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암살>, 항일 투쟁의 현장을 걷다
조선의용대(군)의 항일 투쟁의 마지막 전투지 태항산맥을 걷는다①
2015년도 대한민국은 해방 70주년이라는 역사적 큰 의미에도 불구하고 친일파들의 행적에 대한 정당화와 미화, 그리고 친일파 후손들을 비롯한 측근들의 역사 왜곡으로 시끄러웠다.
일본제국주의 식민지에서 강제로 끌려갔던 위안부 할머니들을 기만한 한일외교협상의 합의, 항일 독립투사들의 내용을 과감히 의도적으로 삭제한 역사교과서의 국정화 등은 해방 70주년이 부끄러울 정도로 한국 사회를 혼란케 하였다.
다른 한편에서는 역사 정의를 위해 외치고 있었다. 전국의 대학에서 "평화나비" 모임이 만들어져 "소녀상"을 세우고 지키기 위한 노력들이 있었고, 항일 투사들의 활동을 작품화 한 영화 "암살"이 많은 국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깨어있는 양심들이 있어 이 나라를 이만큼이나마 지켜지고 있음을 대변하였다.
이러한 국내외 정서로 인해 이번 순례는 긴장과 설레임이 교차했다. 출발하는 날은 밤잠을 설치며 새벽에 일어나 짐을 챙겼다.
2016년도 1월 항일 유적지는 '의열단 약산 김원봉 장학회'와 '(사)동북아시아문화연구소'가 주최를 하였으며, (사)동북아시아문화연구소의 전국 5개 지부, 항일 독립투쟁의 본산인 밀양의 (사)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그리고 영화 관련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추천을 받아 참가자를 선발했다. 조선의용대와 조선의용군이 조국의 땅으로 진출하기 위한 마지막 항일 투쟁지인 태항산맥(중국의 창세신화 여와의 발생지)을 걸었다.
4회에 걸쳐 순례길을 안내한다.
조선의용대(신흥 강습소-무관학교-의 졸업자와 조선의열단 활동자 등 항일투쟁의 의자가 강한 젊은이들로 1938년 10월 무한에서 창설, 총 대장 약산. 정치조장 석정)가 무장투쟁을 위해 한반도가 가까운 화북지역으로 이동을 하였다. 그리고 하북성 한단시 섭현 상무촌에 모여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편했다. 처음 주둔지 홍복사를 뒤로하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두 번째로 주둔하며 선무공작을 하였던 섭현 마전진 운두저촌(雲頭低村, 윈터우디촌)을 찾았다.
운두저촌은 산서성(山西省, 산시성, 중국의 성은 우리나라 광역자치단체인 도에 해당) 좌권현(左权县) 연화산 마전진(麻田镇)의 청장하(清漳河)라는 강을 건너면 나오는 마을로 2002년 세워진 '조선의용군태항산지구항일전 순국선열전적비(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와 중국 좌권현 인민정부)'와 조선인이 있는 곳에는 꼭 있는 연자방아, 그리고 이 연자방아에서 옥수수를 갈고 있는 주민들과 항일투사들의 휴식처가 되었을 큰 회화나무가 우리를 기다라고 있었다.
그리고 나무 옆으로 화북조선청년간부학교(교장 무정, 교관 석정) 관계자들이 사용하였던 본부 집무실이 지방문물(우리나라의 지방문화제)로 지정되어 관리되면서 독립된 한반도의 후손들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역사의 이름으로 의연하게 서 있었다.
또 하나의 반가움은 운두저촌 남쪽의 전각(당시 운두저촌의 남문으로 추정)에는 "조선말을 자유대로 쓰도록 요구하자 前志願兵"과 "왜놈의 上官(상관)놈들을 쏴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의용군을 찾아 오시요!"라는 우리의 글이 흰색 페인트로 생생하게 쓰여져 있었던 것이다.
1941년 당시 항일전투를 하는 조선의용대가 강제 징용된 조선의 청년들을 위해 쓰여진 글귀로 보이며, 운두저촌의 현지 주민들은 이 글귀를 제대로 쓸줄도 읽을 줄도 모르지만 감사하게도 이 글의 시대적 의미를 알고 있는듯 그당시로부터 생생히 남겨진 역사의 한 장면이 지워지지 않도록 매해 흰색으로 덧칠을 하며 중국과 조선인들의 항일 투쟁에 대한 정신을 기리고 있었다.
