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이후락 납치 첩보가 도평요 칩거 불렀다"
[발굴 11] '이후락 가신' 이동휘의 증언, HR 북한 납치설의 전말
박정희 유신정권의 몸통 중 한 명인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을 10여 년간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조카 이동휘를 만나 숨은 비화를 들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강행 등 유신이 부활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은 시점에서 '지피지기'의 관점으로 비화를 연재한다. - 기자 말
박정희 정권 시절 대통령 비서실장과 중앙정보부장을 지내며 유신정권 권력의 중심부에 있었던 이후락(아래 HR·존칭 생략)은 대한민국의 기득권들이 대부분 그렇듯 재계와 화려한 혼맥을 맺었다.
HR은 슬하에 4남 1녀를 뒀는데, 장녀가 당시 호남정유그룹 서정귀 회장의 며느리로 들어가면서 HR과 재벌이 사돈이 된 것. 서정귀는 박정희의 대구사범학교 동기생이기도 하다.
1979년 10·26에 이은 신군부의 12·12 군사정변으로 HR은 김종필 등 유신세력들과 함께 구금되고 부정축재자로 몰려 전 재산을 몰수 당한 후 권력에서 쫓겨나게 된다. 심신이 지친 HR은 요양차 사돈인 서정귀가 운영하는 경남 통영의 충무관광호텔에서 2여년 간 기거했다.
그동안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HR은 이 기간 북한으로부터 납치당할 수 있다는 첩보를 받아 거처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만 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북한에 의한 납치 첩보는 HR이 이후 30여년 간 경기도 광주의 도자기공장인 도평요에서 칩거하는 계기가 됐다. 다음은 이동휘의 증언이다.
"12·12 이후 신군부로부터 축출된 HR은 사돈이 운영하는 충무관광호첼에서 2년 정도를 기거하고 있었다. (서정귀가 1971년 건립한 충무관광호텔은 경남 제1호 등록 호텔로, 무궁화 4개짜리 1급 호텔이었다. 호텔 건립 40여넌이 지난 2010년 6월, 통영시는 통영국제음악당을 건립하기 위해 충무관광호텔을 철거했다- 기자 말)
사돈이 대표로 있는 충무관광호첼에서 기거하던 무렵, 정보기관으로부터 '북한이 이후락 납치를 시도하고 있다'는 첩보를 전해받았다. 납치 우려가 깊어지자 집안 가족회의 끝에 HR을 안전한 곳으로 모시기로 했다.
HR은 충무관광호텔을 떠나 서울 용산 자택으로 칩거 장소를 옮겼다. 당시 HR의 자택은 서울 용산우체국 인근 미 8군기지 19게이트 앞에 있었다. 미군기지 앞이라 안전에는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HR은 자택에만 있는 것이 마치 구금된 것 같은 갑갑함을 느꼈다.
평소 그림그리기가 취미였던 HR은 사돈의 도움을 받아 경기도 광주 도평리에 도자기공장을 마련했다. 이 주변에는 도자기공장들이 여럿 있었다. 처음에는 용산 자택에서 도자기공장으로 출퇴근 식으로 왕래했지만 어느날부터 아예 도평요에 상주하면서 긴 칩거가 시작됐다.
HR은 당시 도자기 대가로 불리던 안동오로부터 도자기 제작을 배우고 자문받았다. 그러더니 그후 자신 스스로도 도자기를 연구했다.
당시 도자기공장에 칩거하는 것을 가족외에는 외부에 일절 알리지 않았다. 북한의 납치설도 그 배경이었지만, HR은 점점 세상과 담을 쌓고 싶어 했다. 이런 인연으로 HR은 경기도 광주 도평리 언덕에 '무명 도공의 비'를 세우기도 했다. 도평요는 지명을 따서 지은 것이다.
도자기공장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도공 등 직원의 월급과 운영비가 필요했다. 하지만 재산을 몰수 당한 HR로서는 감당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도자기공장에 필요한 경비는 사돈의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1963년부터 6년간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던 HR은 1970년 12월 21일 박정희로부터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됐다. HR은 그후 1972년 5월 청산가리를 들고 북한으로 가 김일성과 면담하면서 남북대화의 첫 단추를 뀄고, 그해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남북 대화의 물꼬를 턴 장본인이 그후 10년도 되지 않아 북한에 납치당할 지 몰라 불안해 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에 대해 이동휘는 HR로부터 전해들은 당시의 상황을 증언했다.
"최근 유신 일부 세력이 HR에 대한 비판적인 회고담을 신문에 연재하는 것을 봤다. 하지만 1972년 극비리에 북한을 방문하고, 그에 따라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HR은 당시의 복잡한 상황을 내게 수차례 설명했다.
HR은 내게 '당시 목숨을 걸고 북한을 방문했지만 그 추진과정에서 소외된 일부 사람들의 시기가 심했다. 남북대화와 통일을 논의하면서 북한을 설득시키는 것 보다 남한 강경파들을 설득시키는 것이 더 어려웠다'고 술회했다. 남북대화와 통일을 두려워 하는세력이 남과 북에 공히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경우, 당시 북한의 실세로 떠오른 김정일과 강경 군부세력이 이후락을 좋은 시선으로 볼 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 무렵 영화인 최은희 신상옥 부부의 북한 납치 사건이 있었다. 이후락 납치 첩보도 상당한 근거가 있었던 것으로 당시에 생각했다.
이동휘의 이같은 증언은 '역사는 순환한다'는 말을 새삼 되새기게 한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남북대화와 통일을 두려워 하는 세력들이 득세하는 것을 보면서다.
