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년 무등산, 09년 용산... 사형수의 말이 맞았다
[최후의 진술 - 박흥숙 편 ④] 아직도 유효한 그의 물음 '국가의 의미란?'
모든 법정 최후 진술에는 사람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어떤 사건이 나와는 상관없는 뉴스라거나 케케묵은 역사책 속에나 나오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한 시대를 상징하는 사건들의 최후 진술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위치가 어디쯤인지도 가늠해보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박흥숙, 자신이 살던 동네를 철거하던 철거반원 네 명을 죽였다. 그리고 한 명을 중태에 이르게 만들었다. 결코 용서받지 못할 범죄를 저질렀던 그 때 그의 나이 스물 셋.
그는 최후 진술서에서 자신의 범죄에 대해서는 "죄송하다"고 되풀이하면서도 나름대로의 분노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딱히 어디 갈 곳 없는 현실을 뻔히 알면서도 집을 부수고 심지어 불까지 질렀던 철거 방식에 대해, 또 그런 지시를 한 당국에 대해, 나아가 가난한 국민에게는 냉혹하기 그지없는 국가에 대해.
그 분노를 '지금' 위인백(68) 5.18 교육관 관장이 마주하고 있다. 박흥숙 재판 당시 사무장으로 일했고, 박흥숙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와 교분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 그는 37년 만에 박흥숙의 최후 진술서를 다시 읽고 있다. 박흥숙의 분노는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고 있었다.
"이 더럽고 비열하기 짝이 없는 덜 된 수작은..."
▲ 1977년 4월 23일자 <경향신문>. 당시 신문들은 박흥숙이 서울 이모집에서 검거됐다고 보도했지만 이 역시 사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동생 박정자씨는 "서울 상계동에 따로 연고가 없었으며 오빠는 자수했다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사고가 나자 당국에서는 그 마을을 무당골이라 했고, 그 마을 사람들을 모조리 무당이라고까지 했다. 생게망게한 온갖 추악하기 짝이 없는 것들을 나에게 뒤집어씌우는 것만도 부족해 말 못하고 쫓기는 짐승처럼 선량하고 불쌍한 그 마을 사람들을 모조리 무당이라고까지 하다니, 이 무슨 비열한 짓인가. 이 더럽고 비열하기 짝이 없는 덜 된 수작은 무엇을 의미한단 말인가." (박흥숙의 자필 최후 진술서)
생게망게하다, 터무니없다고 했다. 무등산 타잔이란 별명 자체가 박흥숙에게는 추악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사건 당시 언론은 "평소 아령, 철봉 등으로 신체 단련에 힘써 강인한 체력으로 무등산 일대 사람들로부터 '무등산 타잔'이란 별명을 듣기도 했다"는 류의 보도를 일삼았다. 원래부터 박흥숙의 별명이 '무등산 타잔'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박흥숙의 동생 박정자씨는 "그 전까지 오빠에게 따로 별명은 없었다"며 "사건이 나고 언론이 붙인 것"이라고 했다. 1977년 월간 <대화>에 실렸던 '무등산 타잔의 진상' 르포에서도 박흥숙의 친구 김동호씨는 "무등산 타잔이란 말은 신문에서 처음 봤다"고 증언했다. 박흥숙 구명운동에 나섰던 노영숙 오월 어머니집 사무총장은 "무등산 타잔 하면 눈길을 확 끌지 않나. 언론에서 선정적인 제목을 뽑은 것"이라고 했다.
박흥숙을 한국판 이소룡이라고 부르는 언론도 있었다. "태권도 4단, 유도 3단의 실력에 기합술까지 연마"했다고 했으나 이는 명백한 과장 보도였다.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체력의 한계를 실감하고 운동을 열심히 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렇다고 각종 '단증'을 취득한 건 아니었다. 언론에서 '사제총'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던 그 총은 "산중에 외롭게 살고 있기 때문에 호신용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실상 산짐승들을 쫓으려고 만든 딱총이었다. 이런 식의 왜곡들은 박흥숙을 살인을 언제든 저지를 수 있는 사이코패스로 만들었다.