조선의용대는 41년 11월에 섭현 운두저촌에서 팔로군과 일본군이 대치중인 원씨현(元氏县) 호가장(胡家庄)마을로 무장 선전대원 30여명을 보내어 중국 인민들을 상대로 민중대회를 열고 적군의 선전공작을 하였다. 그러나 새벽에 일본군 500여명이 호가장 마을을 포위하여 공격해 왔고, 이 전투에서 일본군 10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마지막 분대장으로 알려진 김학철선생과 김세광선생이 부상을 당하여 체포되고, 4명의 조선의용대와 중국군 12명도 사망하는 전투가 있었다고 한다.
호가장 마을 입구에는 12명의 중국인을 기념하는 추모비가 있었으며, 그 양쪽으로 김사량(동경대 출신으로 일본군 부대에서 탈출하여 조선의용대에 합류하고 노마만리를 씀)선생과 김학철선생의 항일문학비가 서 있었는데 쇠귀 신영복선생의 글과 글씨체로 기념비가 만들어져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호가장 마을을 방문한 날이 쇠귀 신영복선생의 일포제가 있는 날이어서 추모의 뜻을 기리는 묵념을 하는데도 마음을 무겁게 하였다.
이번 순례길에 함께 한 쇠귀선생의 조카인 (사)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의 이성영 소장은 호가장 방문전날 한국에서의 비보를 듣고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하셨던 우리 아제가 가셨다'며 슬픔을 못이겨 눈물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호가장 마을에는 당시 조선의용대가 부르던 우리말로 된 노래 '불멸의 영령'을 불러주며 조선의용대의 기개와 결의를 회상시키던 호숙영씨는 없었지만 그녀의 남편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지방문물로 지정된 조선의용대 주둔지와 격전지를 직접 안내해 주었다. 그리고 순례단중 한 청년은 주둔지내의 대피시설인 우물로 위장된 수직굴로 직접 내려가 살펴보기도 하였다.
지난번 탐방때 호숙영씨가 불러준 조선의용대의 노래는 '사나운 비바람이 치는 길가에 다 못가고 쓰러지는 너의 뜻을 이어서 이룰 것을 맹세하노니 진리의 그늘 밑에 길이 길이 잠들어라 불멸의 영령'인데 조선의용대의 결의와 충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불멸의 영령은 호숙영씨 뿐만 아니라 호가장 마을의 초등학교에서도 학생들에게 가리키고 있었으며, 학생들이 다 함께 합창하는 영상이 한국의 방송에 보도된 것을 기억하며 중국인의 항일 투쟁에 대한 역사의식과 대한민국의 항일 투쟁가들을 기리는 차이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호숙영씨 집안에서는 올해도 호가장을 방문한 우리 답사단에게 지역 특산물인 곶감을 한 봉다리 주었다. 곶감의 달콤함과 더불어 1940년대 항일투쟁을 함께 한 동맹국가로서의 뜨거움과 따뜻함까지 함께 가득 담아 주신 것이다.
1941년 12월 12일 호가장 전투에서 희생당한 4명의 의사인 한청도(본명 최철호), 왕현순(본명 이정순), 박철동, 손일봉 등 4명의 시신이 호가장마을 주변에 모셔져 있는 것이 아니라 호가장에서 100리나 떨어젼 황복평촌(黄北坪村)이라는 곳에 안장되어 있다.
이유는 일본군이 100여명이나 사살당한 마을이라 일본군들이 다시 쳐들어와 보복으로 묘역을 훼손하고 유해를 상하게 할까봐 이를 방지하기 위해 전투가 끝난 날 주민들이 밤을 새며 달려서 황북평촌까지 가서 안장을 했음은 당시 중국인들이 조선의용대의 항일투쟁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컸는지를 대변해 주고 있다. 지금은 도로 개설로 인하여 마을 뒷산 양지바른 봉우리에 4분의 묘가 자리를 잡고 있다.
순례단 일행은 4분의 순국선열 묘역에 일일이 태극기를 덮고, 국내에서 가져간 제물로 경건한 마음으로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옥재선생은 이번 순례시 사용한 차다기를 전통기법으로 만들어 헌다를 하였으며, 향후 제를 지낼 때마다 사용해 달라며 차다기를 (사)동북아시아문화연구소에 기증을 하였다.
일본제국주의 식민지에서 강제로 끌려갔던 위안부 할머니들을 기만한 한일외교협상의 합의, 항일 독립투사들의 내용을 과감히 의도적으로 삭제한 역사교과서의 국정화 등은 해방 70주년이 부끄러울 정도로 한국 사회를 혼란케 하였다.