▲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조카 이동휘씨 가게 '청사초롱'에 걸려 있는 사진.극비리에 북한을 방문한 이후락이 1972년 5월 4일 김일성과 면담하면서 찍은 사진이다. 이후락은 권력에서 물러난 후 북한이 자신을 납치하려 한다는 첩보에 불안감을 느끼기도 했다 ⓒ 박석철
박정희 정권 시절 대통령 비서실장과 중앙정보부장을 지내며 유신정권 권력의 중심부에 있었던 이후락(아래 HR·존칭 생략)은 대한민국의 기득권들이 대부분 그렇듯 재계와 화려한 혼맥을 맺었다.
HR은 슬하에 4남 1녀를 뒀는데, 장녀가 당시 호남정유그룹 서정귀 회장의 며느리로 들어가면서 HR과 재벌이 사돈이 된 것. 서정귀는 박정희의 대구사범학교 동기생이기도 하다.
1979년 10·26에 이은 신군부의 12·12 군사정변으로 HR은 김종필 등 유신세력들과 함께 구금되고 부정축재자로 몰려 전 재산을 몰수 당한 후 권력에서 쫓겨나게 된다. 심신이 지친 HR은 요양차 사돈인 서정귀가 운영하는 경남 통영의 충무관광호텔에서 2여년 간 기거했다.
그동안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HR은 이 기간 북한으로부터 납치당할 수 있다는 첩보를 받아 거처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만 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북한에 의한 납치 첩보는 HR이 이후 30여년 간 경기도 광주의 도자기공장인 도평요에서 칩거하는 계기가 됐다. 다음은 이동휘의 증언이다.
"12·12 이후 신군부로부터 축출된 HR은 사돈이 운영하는 충무관광호첼에서 2년 정도를 기거하고 있었다. (서정귀가 1971년 건립한 충무관광호텔은 경남 제1호 등록 호텔로, 무궁화 4개짜리 1급 호텔이었다. 호텔 건립 40여넌이 지난 2010년 6월, 통영시는 통영국제음악당을 건립하기 위해 충무관광호텔을 철거했다- 기자 말)
사돈이 대표로 있는 충무관광호첼에서 기거하던 무렵, 정보기관으로부터 '북한이 이후락 납치를 시도하고 있다'는 첩보를 전해받았다. 납치 우려가 깊어지자 집안 가족회의 끝에 HR을 안전한 곳으로 모시기로 했다.
HR은 충무관광호텔을 떠나 서울 용산 자택으로 칩거 장소를 옮겼다. 당시 HR의 자택은 서울 용산우체국 인근 미 8군기지 19게이트 앞에 있었다. 미군기지 앞이라 안전에는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HR은 자택에만 있는 것이 마치 구금된 것 같은 갑갑함을 느꼈다.
평소 그림그리기가 취미였던 HR은 사돈의 도움을 받아 경기도 광주 도평리에 도자기공장을 마련했다. 이 주변에는 도자기공장들이 여럿 있었다. 처음에는 용산 자택에서 도자기공장으로 출퇴근 식으로 왕래했지만 어느날부터 아예 도평요에 상주하면서 긴 칩거가 시작됐다.
▲ 12·12 군사정변 후 신군부에 의해 권력에서 밀려 난 이후락이 칩거하던 경기도 광주 도자기공장 도평요에서 자신이 만든 도자기를 살펴보고 있다 ⓒ 이동휘
HR은 당시 도자기 대가로 불리던 안동오로부터 도자기 제작을 배우고 자문받았다. 그러더니 그후 자신 스스로도 도자기를 연구했다.
당시 도자기공장에 칩거하는 것을 가족외에는 외부에 일절 알리지 않았다. 북한의 납치설도 그 배경이었지만, HR은 점점 세상과 담을 쌓고 싶어 했다. 이런 인연으로 HR은 경기도 광주 도평리 언덕에 '무명 도공의 비'를 세우기도 했다. 도평요는 지명을 따서 지은 것이다.
도자기공장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도공 등 직원의 월급과 운영비가 필요했다. 하지만 재산을 몰수 당한 HR로서는 감당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도자기공장에 필요한 경비는 사돈의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1963년부터 6년간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던 HR은 1970년 12월 21일 박정희로부터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됐다. HR은 그후 1972년 5월 청산가리를 들고 북한으로 가 김일성과 면담하면서 남북대화의 첫 단추를 뀄고, 그해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남북 대화의 물꼬를 턴 장본인이 그후 10년도 되지 않아 북한에 납치당할 지 몰라 불안해 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에 대해 이동휘는 HR로부터 전해들은 당시의 상황을 증언했다.
"최근 유신 일부 세력이 HR에 대한 비판적인 회고담을 신문에 연재하는 것을 봤다. 하지만 1972년 극비리에 북한을 방문하고, 그에 따라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HR은 당시의 복잡한 상황을 내게 수차례 설명했다.
HR은 내게 '당시 목숨을 걸고 북한을 방문했지만 그 추진과정에서 소외된 일부 사람들의 시기가 심했다. 남북대화와 통일을 논의하면서 북한을 설득시키는 것 보다 남한 강경파들을 설득시키는 것이 더 어려웠다'고 술회했다. 남북대화와 통일을 두려워 하는세력이 남과 북에 공히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경우, 당시 북한의 실세로 떠오른 김정일과 강경 군부세력이 이후락을 좋은 시선으로 볼 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 무렵 영화인 최은희 신상옥 부부의 북한 납치 사건이 있었다. 이후락 납치 첩보도 상당한 근거가 있었던 것으로 당시에 생각했다.
이동휘의 이같은 증언은 '역사는 순환한다'는 말을 새삼 되새기게 한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남북대화와 통일을 두려워 하는 세력들이 득세하는 것을 보면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시사울산>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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