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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전 100만명 학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길바닥 여행자의 '실시간 여행기'] 여행 491일차, 게으른 여행자들의 낙원 르완다

등록|2016.02.09 16:15 수정|2016.02.17 10:58
2014년 9월 21일 한국을 떠나 지금도 세계여행 중인 김동범씨의 '실시간 여행기'를 싣습니다. 현지에서 보내온 생생한 여행기를 앞으로 계속 다룰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편집자말]

▲ 르완다는 안전하고 깨끗한 나라다. ⓒ 김동범


▲ 키부 호수는 물이 매우 맑았다. ⓒ 김동범


르완다는 아프리카 내에서도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안전하고 깨끗한 나라다. 그런데  아프리카에서 안전한 나라, 천 개의 언덕이 있는 아름다운 나라가 아닌 동족간 학살로 더 유명하다. 학살이라고 하면 쉽게 와 닿지 않는데, 숫자를 확인하면 놀랄 수밖에 없다. 흔히 말하는 '르완다 학살'이 있었던 1994년 당시 80일간 무려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세계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이 끔찍하고, 비극적인 역사는 오래 전 이야기가 아니다. 불과 20여 년 전, 르완다는 지옥이었다.

동아프리카 비자(케냐, 우간다, 르완다)를 가지고 있던 나는 르완다에 쉽게 입국했다. 그리고 수도 키갈리(Kigali)에 도착하자마자 버스를 타고 서쪽에 있는 기세니(Gisenyi)로 향했다. 지도를 대충 보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라 만만히 봤는데 기세니까지 5시간이나 걸렸다.

기세니는 콩고 민주 공화국(DRC)의 고마(Goma)와 국경을 접하는 곳으로 키부 호수나 근처에 있는 화산을 오르기 위해 여행자가 찾는 곳이다. 가볍게 동네를 산책한다는 마음으로 키부 호수 부근을 걸었는데 물이 매우 맑았고, 아프리카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쓰레기가 하나도 없었다. 또한 이 주변은 잘 꾸며져 있어 여느 유명한 해안가 못지 않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게다가 호수 부근은 부촌인지 거대한 정원을 가지고 있는 근사한 집이 많았다.

아프리카에서 안전하고 깨끗하기로 손꼽히는 르완다

케냐 나이로비에서 잠깐 만났던 한국인 여행자 다미씨를 기세니에서 다시 만났다. 나이로비에서 뜻하지 않게 오래 머물게 돼 다시 만나기 힘들 줄 알았는데, 다행인지 아주 천천히 느긋하게 여행하는 성향이라 따라잡을 수 있었다. 물론 나도 느릿느릿 여행하고 있었지만.

우리는 키부 호수를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콩고 민주 공화국 국경 앞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국경은 가까이에 있었다. 콩고 민주 공화국의 동쪽은 내전이 끊이지 않아 여행자가 접근하기 힘드나 고마는 그나마 안전한 데다가 활화산을 보기 위해 여행자들이 찾는 편이다.

가보고 싶긴 했었지만 당장 비자 문제가 걸려 국경에서 돌아섰다. 아프리카에서 국경을 넘을 때면 대충 나무로 된 막대기 몇 개로 가로막은 허술한 국경이 많이 보였는데 여기는 뭔가 다른 나라의 국경처럼 사무실도 잘 갖춰져 있고 깨끗했다. 기세니는 하루 걸었을 뿐인데 다 파악한 느낌이 들었다. 고마로 넘어가지 않는다면 딱히 오래 머물만한 도시는 아니었다.

▲ 내장꼬치 ⓒ 김동범


불행하게도 르완다 음식은 맛이 없었다. 처음에는 멜랑제라고 부르는 르완다식 뷔페도 싸고 괜찮다고 생각했고, 내장꼬치 진가로도 먹을 만하다 생각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자 달리 먹을 게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며칠이 지나자 생존을 위해 아무 맛도 안 나는 무언가를 씹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만큼 먹을 게 없었다.

기세니에서는 오래 머무르지 않고 바로 떠났다. 떠나는 날 숙소에서 콩고인들과 인사를 나눴는데 프랑스어를 모르니 의사소통이 아예 불가능했다. 콩고 민주 공화국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았는데 아쉬웠다.

