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름살이 질 틈 없는 맑은 얼굴은
[시골에서 시읽기] 유종인, <얼굴을 더듬다>
아이들 손이나 볼을 살살 쓰다듬다가 문득 놀랍니다. 아이 손이나 볼이란 이렇게 보드랍구나 하고. 그렇다고 어른인 내 손이나 불은 꺼칠하거나 울퉁불퉁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음속에 근심이나 걱정을 담지 않으면서 밝게 웃으면서 삶을 짓는 사람이라면 나이가 많이 들어도 살결이 보드랍기 마련이라고 느껴요. 늘 물이나 흙을 만지는 할매나 할배여도 마음 가득 기쁨이 흐르는 웃음이라면, 주름살이 아닌 보드라운 살결이 되지 싶습니다.
하루는 눈물 글썽한 상거지가 다녀갔다 // 또 하루는 꽃도 없이 바위가 그늘졌다 / 오늘은 술이나 받게 (마음)
땅이야 나눈다지만 하늘을 나눌 순 없어 // 성북동 옛집 담장에 화분들이 올라 있다 (경계의 꽃밭)
인천에서 나고 자라며 시를 쓰는 유종인 님이 빚은 <얼굴을 더듬다>(실천문학사, 2012)를 읽습니다. 잠자리 이불깃을 여미면서 아이들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이 시집을 떠올리고, 밤에 아이들이 이불을 걷어찰 적에 주섬주섬 이불을 끌어모아 다시 덮어 주면서 이 시집을 돌아봅니다.
'얼굴 더듬기'는 사람마다 달라요. 그냥 얼굴을 더듬어 볼 수 있고, 떠오르지 않는 모습을 더듬듯 그릴 수 있습니다. 따스한 손길로 살그마니 더듬을 수 있고, 아무 느낌이나 생각이 없이 그저 더듬을 수 있어요. 내가 내 얼굴을 문지르거나 비빌 적에도 아무 생각 없이 문지를 수 있고, 내가 나를 사랑하는 손길로 비빌 수 있습니다.
징검돌을 건너가는 여름 아이의 발뒤꿈치, / 바람에 멱을 감는 미루나무 휘인 허리를 / 저 해는 지지도 않고 첫날밤처럼 붉게 샜다 (이발소 그림을 보다)
꽃게에 물린 손가락 가만히 들여다보니 // 새만금 변산 앞바다 // 내 떠날 줄 미리 알고 // 썰물로 // 빠질 리 없는 // 이정표를 박았구나 (꽃게에 물린 자국)
<얼굴을 더듬다>를 다 읽고 나서 보니, 이 책에 깃든 노래는 '시조'라고 합니다. <얼굴을 더듬다>는 시조집이라 하는군요. 문득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시인들 시조인들 그리 대수로울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시도 시조도 모두 우리 삶을 기쁨으로 노래하고 슬픔으로 달래면서 빚는 글일 테니까요. 글 한 줄에 웃음을 싣고, 글 두 줄에 슬픔을 담으면서, 글 석 줄에 이야기꽃이 피어나도록 하는 시요 노래라고 느낍니다.
싸락눈이 내리치니 // 겹처마가 떠올랐다 // 싸락눈이 쳐대니 // 나막신이 걸어왔다 (싸락눈)
겨울에 아침저녁으로 밥을 지을 때에는 손을 빠르게 문지릅니다. 아무래도 겨울에는 손이 곱기 때문입니다. 곱은 손을 비빔질로 녹인 뒤 불을 올리고 도마질을 합니다. 뜨거운 물을 틀어서 틈틈이 손을 녹이면서 푸성귀를 다듬고 국을 끓입니다. 행주로 밥상을 훔치고 수저를 올립니다. 바야흐로 밥을 다 차리면 큰 소리로 아이들을 부르지요.
이제 아이들은 의젓하게 자라서 깔개도 스스로 놓고 손도 스스로 씻습니다. 한두 해 앞서까지만 해도 아이들 손이랑 낯을 모두 씻겨야 했으나, 이제는 말로만 타일러도 되어요.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아이들 몸짓을 바꿉니다. 내 손에서 태어나는 밥 한 그릇이 아이들 몸으로 스며듭니다.