우리 어머니는 무당이 아니다
▲ 박흥숙 구명운동의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던 르포 '무등산 타잔의 진상'. 1977년 <대화> 8월호에 실렸으며 당시 대학생이었던 김현장이 썼다. ⓒ 오마이뉴스 이정환
하지만 박흥숙이 지적했듯 이것만으로는, "터무니없는 것들을 그에게 뒤집어씌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듯 했다. 박흥숙의 어머니도 이상한 사람이 돼야 했고, 아니, 그 마을 자체가 불을 질러서라도 없애야만 하는 요상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어야 했다. 실제로 당시 한 신문은 "무당의 아들이 제단을 차려둔 집도 태우려고 하자" 범행을 저질렀다고 보도했다. 아예 그가 살던 마을이 무당촌이라는 보도도 난무했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우리처럼 시내에 집을 장만할 돈이 없어서 이곳에 무허가 움막이라도 짓고 살려고 온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산 좋고 물 좋으니까 굿을 한다고 시내 사람들이 올라와서 밥을 해달라고 하면 밥을 해주고 좀 도와줄 일이 있으면 도와 주면서 몇 푼 씩 받아 그것으로 먹고사는 것이죠. 여기 있는 사람들이 결코 무당은 아니에요. 날품팔이죠." (박흥숙 어머니 심금순씨의 증언, 1977년 <대화> 8월호)
박흥숙이 분노한 이와 같은 비열한 왜곡이 가리고 있던 진실이 그나마 세상에 드러난 것은 한 운동권 대학생의 르포 덕분이었다. 당시 조선대 공대 4학년이었던 김현장(66세, 현재 민주화운동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위원)은 언론의 자극적인 보도에 의문을 품고 직접 사건 현장을 찾아 증언을 수집하고 박흥숙의 일기 등을 발굴해 사실과 거짓을 하나 하나 가려냈다.
이 르포는 박흥숙 구명운동을 일으키는 결정적 촉매로 작용했다. 구명운동은 교회, 시민단체 등을 통해 번져나갔고, 사형만은 면하게 해달라는 탄원서가 전국적으로 '폭발'했다. 한국 정치사에서 대표적인 여성 정치인으로 꼽히는 박순천 여사와 김옥길 여사(당시 이화여대 총장) 등 각계 인사 50여 명도 탄원 대열에 합류했다.
위인백 관장은 "(오른 손은 자신의 눈 근처, 왼 손은 자신의 가슴 근처에 두며) 이렇게, 탄원서가 쌓였었다. 보자기에 담아 법정에 제출했던 기억이 난다"며 "탄원서가 엄청나게 들어왔다. 관심 있는 사람들이 법정에 가서 방청도 많이 했었다"고 말했다. 구명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의 문제의식을 김대옥씨(사건 당시 광주 동구청 건축지도계)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통해 이렇게 요약한다.
"(철거)집행을 하거나 집행을 당하는 가해자나 피해자는 전부 패가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패, 패, 승이 되는 것이지. 국가만 승이 되고. 집행과 당하는 사람은 패, 패가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런 일은 국가에서 안 해야죠."
사형수는 알고 있었다, 눈물의 의미를
▲ 박흥숙이 사법고시를 준비하다가 체력의 한계를 실감하고 평소 운동을 열심히 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각종 무술의 고단자였다는 당시 언론보도는 사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 백상 시네마
"내가 교도소에 있는 동안 흉악범이라고 낙인이 찍히고 말만 들어도 몸서리가 처져야 할 판인데 생판 낯모르는 시민들까지 삼삼오오 면회를 오고 있으며 그 중에는 나를 보고 눈물을 흘리시는 분들까지 있었다." (박흥숙의 자필 최후 진술서)
박흥숙도 알고 있었다. 생판 낯 모르는 사람이 자신을 보고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이제 끝으로 치닫는 최후 진술서에서 박흥숙의 분노는 다음과 같이 폭발한다.
"이것은 나의 생각이지만, 우리들 경우처럼 억울하게 헐려버린 마을들이 결코 하나 둘은 아닐 것이다. 물론 당국에서는 국가의 백년 대계를 위해서 어쩔 수 없다고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이는 오로지 손톱 밑에 비접('가시'의 사투리) 드는 줄만 알지, 염통 굉기는 줄을 모르는, 민이야 죽건 말건 명분 세우기에 급급한 파렴치한 소인배들의 옹졸한 생각이라고 밖에 더할 수가 있겠는가.
이런 알량하고 옹졸한 소인배들로서야 어떻게 국가의 백년대계를 논할 수 있겠으며, 만인의 고충을 염려하고 만인의 고충을 보살필 수 있단 말인가. 이를 견제해야 하는 관계 당국마저 시세에 편승해 버린 것인지, 아니면 송판에 뚫린 나무 구멍처럼 밥먹이나 다루는 동전벌레들이었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노라.