키부예(Kibuye)로 가는 버스는 새벽에 있다고 해서 오전 6시에 숙소에서 나왔다. 막상 버스터미널에 도착해서 보니 삐끼들은 버스는 이미 떠났고 오늘은 없으니 무항가(Muhanga)로 가서 키부예로 갈아타야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미심쩍어 다른 사람에게 재차 물어보니 버스가 있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무항가로 가서 키부예로 가는 게 더 나았을지도. 7시에 출발한 마타투(미니 밴)는 비포장산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몸이 흔들리는 와중에 옆에서 토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바나나로 만든 술을 마시며 지들끼리 신나서 춤추는 사람들도 있었다.

▲ 루벤게라 버스터미널. ⓒ 김동범


▲ 기세니 버스터미널. ⓒ 김동범


세상에, 아무리 산길이라고 하지만 불과 80km 떨어진 곳이 무려 7시간이나 걸릴 줄은 몰랐다. 그것도 키부예가 아닌 루벤게라(Rubengera)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한 후 다시 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

똑같은 키부 호수를 품고 있는 도시였지만 키부예는 기세니와는 전혀 다른 경치를 보여줬다. 키부예에 자리잡고 있는 산은 호수를 여러 모양으로 가뒀고, 이는 키부 호수 규모가 작아 보이는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배낭을 메고 올라간 곳에는 우리가 묵을 숙소 홈 세인트 진(Home St Jean, 아니 르완다는 프랑스어를 쓰니 홈 생 장이 더 정확할 것 같다)이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림 같은 풍경과 적당히 고급스러운 숙소였는데 배낭여행자를 위한 도미토리가 있는데다가 가격도 4500원 정도로 매우 저렴했다. 식당도 근사했다. 키부예로 오는 길은 무척 험난해 투덜거리기만 했지만 도착한 이후로는 감탄만 나왔다. 이곳이야말로 나처럼 늘어지기 좋아하는 게으른 여행자가에게 최적의 장소가 아닌가 싶었다.

▲ 키부예에서 바라보는 키부 호수. ⓒ 김동범


▲ 키부 호수. ⓒ 김동범


아침에는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호수 아래로 내려가봤다. 사실 숙소에서부터 이어진 길은 호수아래로 이어졌지만 딱히 볼 만한 요소는 없었다. 호수에서 노니는 물고기 몇 마리와 옆에서 쉬지 않고 풀을 뜯고 있는 소를 구경하다가 올라왔다.

분명 처음에는 키부예가 마음에 든다 말했지만, 사실 이곳은 놀랄 만큼 규모가 작은 마을이라 너무 심심했다. 르완다 서부 주의 주도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버스를 타고 지나온 시골 마을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게다가 마을에 몇 개 없는 식당에서 전부 똑같은 르완다식 뷔페만 팔았다. 음식이 맛없는 나라에서 매일 똑같은 것만 먹고 지내는 건 질리기가 훨씬 쉬웠다.

▲ 르완다식 부페. ⓒ 김동범


르완다에서 가장 놀랐던 점을 꼽으라면 나는 어둠을 환하게 밝혀주는 가로등이라고 말하고 싶다. 르완다는 아프리카에서 분명 부자 나라도 아닌데 가로등이 항상 켜져 있었다. 이게 뭐 대단한 거라고 하겠지만 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유명무실한 가로등을 너무 많이 봤다. 한 나라의 경제력이 집중된 수도도 예외가 아니었다.

숙소에서 늘어져 앉아 맥주를 마시거나 멍하니 호수를 바라보던 것도 3일, 아무리 이곳에 볼 게 없다지만 잠시라도 걸어 보고 싶었다. 게으른 여행자가 가끔씩 느끼는 일종의 죄책감이랄까.

한적한 산길을 따라 걸었다. 뭔가를 기대했던 것은 아니지만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 게다가 르완다 사람들은 나를 빤히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네곤 했다. 호수 근처에서 보트를 타지 않겠냐고 다가오는 삐끼가 반가울 정도였다.

원래는 1시간 정도만 걷다가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중간에 등산로처럼 보이던 산 위로 올라가는 길이 보여 좀 더 걷기로 했다. 어디선가 북을 치며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이 있어 구경이라도 할 겸 빤히 쳐다봤는데 "머니"라고 앵무새처럼 말했다. 여행자가 별로 없는 곳인데도 외국인을 돈으로 보다니 조금은 씁쓸했다. 산을 돌고 돌아 거의 4시간 만에 돌아왔다.

