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서의 일주일, 잊지 못할 왕들을 만나다
[북인도 라자 문화기행 ①] 꾸뜹 미나르
▲ 타지마할 ⓒ 이상기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우리 일행 21명은 9일간 인도여행을 다녀왔다. 그러나 가는 날과 오는 날 이틀을 빼면 실제 여행일수는 7일이 된다. 그 7일 동안 우리는 북인도의 대표적인 관광지를 방문할 수 있었다. 중요한 도시로는 델리, 자이푸르, 아그라, 카주라호, 바라나시가 있다. 그중 자이푸르와 바라나시에서 이틀 밤을 자고, 델리와 아그라 그리고 카주라호에서 하룻밤을 잤다.
델리는 한때 무굴제국의 수도였다. 자이푸르는 라자스탄 왕국의 수도였고, 현재도 라자스탄주의 주도(州都)다. 아그라는 인도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졌던 무굴제국의 수도였다. 아그라에는 그 유명한 타지마할(Taj Mahal)이 있다. 카주라호는 950년부터 1050년까지 약 100년간 찬델라(Chandela) 왕조의 수도로 번성했다.
▲ 바라나시의 강가 아르티 ⓒ 이상기
바라나시는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로 유명하다. 전설에 따르면 바라나시는 시바신(Shiva)이 세웠고, 도시의 역사가 7000년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발굴 결과 4000년 전부터 도시가 형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인도인에게 바라나시는 힌두교 최고 성지로 여겨진다. 그것은 힌두교 서사시 <마하바라타>에서 영웅 판다바(Pandava) 형제들이 시바를 찾아 이 도시를 방문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탄 비행기는 예정시간보다 1시간 10분 늦은 오후 2시 30분 인천공항을 출발했다. 그것은 비행기가 미국에서 와 델리로 연결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비행노선은 지도상 중국의 서안과 티벳을 지나 에베레스트 산맥을 넘는 것이 지름길이다. 그런데 우리 비행기는 제주도를 지나 이어도까지 내려간 다음 방향을 서쪽으로 틀어 상해 장가계를 지나간다. 그리고는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를 지나 갠지스강을 따라 델리까지 올라간다.
▲ 인디라 간디 공항 입국장 ⓒ 이상기
델리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8시 20분이다. 한국과 인도의 시차 3시간 30분을 계산하면 비행시간이 9시간 20분이다. 그나마 비자 수속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아 9시 30분에 현지 가이드를 만날 수 있었다. 현지 가이드가 터번을 쓰고 나온 걸 보니 시크교도다. 이름은 꿀빈더 싱이고 나이는 32세였다. 그는 우리를 버스 주차장으로 안내한다. 그리고 버스가 주차장으로 오도록 전화를 한다.
인디라 간디 국제공항의 입국장은 두 가지 점에서 인상적이다. 하나는 비자접수장의 손가락 조각과 연꽃장식이다. 다른 하나는 입국장 앞에서 입국자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팻말과 종이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이다. 지금까지 여행을 하면서 그렇게 많은 환영인파를 본 적이 없다. 그것도 오후 9시 30분에... 공항에는 안개가 자욱하고 인도 냄새가 난다. 안개에는 스모그까지 섞여 있어 건강에도 좋을 것 같지 않다. 델리는 세계적으로 대기오염이 심한 도시로 유명하다.
▲ 안개와 스모그 가득한 공항 ⓒ 이상기
버스에 오르니 가이드가 메리골드 꽃다발을 우리 모두의 목에 하나씩 걸어준다. 메리골드는 인도에서 환영과 존경의 표시로 제공된다. 사람에게는 환영을, 신에게는 존경을 표시한다고 한다. 우리는 공항 서북쪽에 있는 드워르카(Dwarka) 지역 라디손 블루 호텔로 향한다. 40분쯤 지난 10시 20분 호텔에 도착한다. 그리고 바로 식당으로 가 저녁식사를 한다.
인도에서의 저녁식사 시간은 우리나라에서보다 늦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관광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도 사람들이 저녁을 늦게 먹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오후 10시 반 정도에 호텔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첫날부터 우리와 다른 인도식 삶의 방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좋게 말하면 고객 중심의 사회라고 할 수 있다.
