은 노론이었지만 당파에 치우치지 않았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세자는 노론이라는 사실만으로 그를 배척했을 가능성도 있다.

39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를 조선왕조실록(43집)에는 다만 "김한신이 卒하였다…어찌 한 병으로 효험이 없을 것을 뜻하였겠는가"라고 기록하고 있다.

화순옹주를 기리다좌측에 위치한 화순옹주 홍문과 주차장 ⓒ 최홍대


사실 화순옹주의 불행은 그녀만의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화순옹주의 아버지 영조 역시 행복하다고 볼 수만은 없다. 영조의 맏아들인 효장세자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그를 잃게 된 주된 요인이 소론과 남인에게 있다고 믿었다.

남인과 소론일파는 궁녀인 순정을 이용해 정빈 이씨와 효장세자를 저주하였고 화순옹주 역시 홍역에 걸렸을 때 순정이 몰래 독약을 먹여 죽이려 했다. 이는 영조와 화순옹주 둘 다 마음 속에 깊은 생채기를 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통해 노론 일파의 당색을 조정하여 이미지 쇄신을 노렸으나 뿌리깊게 박혀 있던 트라우마를 지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의 트라우마는 딸인 화순옹주나 아들인 사도세자에게 전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남편이 죽고 그 빈자리를 채우지 못한 화순옹주가 1758년에 세상을 떠나고 불과 4년 뒤인 1762년에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었다.

과거의 사례로 볼 때 부모는 자식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은 재산이나 자리가 아니라 건강한 정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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