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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창피했던 동네, 새로운 바람이 분다

부평역사박물관 특별기획전 '부평 신촌 다시보기'

등록|2016.02.01 10:23 수정|2016.02.01 10:23
<시사인천>은 부평역사박물관의 특별기획전 '신촌 다시보기' 관련 기사를 지난해 두 차례 보도했다. 그럼에도 특별기획전을 총괄한 김정아(36) 팀장을 만나 더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었던 건, 정말로 '신촌을 다시보고' 싶어서였다. 김 팀장의 도움으로 '신촌을 다시 볼' 수 있었다. 지난해 11월 25일 시작한 특별기획전은 2월 21일까지 열린다. - 기자 말

현재 부평구 부평3동의 일부인 신촌은 1930년대부터 말 그대로 꾸준히 신촌(新村: 새로운 마을)으로 변모해 왔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후반에는 일본 조병창 기지가 형성되면서 군수공장이 들어섰고, 이 공장에 들어가기 위해 전국에서 많은 노동자가 신촌으로 몰렸다.

▲ 전시회장 입구에는 당시의 사진이 전시돼 있다. ⓒ 김영숙


해방 이후 한국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미군부대(애스컴 시티: Ascom City)가 들어섰다. 미군기지촌이 형성되자, 또 다시 전국에서 많은 사람이 모이기 시작했다. 특히 신촌은 미군부대 정문(현재는 폐쇄된 상태임)을 마주하는 지역으로 대부분의 '미군 위안부'가 이곳에서 거주했다.

"신촌 지역 사람들에 대한 선입견을 없애고 싶었어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예전부터 이곳에 살고 계시거나 사셨던 분들께 '신촌은 어떤 동네였나요?'라고 물으면, 대부분의 반응이 '사람이 살 만한 동네가 아니었어. 여기서 살았다는 거 창피해서 말 못해'라고 하시더라고요."

김 팀장은 사례 하나를 들려줬다. 당시 부산에서 신촌으로 시집온 여성이 부산 지인들에게 자신이 사는 곳을 말하자, '빤한 동네'라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이곳 신촌이 좋지 않은 동네라는 소문이 부산까지 났단다.

"사람들의 인식은 공간과 사람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이번 전시로 그런 인식을 바꿔보고 싶었어요. 기사도 제목이 중요하잖아요. 이번 전시의 제목인 '신촌 다시보기'에는 그런 의도가 담겨있습니다. 신촌에 살았던,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선입견을 깨보고 싶었습니다.

그들도 이 지역에서는 나름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이었어요. 미용실에서, 클럽에서 일했던 분들이나 '미군 위안부'로 살았던 분들과 인터뷰하면, 나름대로 열심히 산 사람들이었어요. 어떤 사람은 한국전쟁이 끝나고 목포에서 살다가 먹고 살기 힘들어 신촌으로 와 '미군 위안부' 생활을 했죠.

3년 뒤 목포에 살던 남동생과 어머니를 불러 가장의 역할을 했습니다. 전쟁 직후 남성들도 취업하기 힘든 상황에서 학교 문턱에도 못 간 여성이 뭘 할 수 있었겠어요? 이분들을 삶을 포기한 사람으로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뜨거운 감자인 신촌, 당시는 핫 플레이스
   

▲ 클럽에서 드럼을 치던 주민이 유물을 대여해 줬다. ⓒ 김영숙


부평구의 '부평 음악·융합도시 조성사업'이 문화체육관광부의 '2015년 문화특화지역 문화도시 조성사업'에 선정됐다. 부평구는 옛 미군부대 인근의 클럽들을 복원해 문화벨트로 조성하는 사업을 2020년까지 추진할 계획이다. 당시 부평3동 신촌에는 미군클럽이 17곳 정도 운영됐고, 부평2동 삼릉엔 그곳에서 활동하던 뮤지션들이 살았다.

"삼릉과 신촌에 미군기지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살긴 했는데, 삼릉은 뮤지션이 많이 살았고 '미군 위안부'와 계약동거를 하는 미군이 살았죠. 대부분 경제력이 있고 출퇴근이 자유로운, 계급이 높은 장교였습니다. 그러나 신촌에는 귀대시간이 있는 일반 사병들과 그들을 상대하는 '위안부'들이 살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인천에서 산 50대 중반 이상의 시민들은 '신촌을 무서워했던 기억이 난다'고 증언한다. 어떤 여성은 '미군들이 잡아가니까, 그쪽으로 버스 타고도 지나가지 말라'는 부모의 말까지 들었다고 한다.