꾸뜹 미나르의 역사성
▲ 꾸뜹 미나르와 알라이 문 ⓒ 이상기
다음 날 우리는 오전 7시부터 식사를 한다. 그리고 8시 30분에 호텔을 떠난다. 첫 행선지가 유네스코 세계유산 꾸뜹 미나르(Qutb Minar)다. 꾸뜹 미나르는 꾸뜹과 미나르가 합쳐진 단어로, 꾸뜹은 꾸툽딘 아이박(Qutbuddin Aibak: 1150~1210)을 말하고, 미나르는 첨탑을 뜻하는 미나렛의 인도식 표현이다. 그러므로 꾸뜹 미나르는 꾸툽딘이 세운 첨탑이라는 뜻이다.
꾸툽딘 아이박은 1192년 구리드(Ghuurid) 왕조(879~1215)의 원정대장으로 북인도 지역을 점령하고, 이슬람 세력의 도래를 알리기 위해 꾸와툴 이슬람(Quwwat-ul Islam: 이슬람의 힘) 모스크를 건설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193년 꾸뜹 미나르가 만들어졌다. 꾸와툴 이슬람 모스크와 꾸뜹 미나르는 그곳에 있던 27개 힌두교와 자이나교 사원을 무너뜨리고 그 위에 지어졌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모스크와 미나르는 지금까지 인도에 남아있는 최초의 이슬람 문화유산이다.
▲ 꾸뜹 미나르 ⓒ 이상기
꾸툽딘 아이박은 1199년 델리지역의 왕(Sultan)이 되었고, 1206년 맘룩(Mamluk) 왕조(1206~1290)를 열어 그 시조가 되었다. 그리고 아이박의 사위인 일투트미쉬(Iltutmish)가 1210년부터 1236년까지 통치하면서 2층짜리 꾸뜹 미나르 탑에 3층을 더해 5층짜리 탑으로 완성했다. 이 탑에는 페르시아식 아랍어와 힌두문자가 새겨져 있다. 이 문자를 통해 이 탑이 14/15세기에 수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꾸뜹 미나르는 벽돌로 만든 미나렛으로, 높이가 73m에 이른다. 둥근 탑의 아래 지름이 14.32m, 윗지름이 2.75m로, 아래에서 위로 줄어드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탑 안쪽으로 379개의 원형 계단이 있어 올라갈 수 있다고 하는데, 일반 관광객에게는 개방되지 않는다. 꾸뜹 미나르는 3층까지 붉은 사암으로 만들어졌고, 4층과 5층은 절반 정도가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탑의 중간 중간에는 꾸란 구절이 적혀 있다.
▲ 꾸와툴 이슬람 모스크 ⓒ 이상기
꾸뜹 미나르 주변에는 꾸와툴 이슬람 모스크, 쇠기둥, 알라이 문(Alai Darwaza), 알라이 미나르(Alai Minar) 등이 있다. 일반적으로 꾸뜹 미나르 주변을 꾸뜹 단지(Qutb Complex)라 부르고, 마을까지 포함하는 더 넓은 지역을 메라울리(Mehrauli) 고고학 공원이라 부른다. 메라울리는 1193년 꾸툽딘 아이박에 의해 델리 왕궁으로 만들어졌고, 13세기에는 작은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 후에도 메라울리는 모스크, 궁전, 왕과 성인의 무덤 등이 있는 신성한 장소로 여겨졌다. 그리고 도시의 중심이 올드 델리로 옮겨간 무굴제국 시대에는 왕족의 사냥터와 휴식공원으로 이용되었다. 인도가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간 19세기에는 영국의 관리와 장교 등 상류층 사람들이 주말별장을 짓고, 이곳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그것은 이 지역에 과수원, 연못, 수렵장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찬드라 굽타 2세를 기리기 위한 쇠기둥
▲ 꾸와툴 이슬람 모스크 ⓒ 이상기
꾸뜹 미나르 주변 문화유산으로 가장 규모가 큰 것이 꾸와툴 이슬람 모스크다. 가로 43m, 세로 32m의 회랑형 사각형 건축으로, 가운데 중정 형식의 안뜰이 있고, 사각형 회랑에 기도실이 만들어져 있다. 회랑은 바깥으로 벽이 있고, 그 안쪽으로 세 줄의 석주가 이어져 있다. 석주는 힌두교 사원의 것을 재활용해서, 이슬람 문양과 힌두 문양이 석여있음을 알 수 있다. 사원의 서쪽에 지성소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원형의 아치, 석주, 일부 돔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리고 모스크 한가운데 높이 7.2m의 쇠기둥(鐵柱)이 하나 서 있다. 무게가 6.5t 정도 나가는 이 기둥은 굽타 왕조의 찬드라 굽타 2세에 의해 402년경 만들어졌다. 그리고 10세기경 이곳에 지어진 비쉬누 신전 안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석주의 아랫부분에는 산스크리트어로 새겨진 6행의 명문이 있다.
