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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선발대, 어란 앞바다까지 왔다

이순신이 명량해전 구상했던 진도 벽파진과 벽파정 터

등록|2016.01.25 11:20 수정|2016.01.25 11:20

▲ 진도타워에서 내려다 본 명량대첩의 현장. 우수영을 배경으로 들어선 진도대교와 울돌목의 밤풍경이 한 폭의 그림 같다. ⓒ 이돈삼


1597년 8월 29일(양력 10월 9일),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은 어란진에서 장도를 거쳐 벽파진으로 옮겨 유진을 했다. 이순신은 벽파진에서 열세한 병력으로 어떻게 일본군을 물리칠 것인지 골몰했다. 일본군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정탐조도 수시로 내보냈다(관련기사 :
이순신 장군이 겁 먹은 수군 달랜 방법).

이순신이 벽파진에 머무는 동안, 남도 이순신길 조선수군 재건로도 벽파진을 향해 간다. 우수영에서 진도대교를 건너 녹진관광지와 진도타워를 보고 벽파항으로 간다.

진도대교는 30여 년 전 진도를 뭍으로 만들어 준 다리다.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와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를 잇고 있다. 진도대교를 건너 오른편에서 만나는 승전공원은 명량대첩을 기념해 진도군에서 조성했다.

▲ 울돌목 승전공원. 해안을 따라 나무 데크가 놓여있고, 국내에서 가장 큰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서 있다. ⓒ 이돈삼


▲ 망금산 진도타워 전경. 진도대교와 울돌목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 좋은 곳에 세워져 있다. ⓒ 이돈삼


해안을 따라 나무 데크가 놓여 있다. 같은 울돌목이지만 우수영에서 본 풍경과는 사뭇 다른 풍광이 펼쳐진다. 국내에서 가장 큰 이순신 장군 동상도 서 있다. 큰 칼을 손에 들고 울돌목을 호령하고 있다. 울돌목의 거센 물살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체험장도 만들어져 있다. 해안 산책로도 다소곳하다.

망금산 진도타워에서는 명량대첩의 현장인 울돌목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우수영을 배경으로 들어선 진도대교가 위용을 뽐낸다. 올망졸망 떠 있는 다도해 풍광도 한 폭의 넉넉한 그림이다.

조선수군 재건로는 녹진관광지에서 해안을 따라 강강술래 터를 거쳐 울돌목 무궁화동산을 지난다. 명량대첩을 앞둔 이순신도 벽파진으로 가면서 봤을 해안이다. 드넓은 진도갯벌을 그 길에서 만난다. '개평선'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넓다. S자로 드러난 갯골도 미려하다.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돼 있다.

▲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돼 있는 진도갯벌. S자로 드러난 갯골이 미려하다. ⓒ 이돈삼


▲ 진도의 동북쪽 끝에 자리한 벽파진. 오랫동안 진도의 관문 역할을 했던 곳이다. ⓒ 이돈삼


벽파진은 진도의 동북쪽 끝자락에 있는 포구다.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에 속한다. 어란진에서 울돌목으로 가는 해상의 길목이다. 오랫동안 진도의 관문 역할을 했던 곳이다. 진도대교가 놓이기 전까지 자동차가 배에 실려서 바다를 건너와 여기에 내렸다.

고려시대 삼별초 군사들도 이 포구를 통해 진도로 들어왔다. 벽파항에서 산등성이 하나를 넘으면 삼별초의 근거지였던 용장산성이다. 삼국시대에는 일본에서부터 우리나라 남해와 서해를 거쳐 중국까지 이어지는 고대 해로의 일부였다.

▲ 벽파진 뒤 언덕에 서 있는 이충무공 전첩비. 명량대첩을 앞둔 이순신이 일본군과 일촉즉발의 시간을 보냈던 그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 이돈삼


벽파진 뒤 언덕에 이충무공 전첩비가 세워져 있다. 이순신이 명량대첩을 앞두고 일본군과 일촉즉발의 시간을 보냈던 그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비는 1956년 진도군민들의 성금으로 세워졌다.

'벽파진 푸른 바다여! 너는 영광스런 역사를 가졌도다. 민족의 성웅 충무공이 가장 외롭고 어려운 고비에 고작 빛나고 우뚝한 공을 세우신 곳이 여기더니라.'

비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포구 한쪽에 벽파정 터도 남아 있다. 1207년(고려 희종 3년) 벽파진을 진도와 해남을 연결하는 나루터로 개설하면서 정(亭)과 숙소인 원(院)을 설치했다. 그 벽파정이다. 진도를 출입하는 공식적인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이었다. 벽파진의 어귀에 있었다. 이순신이 머물면서 명량해전을 구체적으로 구상했던 공간이기도 하다.

이순신은 이 벽파정과 벽파진 앞바다에서 열세한 병력으로 일본군을 격퇴시킬 전략과 전술을 구상했다. 정탐조를 수시로 보낸 것도 이런 이유였다.

▲ 옛 벽파정의 터. 정유재란 당시 벽파진의 어귀에 있었다. 이순신이 머물면서 명량해전을 구체적으로 구상했던 공간이다. ⓒ 이돈삼


▲ 진도 벽파진.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이 열세한 병력으로 일본군을 격퇴시킬 전략과 전술을 구상했던 곳이다. ⓒ 이돈삼


이순신이 벽파진에 머물고 있던 9월 3일부터 나흘 동안은 바닷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된바람이었다. 비가 뿌리고 물결도 높았다. 어찌나 바람이 거세든지 전선이 심하게 요동을 쳤다. 서로 부딪힐 것만 같았다. 함대끼리 부딪혀서 부서지지 않도록 된바람 속에서 결박을 했다.

나흘 만에 바다가 잔잔해지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추위가 밀려왔다. 계절은 가을이었는데, 바닷가는 벌써 겨울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순신은 아직 얇은 옷을 입고 있는 수군과 격군들 생각에 걱정이 앞섰다.

며칠 거세게 불던 된바람이 잦아들었다. 일본군의 동향을 파악하러 나간 탐망군관 임중형이 돌아왔다.

"이진에 일본군 전함이 55척 머물고 있사온데, 이 가운데 13척이 선발대로 어란 앞바다에 도착했사옵니다. 그 뜻이 우리 수군에 있는 것 같사옵니다. 장군!"

임중형의 보고를 들은 이순신은 각 전함에 알리고 엄중히 경계토록 했다. 1597년 9월 7일(양력 10월 17일)이었다. 오후 늦게 적선 13척이 조선수군을 향해서 돌진해 왔다. 임중형이 보고한 그들이었다.

▲ 울돌목 물살 체험장. 진도대교 아래에 설치돼 있다. 울돌목의 거센 물살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이다. ⓒ 이돈삼


▲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의 명량대첩 해전도. 진도대교 아래 물살체험장에 설치돼 있다. ⓒ 이돈삼


덧붙이는 글 남도 이순신길 조선수군재건로 고증 및 기초조사(전라남도), 이순신의 수군재건 활동과 명량대첩(노기욱, 역사문화원), 명량 이순신(노기욱,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등을 참고했습니다. 지난 11월과 12월 두 차례 답사했습니다.

이 기사는 전남새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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