"당시 '뜨거운 감자' 같은 곳이었죠. 일반인은 무서워서 못 가던 곳이었어요. 우리 박물관 직원의 친척도 신촌에서 살았는데 밤에 나가지 못하게 했대요.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보면 돼요. 윤락업소가 있는 지역은 가지 않고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처럼요."

그러나 신촌이야말로 당시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였다고 김 팀장은 강조했다. 이른바 양색시·양공주라 불린 '미군 위안부'가 이용하던 신촌의 미용실에서 일했던 분들 얘기를 들어보면, 서울에서도 미용기술을 배우러 오고 헤어스타일이나 패션을 보기 위해 왔다고 했다. 신촌은 그렇게 패션의 1번지이자 핫 플레이스(Hot Place)였던 곳이었다.

"신촌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이중적이었습니다. 미군부대에서 나온 물자를 받고 싶어 '미군 위안부'들에게 잘 보이려 했지만, 그들이 사는 지역을 경시했고 그 지역 사람들을 괄시했습니다."

주민들과 함께 만든 특별기획전

▲ 2005년 신촌지역 개발로 논의가 분분했을 당시 주민이 사용하던 피켓을 대여해 줬다. ⓒ 김영숙


김 팀장은 이번 전시와 연관한 학술총서 '이주민의 마을, 부평 신촌'을 만드는 과정에서 당시 이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담당했다.

"처음에는 주민들이 저를 의심하면서 '기억이 안 난다. 모른다'고 하셨어요. 몇 차례 찾아가 깊은 얘기를 나누게 되니까, 그때의 사진과 물건들을 보여주셨어요. 그럴 수 있었던 건, 그분들의 기억과 삶을 공감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전시에 도움을 준 어르신들을 전시회 개막식 때 초청했더니, 엄청 좋아하면서도 실제 모습과 다른 부분은 과감히 지적도 했다고 했다. 일례로, 가장 유명했던 '청파미용실' 간판이 실제와 다르다는 것이었다.

▲ 김정아 팀장 ⓒ 김영숙

김 팀장은 이번 전시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지역의 이야기를 지역 주민들에게 듣고 지역 주민들이 제공한 유물로 이뤄졌다는 게 가장 크다고 했다. 당시에 썼던 화장품·담요·그릇·약품·카메라와 클럽에서 사용한 드럼까지 주민들이 내주었다. 주민들과 함께 만든 전시라고 김 팀장은 힘주어 말했다.

어떤 관람객은 '미군부대에서 근무하면서 그 지역을 오갔는데 그때가 생각나 고맙다'고 해, 보람을 느꼈단다.

"하루 평균 관람객이 300여 명 됩니다. 수능 끝나고 고등학교 3학년 단체관람객이 많이 왔어요. 보통 단체관람은 어린이들이 많은데, 시기 선택을 잘 한 것 같아요. 북부교육지원청과 양해각서(MOU)를 체결해 수능 본 수험생의 단체관람을 독려했거든요."

수험생들의 반응이 궁금해 물었더니, 자주 놀러 다녔던 산곡동 '2001 아울렛' 맞은편에서 그런 역사가 있었다는 것에 놀라워했다고 답했다.

"원래 관심이 없는 친구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친구들은 유심히 보더라고요. 중학생들한테는 설명하는 게 좀 어려워요. 성(性)과 관련한 부분이 있기도 하고, 심각한 이야기가 웃음으로 변질될까 봐 조심스레 얘기합니다. 클럽과 음악인이 많았다고 에둘러 얘기하죠. 신촌은 치부가 아니라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때도 신촌이고 지금도 신촌
   
애스컴 시티는 1969년부터 축소돼 1973년 6월 공식 해체됐다. 이에 따라 미군의 수가 줄어들면서 기지촌에 있던 클럽도, '미군 위안부'도 서서히 사라졌다. 현재 부평공원이 조성된 부지는 미군이 나가고 1997년까지 한국군 부대(88정비대)가 군수차량 기지로 사용했던 곳이다. 1993년 공원으로 지정돼 2002년 개장했다.

일제강점기에는 군수공장 노동자가 살았던 곳, 미군기지가 들어서고 기지촌과 더불어 살던 사람들이 있던 신촌은 또 다른 변화를 준비하고 있다.

"신촌 골목으로 들어가면 젊은이들이 운영하는 공방이나 창업을 준비하고 있는 가게를 여럿 봅니다. 부평공원 주변으로는 커피숍도 많고요. 신촌이 다시 신촌으로 태어나기 위해 시도하고 있어요. 더불어 부평미군기지를 반환하면 신촌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겠죠. 신촌은 다시 신촌이 되기 위해 변신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시사인천>에 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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