▲ 찬드라 굽타의 업적을 기리는 쇠기둥 ⓒ 이상기
명문에 따르면, 위대한 왕 찬드라의 명성을 기리기 위해 비쉬누신의 고귀한 철주를 비쉬누파다 언덕에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그는 인도의 사방에 있는 적을 물리치는 대단한 업적을 세웠다. 방갈(Bangal)국과의 전투에서 적을 물리쳤다. 신두강(River Sindhu) 하구에서 발리카스(Vahlikas)를 정벌했다. 그는 용맹함을 떨쳐 남쪽 대양을 평정했다. 그는 대단한 에너지와 열정을 가지고 숲을 불태우듯이 적들을 완전하게 섬멸했다고 한다.
찬드라는 그가 이룬 행동, 그의 명성으로 인해 오랫동안 이 세상 최고의 통수권자로 남을 것이다. 찬드라라는 그의 이름은 보름달처럼 아름다운 그의 용모 때문에 붙여졌다. 그리고 비쉬누신에 대한 그의 믿음은 신앙처럼 확고하다. 그래서 비쉬누 신전을 세우고 그 안에 이 쇠기둥을 세웠다고 적혀 있다.
▲ 알라이 문 ⓒ 이상기
알라이 문은 꾸뜹 미나르 단지의 정문으로, 꾸와툴 이슬람 모스크의 남쪽에 위치한다. 1311년 킬지(Khilji) 왕조의 두 번째 왕 알라우딘 킬지(Alauddin Khilji)에 의해 세워졌다. 이 건물은 터키의 장인들을 초빙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돔과 아치의 형태, 조각 등이 이슬람 건축 양식을 따르고 있다. 이 문 옆에는 이맘 자민(Zamin)의 무덤 건물이 있다.
꾸뜹 미나르 지역을 다 살펴본 우리는 이제 북쪽 지역으로 향한다. 그곳에 짓다가 만 알라이 미나르가 있기 때문이다. 알라이 미나르는, 알라우딘 킬지가 꾸와툴 이슬람 모스크를 두 배로 확장된 후, 그에 걸맞는 미나르를 세우자는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꾸뜹 미나르보다 두 배는 높은 첨탑을 세우려는 의도로 1층 24.5m를 완성했다. 그러나 1316년 알라우딘이 죽으면서 공사는 중단되었고, 그 후 누구에 의해서도 더 이상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 꾸뜹 미나르 단지 개념도. ⓒ 이상기
이곳 메라울리 지역에는 이슬람 모스크, 무덤, 우물 등 고대 이슬람 문화유산이 널려 있다. 그중에서도 무굴제국 초기까지 활동했던 궁정시인 자말리 카말리 모스크가 유명하다. 내부 장식과 그림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근방에는 또 계단식 우물인 바올리(Baoli)가 있다. 수키(Sukhi) 바올리, 간닥 키(Gandhak ki) 바올리가 유명하다. 이들 우물을 통해서도 이 지역에 많은 사람들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하우지 샴시(Hauzi Shamsi) 같은 저수지도 있다. 이 저수지는 1230년 일투트미쉬가 신의 계시를 받아 이곳에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처럼 역사성이 있고 가치 있는 문화유산이 버려져 있는 듯하다. 꾸뜹 미나르 지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관리가 안 되고 있는 형편이다. 그것은 현재 인도가 힌두교 국가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현재 인도에서 힌두교도 80% 정도 되고, 이슬람교도는 14% 정도 된다. 그 때문인지 이슬람 문화유산이 상대적으로 천대받고 있는 듯하다.
덧붙이는 글
'북인도 라자 문화기행'이라는 이름으로 인도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살펴보려고 한다. 여기서 라자는 왕을 말한다. 그러므로 궁정과 사원 등 인도 역사 속 위대한 왕들이 만들어놓은 유산이 주 논의 대상이 될 것이다. 지역적으로는 북인도 지역이 대상이지만, 박물관의 문화유산을 통해 인도 전체를 다룰 수도 있고,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 등 특정 종교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시대적으로는 고대 인더스 문명으로부터 현재 인도 이야기까지 다루려고 한다. 이번 연재는 20회 정도 이어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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