키부예에서 보다보다(오토바이 택시) 운전사는 그리 좋은 직업이 아닌 것 같다. 우리만 하더라도 늘 걸어 다녔으니.

키부예에서도 학살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 교회 앞에는 '네버 어게인'이라는 글자와 함께 당시 학살을 당한 사람들의 해골이 있었다.

1994년 '르완다 학살'을 기억하는 추모 박물관

▲ 키갈리에서 처음으로 호스텔 영업을 시작한 디스커버 르완다 유스호스텔. ⓒ 김동범


키부예에서 4일을 지낸 후 수도 키갈리로 돌아왔다. 나만 먼저 키갈리로 이동해 다미씨와는 여기서 헤어졌다. 르완다에서는 사람들이 버스 타는 게 익숙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언덕을 오르내리느라 흔들리는 탓인지 여기저기서 토했다. 그것도 내 앞과 뒤에서. 어쨌든 키갈리로 돌아온 후 버스와 사람으로 뒤엉켜있는 복잡한 버스터미널을 한참 바라보다가 걷기 시작했다.

숙소도 찾을 겸 키갈리도 구경하겠다는 마음으로 걸었는데 몇 분이 지나자 잘못된 판단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천 개의 언덕이 있는 나라, 당연히 키갈리도 무수히 많은 언덕으로 이뤄진 곳이다. 오기가 생겨 3시간 동안 걷긴 했는데 땀이 주르륵 흐르는 걸 보니 그냥 보다보다를 탈 걸 그랬나 보다. 그렇게 힘들게 찾아갔건만 있어야 할 호스텔이 보이지 않자 결국 보다보다를 타고 이동했다.

내가 찾아간 곳은 키갈리에서 처음으로 호스텔 영업을 시작한 디스커버 르완다 유스호스텔이었다. 키갈리에 도착하니 엄청나게 비싼 물가에 놀랐다. 기세니와 키부예에서는 3000프랑에 하루를 묵을 수 있었는데 여기는 무려 1만 2000프랑(약 2만원)으로 4배나 비쌌다. 게다가 맥주는 어찌나 비싸던지. 키갈리를 빨리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 키갈리 제노사이드 메모리얼. ⓒ 김동범


다음날 숙소에서 만난 핀란드인 티모 아저씨와 미국인 탐과 함께 키갈리 제노사이드 메모리얼(Kigali Genocide Memorial)을 찾았다. 평소라면 박물관은 가볍게 지나칠 테지만 르완다에서는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이 바로 이곳, 학살 추모 박물관이었다. 무료로 운영되는 이곳은 학살이 일어나기 전후의 역사와 당시 상황을 담고 있다.

제 3자가 보기에 학살은 너무 어처구니 없다. 그만큼 학살 과정이 납득할 수 없는 데다가 너무 끔찍하다. 학살의 근간은 아프리카를 마구잡이로 다뤘던 서구의 식민지 정책에 있다.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망한 후 르완다를 넘겨 받은 벨기에는 후투족과 투치족으로 인종을 구별하고, 투치족만 지배계층으로 이용한다. 르완다 사람이 봐도 거의 차이가 없는데도 말이다. 갈등은 점차 쌓여만 갔고, 서로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갈등은 1994년에 폭발한다. 르완다와 부룬디 대통령이 비행기 요격 사건으로 사망한 후, 후투족은 마구잡이로 투치족을 죽이기 시작했다.

당시 학살이 얼마나 끔찍했냐면 총과 수류탄으로 사람을 죽이다가 이도 아깝다 여겨, 나무나 풀을 베는 데 쓰는 정글도 마체테를 휘둘러 사람을 죽였다. 그래서 머리 쪽이 함몰된 해골을 많이 볼 수 있으며, 살아 남은 사람 중 일부의 머리가 갈라진 것도 칼에 맞았기 때문이다. 바로 옆집의 이웃이, 친구가 갑자기 살인자로 변했다.

거리에는 시체가 즐비했으며, 이웃나라 자이르(콩고 민주 공화국의 옛 이름)로 향하는 난민의 숫자는 300만 명이 넘었다. 믿기 힘들겠지만 80일간 100만 명이 죽었다. 또한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도 많은 고통이 뒤따랐다. 아이들은 부모와 떨어져 대부분 다시 만나지 못했고, 많은 여자들이 강간을 당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에이즈에 감염되었다고 한다.