다른 한편에서는 역사 정의를 위해 외치고 있었다. 전국의 대학에서 "평화나비" 모임이 만들어져 "소녀상"을 세우고 지키기 위한 노력들이 있었고, 항일 투사들의 활동을 작품화 한 영화 "암살"이 많은 국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깨어있는 양심들이 있어 이 나라를 이만큼이나마 지켜지고 있음을 대변하였다.
이러한 국내외 정서로 인해 이번 순례는 긴장과 설레임이 교차했다. 출발하는 날은 밤잠을 설치며 새벽에 일어나 짐을 챙겼다.
2016년도 1월 항일 유적지는 '의열단 약산 김원봉 장학회'와 '(사)동북아시아문화연구소'가 주최를 하였으며, (사)동북아시아문화연구소의 전국 5개 지부, 항일 독립투쟁의 본산인 밀양의 (사)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그리고 영화 관련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추천을 받아 참가자를 선발했다. 조선의용대와 조선의용군이 조국의 땅으로 진출하기 위한 마지막 항일 투쟁지인 태항산맥(중국의 창세신화 여와의 발생지)을 걸었다.
4회에 걸쳐 순례길을 안내한다.
조선의용대(신흥 강습소-무관학교-의 졸업자와 조선의열단 활동자 등 항일투쟁의 의자가 강한 젊은이들로 1938년 10월 무한에서 창설, 총 대장 약산. 정치조장 석정)가 무장투쟁을 위해 한반도가 가까운 화북지역으로 이동을 하였다. 그리고 하북성 한단시 섭현 상무촌에 모여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편했다. 처음 주둔지 홍복사를 뒤로하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두 번째로 주둔하며 선무공작을 하였던 섭현 마전진 운두저촌(雲頭低村, 윈터우디촌)을 찾았다.
▲ 운두저촌운두저촌 마을입구의 회화나무와 조선의용군이 사용했다는 집무실, 연자방아에서 옥수수를 갈고 있는 주민들 ⓒ 박진우
운두저촌은 산서성(山西省, 산시성, 중국의 성은 우리나라 광역자치단체인 도에 해당) 좌권현(左权县) 연화산 마전진(麻田镇)의 청장하(清漳河)라는 강을 건너면 나오는 마을로 2002년 세워진 '조선의용군태항산지구항일전 순국선열전적비(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와 중국 좌권현 인민정부)'와 조선인이 있는 곳에는 꼭 있는 연자방아, 그리고 이 연자방아에서 옥수수를 갈고 있는 주민들과 항일투사들의 휴식처가 되었을 큰 회화나무가 우리를 기다라고 있었다.
그리고 나무 옆으로 화북조선청년간부학교(교장 무정, 교관 석정) 관계자들이 사용하였던 본부 집무실이 지방문물(우리나라의 지방문화제)로 지정되어 관리되면서 독립된 한반도의 후손들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역사의 이름으로 의연하게 서 있었다.
▲ 운두저촌 남문마을 남문에 조선의용대원들이 강제 징집된 조선의 청년들에게 '일본 부대를 이탈하여 조선의용대로 찾아 오라'는 문구가 남아있다. 이곳 주민들이 매년 덧칠 작업을 해 당시의 우리글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 박진우
또 하나의 반가움은 운두저촌 남쪽의 전각(당시 운두저촌의 남문으로 추정)에는 "조선말을 자유대로 쓰도록 요구하자 前志願兵"과 "왜놈의 上官(상관)놈들을 쏴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의용군을 찾아 오시요!"라는 우리의 글이 흰색 페인트로 생생하게 쓰여져 있었던 것이다.
1941년 당시 항일전투를 하는 조선의용대가 강제 징용된 조선의 청년들을 위해 쓰여진 글귀로 보이며, 운두저촌의 현지 주민들은 이 글귀를 제대로 쓸줄도 읽을 줄도 모르지만 감사하게도 이 글의 시대적 의미를 알고 있는듯 그당시로부터 생생히 남겨진 역사의 한 장면이 지워지지 않도록 매해 흰색으로 덧칠을 하며 중국과 조선인들의 항일 투쟁에 대한 정신을 기리고 있었다.
조선의용대는 41년 11월에 섭현 운두저촌에서 팔로군과 일본군이 대치중인 원씨현(元氏县) 호가장(胡家庄)마을로 무장 선전대원 30여명을 보내어 중국 인민들을 상대로 민중대회를 열고 적군의 선전공작을 하였다. 그러나 새벽에 일본군 500여명이 호가장 마을을 포위하여 공격해 왔고, 이 전투에서 일본군 10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마지막 분대장으로 알려진 김학철선생과 김세광선생이 부상을 당하여 체포되고, 4명의 조선의용대와 중국군 12명도 사망하는 전투가 있었다고 한다.