아직도 미지근한 소리들이 계속 들려오고 있는데 더 이상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반항아 아닌 반항아들을 만들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자기네들의 실책을 솔직하게 반성할 줄 아는, 옳은 것을 취하고 그른 것을 버릴 줄 아는 용감한 미덕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박흥숙의 자필 최후 진술서)
"약한 사람을 깔아뭉개던 시대의 아픔"
▲ 2009년 1월 20일 새벽. 서울 용산구 한강로 2가 재개발지역내 5층 건물 옥상에서 농성중인 철거민들을 경찰특공대가 강제진압 과정에서 철거민들이 들어가 저항하고 있는 가건물이 불길에 휩싸여 무너지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박흥숙의 판단은 결과적으로 맞았다. 가난한 국민을 폭력적으로 치워버리는 일은 '결과적으로'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하는 것이라는 명분에 따라 곳곳에서 자행됐다. 박흥숙이 사형 당한 다음 해, 1981년 사당동 판자촌에는 철거반원 1600여 명이 들이닥쳤고, 1983년 목동 신시가지 건설 과정에서는 1만여 명의 세입자가 쫓겨났다. 1985년 상계동, 1988년 돈암동, 1989년 신정동, 1992년 봉천동에서 비슷한 일이 반복됐으며, 1997년 전농동에서는 철탑이 불길에 휩싸였고 박순덕씨가 숨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2002년 상도동, 2003년 경기도 오산시 수정동, 고양시 일산구 풍동에서도 역시 재개발 과정에서 폭력이 '집행'됐으며, 2009년에는 용산 남일당 건물 옥상 망루가 다시 불길에 휩싸였다. 철거민 5명과 경찰특공대 1명이 희생당한 이 사건은 1977년 무등산 덕산골에서 '방화 철거'로 촉발된 이른바 무등산 타잔 사건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위인백 관장이 길게 한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게 물었다. 젊었던 시절, 사형만은 면하게 하려고 탄원서 보따리를 들고 뛰어 다녔던 그 사건의 최후 진술서를 다시 읽어 본 소감이 어떠냐고. 그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와 교분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또한 지금 어떻게 바라보냐고. 그때와 지금의 생각이 혹시 달라지지는 않았냐고. 위 관장의 답은 이랬다.
"유신 때였으니까. 개발을 위해서는 약한 사람을 깔아뭉개는 시절이었으니까. 서민의 아픔이나 애환을 몰라주는 시대였으니까, 그런 시대였기 때문에 구명운동에 공감했던 것입니다. 지금의 시대였다면, 그런 식으로 집행을 하고, 그런 식의 불상사가 있었을까요. 시대적인 아픔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두운 시대였으니까요."
박흥숙, 마지막으로 국가의 의미를 묻다
▲ 박흥숙의 자필 최후 진술서 사본 ⓒ 오마이뉴스 이정환
물론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하지만 여전히 누군가는 경쟁에서 밀려나고 있으며, 더욱이 한 번 패배하면 다시 일어나기 어렵다. <송곳>에서 구고신이 그랬듯 패배는 죄가 아님에도, 패배한 사람도 국민의 한 사람이라는 그 당연한 진실을 국가는 여전히 차갑게 대하고 있다.
이와 같은 차가운 현실은 곧 단 한 번의 패배는 끝이라는 극단적 인식을 조장하기 쉽다. 자살이라는 극단적 방법을 택한 이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곁에서 떠나가고 있다. 또는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뉴스들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냉혹한 뉴스들은 매일 우리를 더욱 움츠러들게 만들고 있다. 자신과 같은 "반항아 아닌 반항아들을 만들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박흥숙의 외침이 도드라져 보이는 것도 그래서다.
또한 그의 말처럼 "국민이야 죽건 말건 명분 세우기에 급급한 파렴치한 소인배들"은 여전히 넘쳐나며, "자기네들의 실책을 솔직하게 반성할 줄 아는, 옳은 것을 취하고 그른 것을 버릴 줄 아는 용감한 미덕을 발휘"하는 일은 여전히 드물다. 국가의 의미를 따져 묻는 박흥숙의 최후 진술, 마지막 이 한 마디는 그래서 지금도 유효하다.
"생각해 보라. 구국선인들의 뜨거운 피가 뒤엉킨 한 많고 눈물 많은 단군 반만년 역사 위에 이번 당국에서 행한 처사가 과연 용납될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야말로 시대적인 착오이며 역사적인 심판을 면치 못하리라.
우리가 무엇 때문에 내 나라를 위해서 싸우는가. 무엇 때문에 마지막 피 한 방울을 다 바쳐 총칼을 부여잡고 쓰러져야 하겠는가. 진정으로 내 나라를 위하고 겨레의 앞날을 걱정하는 뜻 있는 국민이라면, 진리를 사랑하고 이상을 추구하는 양심적인 학도들이라면, 이 어찌 하늘을 우러러 통탄할 일이 아니냐." (1978년 3월 16일, 박흥숙의 자필 최후 진술서)
[부록] 박흥숙 최후 진술 전문 보기
* '최후의 진술 - 박흥숙'편을 마칩니다. 다음에는 박흥숙 사건이 일어나기 1년 전, 전국을 경악하게 만든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 김대두와의 편지 교환을 시작으로 사형수 교화위원으로 30여 년 활동했던 김혜원 선생(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초대 실행위원)인터뷰를 에필로그 형태로 소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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