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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서평] 한국사에 대한 거의 모든 지식 <조선의 왕 이야기>

등록|2016.02.02 17:57 수정|2016.02.02 17:57
하얀 쌀밥이었습니다. 몇 번 우물우물 씹다 꿀꺽 삼켰습니다. 잠시 후, 허기졌던 배는 점차 불러왔지만 별다른 맛은 느낄 수 없습니다. 몹시도 허겁지겁 먹었던 모양입니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선생님이 한 말씀하셨습니다. 제대로 씹지도 않고 꿀꺽 삼키지 말고 천천히, 좀 더 오랫동안 씹어 보라고 했습니다.

개구지기 이를 데 없지만 선생님 말씀이라면 무조건 잘 듣던 악동(惡童)시절이었습니다. 하나, 둘, 셋, 넷… 서른, 씹는 횟수를 세가며 천천히 오랫동안 씹었습니다. 그렇게 얼마를 더 씹자 아무런 맛도 나지 않았던 밥에서 단맛이 났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별다른 맛이 없는 쌀밥도 오래오래 씹으면 단맛이 난다는 것을 몸으로 읽었습니다.

역사도 그런 가 봅니다. 시험을 보기위해 벼락치기로 하던 역사에서는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역사에 담겨있을 교훈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배가 고프니 밥을 먹듯, 시험을 봐야하니 할 수밖에 없어서 하는 역사공부는 꿀꺽꿀꺽 삼키는 밥알 같았습니다. 역사에 나오는 왕들, 그 왕들한테 드리워 있는 삶과 역사, 교훈과 가치조차도 꿀꺽 삼키던 밥알처럼 그냥 꿀꺽 외우는 게 전부였습니다.

광해군부터 순종까지 <조선의 왕 이야기>

▲ <한국사에 대한 거의 모든 지식 - 조선의 왕 이야기(하)>(지은이 박문국 / 펴낸곳 소라주 / 2016년 1월 15일 / 값 14,800원> ⓒ 소라주

<한국사에 대한 거의 모든 지식 - 조선의 왕 이야기(하)>(지은이 박문국, 펴낸곳 소라주)에서 읽는 왕들 이야기는, 악동시절, 씹는 횟수를 세가며 꼭꼭 씹었던 쌀밥에서 우러나던 단맛 같은 역사입니다.

조선역사는 27명의 왕이 재위한 역사입니다. 책에서는 광해군부터 순종까지, 13명의 왕이 왕으로 살아가며 그리기도 하고 남기기도 한 삶, 가치, 통치철학, 고뇌, 역사적 교훈까지를 골고루 우려내고 있습니다.

왕들 중에는 두고두고 칭송받는 왕이 있는가하면 그렇지 못한 왕도 있습니다. 성공한 왕이 있는가 하면 쫓겨나야만 했던 왕도 있습니다.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은 가장 존경하는 조선시대의 왕으로 '광해군'을 꼽았다고 합니다.

세자 시절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힘썼던 광해군. 그러나 무리하게 구궐 재건 사업을 벌이는 그에게서 과거의 총명함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변하게 한 것일까요?

이에 대해서는 광해군의 전쟁 후유증을 주된 원인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의학적으로 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 부르는 그것이지요. - <조선의 왕 이야기(하) 26쪽

하지만 우리역사가 기록하고 있는 광해군은 '왕'이 아니라 권좌에서 쫓겨난 군주, 준입니다. 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고 있는 광해군이 그 엄청난 권좌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많은 이유들 중 하나는 광해군 자신으로부터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광해군이 몰락한 까닭

성장 과정이나 생활환경은 누구에게나 다 중요합니다. 성장과정이나 생활환경은 가치를 형성하는 토대가 되고 문화를 이해하는 바탕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향력이 막대한 지도자는 그 성장과정과 생활환경이 더더욱 중요합니다.

역사에서 광해군이 그렇게 몰락할 수밖에 없었던 많은 이유 중 하나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꼽듯, 먼 후일, 작금 최고지도자의 삶 또한 어머니를 잃은 충격, 아버지의 군력을 앗아간 10.26이라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기록하는 건 아닌지가 염려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정조가 책에만 빠져 산 공붓벌레 같지만, 그는 직접 장용영의 병사들을 훈련할 정도로 무예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특히 활 솜씨가 뛰어났는데 화살 50발을 쏘면 그중 49발을 명중시킬 정도였지요. 빗나간 한 발도 일부러 명중시키지 않은 것입니다. '군주는 재능을 자랑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지요. 덕분에 태조 이성계의 현신이라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 <조선의 왕 이야기(하) 220쪽

"(중략) 그런데 지난번에 우리나라 국경을 벗어나서 도중에 하얼빈을 지나다가 짐의 고약한 백성(안중근)의 흉측한 손에 상하여 갑자기 세상을 떠날 줄을 어찌 생각하였겠는가? 이제 그의 장례하는 날을 다하고 보니 마음이 더욱 아프다." <순종실록> 순종 2년(1909) 11월 4일 -<조선의 왕 이야기(하) 344쪽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위대하고 무한한 존경을 받는 건 항상 '나'보다는 '자식'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개혁군주로 널리 알려진 정조가 시대를 더해가며 점차 그 지지를 더해가고 있는 건 무지막지한 개혁군주가 아니라 일부러 화살 한발을 빗나게 쏠 수 있는 겸손한 마음, 그 겸손한 마음을 정치력으로 옮긴 실천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런 왕이 있는가 하면 당신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나라를 찾겠다고 목숨을 걸고 나섰던 안중근 같은 이를 '고약한 백성' 쯤으로 폄훼하던 왕도 있었으니 책에서 읽을 수 있는 조선의 왕들은 단순한 쌀밥 맛이 아니라 13가지 잡곡으로 지은 잡곡밥만큼이나 다양합니다.  

조선의 왕, 그 왕들 이야기를 담은 책들은 많습니다. 이 책 또한 그 많은 책들 중 하나에 속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읽어보면 다를 겁니다. 우물우물 꿀꺽 삼키던 쌀밥 맛이 아니라 오묘한 단맛과 오도독 거리며 씹히는 식감까지도 함께 느낄 수 있는 맛난 조선의 왕 이야기가 될 거라 기대됩니다.
덧붙이는 글 <한국사에 대한 거의 모든 지식 - 조선의 왕 이야기(하)>(지은이 박문국 / 펴낸곳 소라주 / 2016년 1월 15일 / 값 14,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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