건물의 1층에는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과 끔찍한 사진이 전시되어 있고, 2층에는 세계 여러 나라의 학살과 함께 당시 학살을 당한 아이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특히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들 사진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는데 아래에는 가장 좋아하던 음식, 놀이 등과 함께 어떻게 죽임을 당했는지 적혀있었다. 어떻게 한 나라에서 그것도 민간인끼리 이런 끔찍한 학살이 벌어졌는지 모르겠다. 당시 UN을 비롯한 선진국들은 르완다가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 키갈리의 모습. ⓒ 김동범


▲ 키갈리에서는 헬멧 착용이 의무화되어 있다. ⓒ 김동범


제노사이드 메모리얼을 둘러본 후 나와 탐은 영화 <호텔 르완다>의 실제 장소인 호텔 밀 콜린스(Hotel Des Mille Colines)까지 걷기로 했다. 키갈리 역시 아프리카 여느 도시와 다르지 않는 혼잡스러움이 느껴지지만 거리 곳곳에 있는 무장을 한 군인(흔히 치안이 안 좋은 나라는 가게마다 사설 가드가 있다)이 지켜보고 있고, 예쁘게 꾸며놓은 정원이 눈에 띄었다.

또한 보다보다를 타더라도 무조건 헬멧 착용이 의무화되어 있다. 아프리카에는 르완다보다 국력도 강하고 경제력도 높은 나라가 많은데 대부분 시민의식이 낮거나 석유나 다이아몬드 같은 자원 때문에 내전이 끊이지 않는다. 반면 르완다는 쓰레기를 아무데나 버리지 않는데다가 비닐봉지 사용이 금지돼 있으며(슈퍼에서도 종이봉투를 준다), 버스를 타는 사람들은 줄을 선다. 밤이 되면 가로등이 거리를 밝혀주니 위험하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우리는 걸어서 언덕을 올랐다. 우리가 지나갈 때마다 인사를 하거나 미소를 보냈다. 오히려 다른 도시보다 키갈리 사람들이 더 친절하게 느껴졌다.

▲ 영화 <호텔 르완다>로 알려진 밀 콜린스 호텔. ⓒ 김동범


▲ 밀 콜린스 호텔. ⓒ 김동범


영화 <호텔 르완다>로 알려진 밀 콜린스 호텔. 르완다 학살이 있었던 당시 이곳에서 일하던 지배인이 약 1200명에 달하는 사람을 숨겨 그들의 목숨을 구했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던 그 상황에도 이 호텔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벨기에 국영기업의 호텔이었기 때문이다. 한쪽에는 '네버 어게인'과 당시 근무했던 직원들의 이름이 적힌 동판이 있다.

호텔 안에 들어가 수영장이 있는 정원과 바를 구경한 후 나왔다. 돌아가는 길은 보다보다를 이용했다. 보다보다 가격은 보통 500~700프랑 정도로 도시 곳곳을 움직일 수 있었다. 저녁에는 티모 아저씨와 탐 그리고 르완다 현지인 나디아와 함께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너무나 당연하지만 아프리카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환한 거리가 인상적이었다. 가끔씩 조깅을 하는 외국인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거리는 깨끗하고 현대식 건물이 곳곳에서 올라가고 있다. 이쯤 되면 궁금하다. 20년 전 지옥을 경험한 르완다는 어떻게 민족 갈등을 봉합했을까? 아프리카에서 그리 부유한 나라도 아닌데 어떻게 기반 시설이 잘 갖추게 되었을까? 물론 상대적이긴 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쓰레기통도 제대로 찾기 힘들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정말 놀라웠다.

아프리카에서 만난 아름다운 야경

▲ 키갈리의 야경은 매우 특별하다. ⓒ 김동범


▲ 저녁으로 현지 주점에서 염소꼬치와 함께 맥주를 마셨다. ⓒ 김동범


키갈리의 야경은 매우 특별하다. 화려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언덕에 있는 집들로 인해 바로 코앞에 별이 박혀 있는 것처럼 반짝이는 야경을 선사한다.

