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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인사'냐, '통합조정자'냐 길 떠난 박지원의 종착지는?

[이주빈의 정치시즌③] 제3지대의 명분과 실리

등록|2016.01.23 11:14 수정|2016.01.23 11:14

▲ 더불어민주당 탈당 기자회견을 마친 박지원 의원이 22일 오전 서울 국회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을 마치고 자리를 떠나고 있다. ⓒ 이희훈


근래 한국 야권의 분화를 보고 있자면 '로드 무비(road movie)'를 보는 것 같다. 로드 무비엔 철칙처럼 세 가지 인물 유형이 등장한다. 남는 자, 떠나는 자, 죽는 자. 한 편의 로드 무비처럼 더불어민주당에 그대로 남는 이들이 있고, 더민주를 떠나 새로운 당을 만든 이들이 있고, 스스로 정치를 접는 이들이 있다.

22일, 또 다시 떠남을 선택한 이가 등장했다. 전남 목포가 지역구인 박지원 의원이다. 오래전부터 탈당을 예고해왔던 터라 '극적 긴장감'은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떠남은 뉴스가 되었다. 아니 그가 뉴스로 만들었다. 제3의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박 의원은 안철수 의원이 이끄는 국민의당에 합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대신 제3지대에 머물며 "야권 통합에 의한 총선승리, 정권교체의 밀알이 되겠다"라고 했다. 그는 "길에게 길을 묻고, 물방울에게도 길을 묻는 나그네의 절박한 심정"이지만 "물방울은 물결이 되고, 강은 바다에서 만난다는 믿음을 나침반 삼아 가겠다"라는 말로 야권 대통합의 필연을 스스로 확신했다.

탈당의 변에서도 읽을 수 있듯이, 박 의원은 현재 한국 정치권에서 문학의 수사(修辭)를 정치 언어로 능란하게 활용할 줄 아는 거의 유일한 정치인이다. 그의 정치언어엔 '여의도 정치판' 특유의 경직성이 없다. 그는 어떠한 정치상황에서도 호기에 가까운 여유를 부리며 멘트를 날린다.

지난 2003년 6월 대북송금 특검으로 수감되기 전 그는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는 조지훈의 시 <낙화> 첫 구절을 읊는 것으로 심경을 대신했다. 2007년 2월 대통령 사면으로 대북송금 특검으로부터 자유의 몸이 되고나서는 "바람에 진 꽃이 햇볕에 다시 필 것"이라며 "봄은 또 오고 있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자신을 '꽃'으로 비유하며 약 4년의 암흑기를 지나온 자신에게 '봄'이라는 희망의 시절이 오고 있다고 스스로 예찬한 것이다.

2011년 2월 당시 민주당 원내대표였던 박 의원은 교섭단체 대표 연설을 하며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이자 '영포대군'으로 불리던 이상득 의원의 정계 은퇴를 촉구했다. 여당 의원들의 거친 항의로 국회 본회의장은 벌집을 쑤셔놓은 듯 했다. 그가 연설을 끝내고 본회의장을 나서자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부로 대한민국 권력 서열 1위가 누구인지 밝혀졌어. 여당 의원이라는 사람들이 대통령을 욕할 때는 가만있다가 대통령 형님을 뭐라고 하니까 난리가 아니잖아." 

대북송금 특검 과정에서 자신을 '꽃'으로 비유했던 박 의원. 이번 탈당 과정에서는 비유의 상징물이 '강'으로 대체되었다.

탈당으로 마음을 기울어갈 즈음 그는 "저는 루비콘강 앞에 서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탈당을 굳히고 나서는 "제가 건널 루비콘강에는 위화도가 없다"라고 했다. 더민주 인사들이 만류하고 있지만 '위화도'로 비유되는 유턴의 명분도, 계기도 없기 때문에 결국 떠난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박 의원은 '낭만 정객'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그렇다고 그의 정치 언어의 낭만과 여유가 '문학적 낭만'에서 기인하고 있다고 헤아리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그는 철저한 '비즈니스 맨'이기 때문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그는 타고난 '정치상공인'이다. '정치상공인 박지원'은 명분과 실리를 따지고 계산해서 이윤이 가장 많이 남는 길을 택할 뿐이다.

▲ 더불어민주당 탈당 기자회견을 마친 박지원 의원이 22일 오전 서울 국회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을 마치고 자리를 떠나고 있다. ⓒ 이희훈


그가 제3지대를 선택한 까닭도 명분과 현실의 실리를 그나마 가장 많이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 의원은 2004년 SK그룹으로부터 1억 원을 수수한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은 전력이 있다. 지금은 저축은행으로부터 금품을 받은 혐의로 항소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아 대법원의 법리 판단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다.

그가 아무리 호남을 대표하는 정치인이라지만 부패인사 배제를 공언한 더민주나 국민의당 입장에서 박 의원의 이런 전력은 '뜨거운 감자'일 수밖에 없다. 박 의원만을 특별하게 챙길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를 내팽개칠 수도 없다. 그의 정치적 상징의 무게가 그만큼이다. 그가 이를 모르겠는가.

비리전력이라는 현실의 리스크를 돌파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출구전략은 누구도 부정 못하는 대의명분을 앞세우는 것이다. 즉 '야권통합을 통한 정권교체'의 조정자 역할을 자임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민주나 국민의당 소속이 아닌 제3지대에 머물러 있는 것이 낫다.

이 같은 셈법엔 무소속으로 목포에 출마해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전제돼 있다. 동시에 더민주나 국민의당으로 하여금 목포를 무공천 지역으로 선정케 하려는 의도도 깔려있다. 이렇게만 된다면 '정치상공인 박지원'은 야권 분화과정에서 명분과 함께 정치적 실리를 챙기는 이른바 '남는 장사'를 할 수 있다.

그는 탈당 기자회견에서 "역사를 바꾼 위대한 혁명도 결국은 한 사람의 용기에서 시작했다"라며 "함께 할 동지들을 생각하며 아무도 걷지 않은 눈밭에 발자국을 먼저 남기겠다"라고 했다. 박 의원이 앞서 걸으며 남길 발자국이 뒤따라 걸어선 안 될 구태의 길인지, 만인이 떨쳐 일어나 함께 걸어야할 길인지 지금은 분간할 수 없다.

야권 분화의 겨울이 가고 다시 봄이 오면 그의 옛 기원처럼 "바람에 진 꽃이 햇볕에 다시 필 것"인가. 그리고 박지원 특유의 '낭만 멘트'는 계속 들을 수 있을까. 로드 무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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