밥상맡에 다 같이 둘러앉은 뒤 국그릇을 두 손으로 고이 감쌉니다. 따스한 기운이 손바닥으로 들어와서 온몸으로 퍼집니다. 나는 이 두 손으로 일을 하고, 바람을 어루만지며, 기저귀를 빨았고, 이불을 건사하고, 살림을 돌봅니다. 귀가 간지럽다 하면 귀를 파 주고, 손톱이 자라면 손톱을 깎습니다. 나이에 따라 손에도 낯에도 몸에도 주름이 질는지 모르지만, 온누리 모든 어버이는 주름살마다 아이들하고 누린 삶이 사랑스러운 결로 깃들리라 느껴요.
아파트 육 층까지 비질 소리 올라온다 // 귀뚜리가 // 지구 위에 두 줄 수염을 내려놓고, // 뭘 쓸까 // 고민하다가 // 빈 마당에 // 소스라친다 (비질 소리)
누군가 내다 놓은 깨진 거울 속으로 // 문짝을 두드리듯 가만히 눈발 친다 (들판의 거울)
새롭게 하루를 열면서 <얼굴을 더듬다>에 흐르는 노랫가락을 가만히 읊어 봅니다. 이제 겨울이 저물려 하고 봄이 오려 합니다. 아침에 마당에서 노는 작은아이가 묻습니다. "아버지, 이제 봄이야?" "음, 아니. 아직 겨울이고, 봄이 오는 문턱이야."
아이한테 '봄이 오는 문턱'이라고 말하다가 불현듯이 놀랍니다. 나는 이 말을 아주 오랜 옛날부터 들었다고 느껴요. 아마 내가 아기였을 무렵 둘레 어른들이, 또 우리 어버이가 '봄이 오는 문턱'이라고 말했을 테지요. 그냥 '봄이 온다'고 할 수 있는데, 누군가 '봄이 오는 문턱'이라 말했고, '봄이 문지방을 타고 넘는다' 같은 말꽃을 피웁니다. '봄바람이 귀를 간질인다'라든지 '봄볕에 옷섶이 짧아진다'고도 해요.
유종인 님이 아파트 육층에서 비질 소리를 노랫소리로 듣듯이, 슥슥거리는 소리가 온 지구를 쩌렁쩌렁 울린다고 느끼듯이, 우리 삶자락은 온통 시로 태어날 소리요 결이요 무늬요 사랑이며 살림이지 싶습니다. 시골집 마루문을 때리는 눈발은 사라지고, 길게 드러눕던 겨울 그림자도 짧아집니다. 낮에는 처마 밑으로 햇볕이 들지 않아요. 해가 차츰 높아집니다. 나무마다 겨울눈이 봉긋봉긋 이쁘게 돋는 겨울 끝자락입니다.
▲ 겉그림 ⓒ 실천문학사
땅이야 나눈다지만 하늘을 나눌 순 없어 // 성북동 옛집 담장에 화분들이 올라 있다 (경계의 꽃밭)
인천에서 나고 자라며 시를 쓰는 유종인 님이 빚은 <얼굴을 더듬다>(실천문학사, 2012)를 읽습니다. 잠자리 이불깃을 여미면서 아이들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이 시집을 떠올리고, 밤에 아이들이 이불을 걷어찰 적에 주섬주섬 이불을 끌어모아 다시 덮어 주면서 이 시집을 돌아봅니다.
'얼굴 더듬기'는 사람마다 달라요. 그냥 얼굴을 더듬어 볼 수 있고, 떠오르지 않는 모습을 더듬듯 그릴 수 있습니다. 따스한 손길로 살그마니 더듬을 수 있고, 아무 느낌이나 생각이 없이 그저 더듬을 수 있어요. 내가 내 얼굴을 문지르거나 비빌 적에도 아무 생각 없이 문지를 수 있고, 내가 나를 사랑하는 손길로 비빌 수 있습니다.
징검돌을 건너가는 여름 아이의 발뒤꿈치, / 바람에 멱을 감는 미루나무 휘인 허리를 / 저 해는 지지도 않고 첫날밤처럼 붉게 샜다 (이발소 그림을 보다)
꽃게에 물린 손가락 가만히 들여다보니 // 새만금 변산 앞바다 // 내 떠날 줄 미리 알고 // 썰물로 // 빠질 리 없는 // 이정표를 박았구나 (꽃게에 물린 자국)
<얼굴을 더듬다>를 다 읽고 나서 보니, 이 책에 깃든 노래는 '시조'라고 합니다. <얼굴을 더듬다>는 시조집이라 하는군요. 문득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시인들 시조인들 그리 대수로울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시도 시조도 모두 우리 삶을 기쁨으로 노래하고 슬픔으로 달래면서 빚는 글일 테니까요. 글 한 줄에 웃음을 싣고, 글 두 줄에 슬픔을 담으면서, 글 석 줄에 이야기꽃이 피어나도록 하는 시요 노래라고 느낍니다.