호가장 마을 입구에는 12명의 중국인을 기념하는 추모비가 있었으며, 그 양쪽으로 김사량(동경대 출신으로 일본군 부대에서 탈출하여 조선의용대에 합류하고 노마만리를 씀)선생과 김학철선생의 항일문학비가 서 있었는데 쇠귀 신영복선생의 글과 글씨체로 기념비가 만들어져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호가장 마을을 방문한 날이 쇠귀 신영복선생의 일포제가 있는 날이어서 추모의 뜻을 기리는 묵념을 하는데도 마음을 무겁게 하였다.
이번 순례길에 함께 한 쇠귀선생의 조카인 (사)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의 이성영 소장은 호가장 방문전날 한국에서의 비보를 듣고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하셨던 우리 아제가 가셨다'며 슬픔을 못이겨 눈물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호가장 마을에는 당시 조선의용대가 부르던 우리말로 된 노래 '불멸의 영령'을 불러주며 조선의용대의 기개와 결의를 회상시키던 호숙영씨는 없었지만 그녀의 남편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지방문물로 지정된 조선의용대 주둔지와 격전지를 직접 안내해 주었다. 그리고 순례단중 한 청년은 주둔지내의 대피시설인 우물로 위장된 수직굴로 직접 내려가 살펴보기도 하였다.
▲ 호가장 마을의 대피소조선의용대가 주둔하여 전투를 하였던 지역으로 일본군의 침략에 대비해 비상시 사용하기 위해 파놓은 우물을 위장한 대피소 ⓒ 박진우
지난번 탐방때 호숙영씨가 불러준 조선의용대의 노래는 '사나운 비바람이 치는 길가에 다 못가고 쓰러지는 너의 뜻을 이어서 이룰 것을 맹세하노니 진리의 그늘 밑에 길이 길이 잠들어라 불멸의 영령'인데 조선의용대의 결의와 충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불멸의 영령은 호숙영씨 뿐만 아니라 호가장 마을의 초등학교에서도 학생들에게 가리키고 있었으며, 학생들이 다 함께 합창하는 영상이 한국의 방송에 보도된 것을 기억하며 중국인의 항일 투쟁에 대한 역사의식과 대한민국의 항일 투쟁가들을 기리는 차이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호숙영씨 집안에서는 올해도 호가장을 방문한 우리 답사단에게 지역 특산물인 곶감을 한 봉다리 주었다. 곶감의 달콤함과 더불어 1940년대 항일투쟁을 함께 한 동맹국가로서의 뜨거움과 따뜻함까지 함께 가득 담아 주신 것이다.
1941년 12월 12일 호가장 전투에서 희생당한 4명의 의사인 한청도(본명 최철호), 왕현순(본명 이정순), 박철동, 손일봉 등 4명의 시신이 호가장마을 주변에 모셔져 있는 것이 아니라 호가장에서 100리나 떨어젼 황복평촌(黄北坪村)이라는 곳에 안장되어 있다.
이유는 일본군이 100여명이나 사살당한 마을이라 일본군들이 다시 쳐들어와 보복으로 묘역을 훼손하고 유해를 상하게 할까봐 이를 방지하기 위해 전투가 끝난 날 주민들이 밤을 새며 달려서 황북평촌까지 가서 안장을 했음은 당시 중국인들이 조선의용대의 항일투쟁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컸는지를 대변해 주고 있다. 지금은 도로 개설로 인하여 마을 뒷산 양지바른 봉우리에 4분의 묘가 자리를 잡고 있다.
▲ 황북평촌 마을의 4인묘호가장 전투에서 사망한 조선의용대원 4인의 시신이 추후 일본인들에게 훼손될 것을 우려해 호가장 주민들은 밤을 새워 100리를 가서 황북평촌이라는 마을에 안장하였다 ⓒ 박진우
순례단 일행은 4분의 순국선열 묘역에 일일이 태극기를 덮고, 국내에서 가져간 제물로 경건한 마음으로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옥재선생은 이번 순례시 사용한 차다기를 전통기법으로 만들어 헌다를 하였으며, 향후 제를 지낼 때마다 사용해 달라며 차다기를 (사)동북아시아문화연구소에 기증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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