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팔' 보라가 부른 운동권 노래 작사·작곡가 30년 만에 찾았다
민중가요 '동지' 작사·작곡가 박철환씨... 5·18기념재단이 발굴
▲ 80년대 민중가요집 '동트는 산하'에 실린 '동지'. 당시엔 작자 미상으로 알려졌으나, 수소문 끝에 최근 박철환 씨로 밝혀졌다. ⓒ 이돈삼
휘몰아치는 거센 바람에도/ 부딪쳐 오는 거센 억압에도/ 우리는 반드시 모이었다 마주 보았다/ 살을 에는 밤 고통 받는 밤/ 차디찬 새벽 서리 맞으며 우린 맞섰다/ 사랑 영원한 사랑 변치 않을 동지여/ 사랑 영원한 사랑 너는 나의 동지
세상 살아가는 동안에도/ 우리가 먼저 죽는다 해도/ 그 뜻은 반드시 이루리라 승리하리라/ 해방 되는 날 통일 되는 날/ 희망찬 내일 위해 싸우며 우린 맞섰다/ 투쟁 영원한 투쟁 변치 않을 동지여/ 투쟁 영원한 투쟁 너는 나의 동지
1980년대 중반 대학가에서 많이 불렀던 민중가요 '동지'의 노랫말이다. 5월이면 광주 성지순례에 나섰던 대학생들을 통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이후 농민운동이나 노동운동 등 사회운동 현장에서도 많이 불려졌다. 지금도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애창되고 있다.
지난 30년 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이 노래의 작사·작곡가가 밝혀졌다. 지난해 12월, 5·18기념재단이 민중의 노래를 발굴해 음반으로 제작하는 과정에서다. 몇 달 동안 수소문한 끝에 찾아낸 작사·작곡가는 전남대 전기공학과 85학번 박철환(50)씨였다.
박씨는 현재 나주에서 배 농사를 지으며, 나주신문의 편집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지난 6일 나주에서 박씨를 만나 민중가요 '동지'에 얽힌 얘기를 들어봤다.
▲ 박철환 씨가 80년대 중반의 대학가 상황과 민중가요 '동지'를 만들게 된 경위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지난 6일이다. ⓒ 이돈삼
▲ 박철환 씨가 나주신문의 기자, 명예기자들과 함께 얘기를 나누고 있다. 지난 6일 나주신문 사무실에서다. ⓒ 이돈삼
"통기타 하나로 만든 노랩니다. 목적의식을 갖고 노랫말을 쓰고, 곡을 붙인 게 아니고요. 그냥 기타 치면서 흥얼거리며 만든 노래예요. 대학의 같은 동아리 회원들과 같이 부르기 시작했고요. 데모할 때 다 같이 부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요."
박씨의 바람대로, 노래 '동지'는 당시 대학생들에게 많이 불려졌다. 단결 투쟁의 의지를 불태워주고, 따라 부르기도 쉽다는 이유였다. 전국의 대학가를 중심으로 퍼져 나간 것도 삽시간이었다.
"86년에 '동지'를 만들었는데요. 당시 학생운동의 노선 경쟁이 첨예했어요. 민족해방을 중심에 둔 자주파(NL)와 민중민주를 기치로 내건 평등파(PD)의 대립이었죠. 그날도 철야농성을 하는데, 선배들이 우리 동아리를 부르더라고요. '동지' 노래를 부르라고."
박씨가 만든 노래 '동지'가 동아리방을 나온 계기였다. 속내는 평등파를 향한 자주파의 시위였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우리의 노래도 있다는, 우월의식의 표출이었다는 게 박씨의 생각이다.
▲ 80년대 중후반 대학가를 중심으로 널리 불렸던 민중가요 '동지'의 악보. 도서출판 둥지에서 펴낸 민중가요집 '동트는 산하'에 실렸던 악보다. ⓒ 이돈삼
이후 '동지'는 전남대학교를 넘어 광주와 전남지역 대학으로 퍼져갔다. 서울의 한 여자대학교 학생들이 찾아와서 노래를 익혀간 뒤 서울까지 빠르게 퍼져나갔다. 이듬해엔 노동현장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다. 87년 6월 항쟁을 전후해선 전국 방방골골에서 울려 퍼졌다.
노래의 작사·작곡가는 '미상'이었다. '전남대학교의 어떤 학생이 만들었다더라'는 소문만 무성했다. 서슬 퍼런 시절인 탓에, 박씨도 드러낼 수 없었다. 다만 알음알음으로 학내에서만 회자됐다. 그래도 박씨는 뿌듯했다.
그 뒤 박씨는 휴학을 하고, 고향에서 군 복무를 했다. 군 복무를 마친 다음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바로 농민운동에 뛰어들었다. 80년대 후반 치열했던 나주의 수세(물세) 폐지 시위현장을 누볐다. 그의 노래는 농민운동 현장에서도 불려졌다. 그때부터 지금껏 나주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 박철환 씨가 만든 노래 '동지' 등 80년대 널리 불렸던 민중가요 100여 곡을 실은 '동트는 산하'의 표지. ⓒ 이돈삼
▲ 박철환 씨가 기타로 자신이 만든 노래 '동지'를 연주해 보이고 있다. 지난 6일 나주신문 사무실에서다. ⓒ 이돈삼
"기타를 어깨 너머로 배웠어요. 학원은 안 다녔고요. 중학교 때, 다세대 주택에 살았는데요. 옆방에 사는 고등학생 형이 기타를 잘 쳤어요. 그 형한테 배웠어요. 중·고등학교 때 사이먼앤 가펑클, 비틀즈, 올리비아 뉴튼 존에 빠져 지냈죠. 대학에 입학해서도 기타 치면서 대중가요를 곧잘 불렀어요."
박씨는 그때처럼 평범하게 살고 있다. 다른 게 있다면, 지역을 살기 좋은 고장으로, 사람 사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 주민들과 함께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역공동체를 복원하려는 노력도 꾸준히 하고 있다.
"결국은 시민이더라고요. 깨어있는 시민이요. 시민이 깨어있으면 지역이 깨어나고 바뀌어요. 나라도 바뀌고요. 깨어있는 시민과 함께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을 바꿔나가는데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어요."
언뜻 소박한 것 같으면서도 선 굵은 박씨의 포부다. 자신이 지은 노래 '동지'의 노랫말처럼 희망찬 내일을 위해서.
▲ 박철환(오른쪽에서 두번째) 씨가 박선재 나주신문 대표(맨왼쪽) 등 나주신문 가족과 함께 새해 첫 모임을 갖고, 떡케이크에 붙인 촛불을 끄며 박수를 치고 있다. 지난 6일 나주신문 사무실에서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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