우리는 저녁을 먹지 못해 현지 주점에 가서 염소꼬치와 함께 맥주를 마셨다. 여기서 맥주를 마시다 우연히 중국어 얘기가 나왔고 내가 한국어는 다르다는 것을 설명하다가 한글은 24자 밖에 없어서 구조만 이해하면 어떻게 읽고 쓰는지 알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물론 다들 믿지 못했다. 간단하게 어떤 소리가 나는지 알려주고 읽는 방법을 설명해줬는데 놀랍게도 바로 글자를 쓰고 나에게 맞냐고 물어봤다.

▲ 국립공원 아카게라에 갔다. ⓒ 김동범


차를 렌트해서 여행하고 있던 티모 아저씨가 자신의 차로 사파리를 같이 가자고 꼬셔서 키갈리에서 하루 더 머물게 되었다. 우리는 오전 6시에 르완다에서 가장 큰 국립공원 아카게라(Akagera National Park)로 향했다.

케냐에서는 자전거를 타고 사파리를 돌아봤기에 이번에는 조금 더 편할 줄 알았다. 하지만 지프가 아니라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돌아다니는 건 쉽지 않았다. 가장 먼저 만난 동물은 바분이었다. 국립공원 입구에서부터 만났는데 사람을 보더니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 바분 ⓒ 김동범


▲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건 얼룩말이었다. ⓒ 김동범


역시 여기서도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건 얼룩말이었다. 분명 귀엽긴 한데 이제는 슬슬 질리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아카게라 국립공원에는 맹수가 거의 없다.

오랫동안 동물은 못 보고 차 안으로 들어온 벌레와 사투를 벌이기만 했다. 호수 근처에도 악어나 하마가 없어 실망을 한 채 차에 오르려던 순간 커다란 코끼리가 우리쪽으로 향해 걸어왔다. 우리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코끼리를 지켜봤다. 보통 코끼리들은 무리 생활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찌된 일인지 한 마리만 와서 나뭇잎을 뜯어 먹었다.

▲ 코끼리 한 마리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 김동범


▲ 동물도 우리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 김동범


우리가 동물을 신기하게 쳐다보는 것처럼 동물도 우리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물 속에서 얼굴만 살짝 내밀던 하마는 볼 수 있었지만 끝내 악어는 볼 수 없었다. 임팔라를 보는 것을 끝으로 출구로 향했다. 아무래도 일반 차량으로는 북쪽까지 올라가기 힘들었다. 나야 입장료만 내고 사파리를 구경하긴 했지만 여러모로 아쉽긴 했다. 이미 케냐에서 얼룩말이나 임팔라 등 동물을 많이 봐서인지도 모르겠다. 돌아오는 길은 정말 피곤했다. 오전 6시에 나가 키갈리에 도착한 시각이 8시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도착하자마자 난 탄자니아 므완자(Mwanza)로 가는 버스를 예약하기 위해 보다보다에 올라탔다. 버스터미널에 도착해 버스를 보니 므완자는 물론이고 모시(Moshi)나 다르에스살람(Dar Es Salaam)으로도 갈 수 있었다. 다만 다르에스살람까지 27시간이 걸린다는 말에 므완자까지만 가겠다고 했다. 므완자까지도 12시간 이상 걸릴 텐데, 라고 당시엔 생각했다.

▲ 중국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은 뒤 와인을 몇 잔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 김동범


하루 종일 쫄쫄 굶은 우리는 바로 앞에 있는 중국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은 뒤 와인을 몇 잔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다들 들어가 잤지만 나는 숙박비를 조금만 내는 조건으로 바깥에서 있었다. 사파리를 다녀온 후 한숨도 못 잤지만 오전 3시에 나가야 해 비싼 호스텔에서 하루 묵는 게 너무 아까웠다. 내가 있던 방에 전기도 안 들어와 조금 따졌더니 5달러만 내고 머무르라고 했다. 오전 4시 국경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고,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3시간 뒤에 도착한 국경은 내가 봤던 아프리카의 어떤 곳보다도 깨끗했고, 거대했다. 근처에 폭포가 있어서 안개가 자욱했다. 버스는 달리고, 또 달리고, 어느 곳에서 다른 버스로 갈아탄 뒤 또 달렸다. 12시간 걸릴 것이라고 순진하게 생각했던 나는 18시간이 지난 오후 11시가 되어서야 므완자에 도착했다.

▲ 오전 4시 국경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 김동범


▲ 근처에 폭포가 있어서 안개가 자욱했다. ⓒ 김동범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개인 블로그(http://www.likewind.net/1320)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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