싸락눈이 내리치니 // 겹처마가 떠올랐다 // 싸락눈이 쳐대니 // 나막신이 걸어왔다 (싸락눈)
겨울에 아침저녁으로 밥을 지을 때에는 손을 빠르게 문지릅니다. 아무래도 겨울에는 손이 곱기 때문입니다. 곱은 손을 비빔질로 녹인 뒤 불을 올리고 도마질을 합니다. 뜨거운 물을 틀어서 틈틈이 손을 녹이면서 푸성귀를 다듬고 국을 끓입니다. 행주로 밥상을 훔치고 수저를 올립니다. 바야흐로 밥을 다 차리면 큰 소리로 아이들을 부르지요.
이제 아이들은 의젓하게 자라서 깔개도 스스로 놓고 손도 스스로 씻습니다. 한두 해 앞서까지만 해도 아이들 손이랑 낯을 모두 씻겨야 했으나, 이제는 말로만 타일러도 되어요.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아이들 몸짓을 바꿉니다. 내 손에서 태어나는 밥 한 그릇이 아이들 몸으로 스며듭니다.
밥상맡에 다 같이 둘러앉은 뒤 국그릇을 두 손으로 고이 감쌉니다. 따스한 기운이 손바닥으로 들어와서 온몸으로 퍼집니다. 나는 이 두 손으로 일을 하고, 바람을 어루만지며, 기저귀를 빨았고, 이불을 건사하고, 살림을 돌봅니다. 귀가 간지럽다 하면 귀를 파 주고, 손톱이 자라면 손톱을 깎습니다. 나이에 따라 손에도 낯에도 몸에도 주름이 질는지 모르지만, 온누리 모든 어버이는 주름살마다 아이들하고 누린 삶이 사랑스러운 결로 깃들리라 느껴요.
아파트 육 층까지 비질 소리 올라온다 // 귀뚜리가 // 지구 위에 두 줄 수염을 내려놓고, // 뭘 쓸까 // 고민하다가 // 빈 마당에 // 소스라친다 (비질 소리)
누군가 내다 놓은 깨진 거울 속으로 // 문짝을 두드리듯 가만히 눈발 친다 (들판의 거울)
새롭게 하루를 열면서 <얼굴을 더듬다>에 흐르는 노랫가락을 가만히 읊어 봅니다. 이제 겨울이 저물려 하고 봄이 오려 합니다. 아침에 마당에서 노는 작은아이가 묻습니다. "아버지, 이제 봄이야?" "음, 아니. 아직 겨울이고, 봄이 오는 문턱이야."
▲ 마실을 다니건 집에 있건 늘 아이들 얼굴과 몸짓을 지켜봅니다. 읍내마실을 가던 날, 눈발이 날리고 바람이 드세게 불었어요. 아이들은 바람 따위는 헤아리지 않고 싸락눈을 먹으려고 혀를 낼름 내밀면서 놉니다. 이런 아이들 얼굴에는 주름이 질 수 없고, 아이들을 바라보는 어버이한테도 주름이 질 수 없겠지요. ⓒ 최종규
아이한테 '봄이 오는 문턱'이라고 말하다가 불현듯이 놀랍니다. 나는 이 말을 아주 오랜 옛날부터 들었다고 느껴요. 아마 내가 아기였을 무렵 둘레 어른들이, 또 우리 어버이가 '봄이 오는 문턱'이라고 말했을 테지요. 그냥 '봄이 온다'고 할 수 있는데, 누군가 '봄이 오는 문턱'이라 말했고, '봄이 문지방을 타고 넘는다' 같은 말꽃을 피웁니다. '봄바람이 귀를 간질인다'라든지 '봄볕에 옷섶이 짧아진다'고도 해요.
유종인 님이 아파트 육층에서 비질 소리를 노랫소리로 듣듯이, 슥슥거리는 소리가 온 지구를 쩌렁쩌렁 울린다고 느끼듯이, 우리 삶자락은 온통 시로 태어날 소리요 결이요 무늬요 사랑이며 살림이지 싶습니다. 시골집 마루문을 때리는 눈발은 사라지고, 길게 드러눕던 겨울 그림자도 짧아집니다. 낮에는 처마 밑으로 햇볕이 들지 않아요. 해가 차츰 높아집니다. 나무마다 겨울눈이 봉긋봉긋 이쁘게 돋는 겨울 끝자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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