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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를 갖고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는 곳

[한국 소설이 건네는 이야기 ⑧] 배명훈의 <첫숨>

등록|2016.02.15 08:29 수정|2016.02.23 07:18
보통 장르 문학이라고 하면 미스터리, SF, 호러, 판타지를 말합니다. 요즘에는 여기에서도 더 세부적으로 장르를 나누기도 하더라구요. 예를 들면 호러 미스터리, 호러 판타지, 미스터리 판타지처럼요.

한 나라의 문학 발전도를 알려면, 장르 문학이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를 보면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한국 문학은 갈 길이 먼 것 같아요. 우리나라의 장르 문학 시장은 아직은 많이 척박하다고 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많은 사랑을 받는 장르문학 작가가 여럿 있습니다. 오늘 제가 소개할 소설 <첫숨>의 배명훈 작가도 그중 한 명이에요. 저는 4년 전쯤 <은닉>이란 소설로 배명훈 작가를 처음 만났습니다. 장르 문학이 익숙하지 않은 저도 이 책을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운이 아주 오래 남았던 기억이에요.

원통 모양의 우주정착지, 첫숨

▲ 책표지 ⓒ 문학과지성사

<첫숨>은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마음이 따뜻해지는 소설이었습니다. 얼마 전 상영됐던 영화 <마션>처럼요. <마션> 또한 따뜻함을 잔뜩 풍기며 끝나잖아요. 이 소설은 독자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준다는 면뿐만 아니라 핵심 주제 면에서도 <마션>과 비슷한 점이 있었습니다. 책의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최신학은 비자금 내역을 폭로했다가 지구에서 퇴출된 내부 조사관입니다. 그의 망명을 받아준 곳은 스페이스 콜로니 '첫숨'. 첫숨은 우주 공간에 둥실 떠 있는 우주 정착지입니다. 지구와 화성과 달 주위에는 수백 개의 도시들이 떠 있는데요, 그중 최대 규모의 도시가 첫숨입니다.

첫숨은 원통 모양으로 설계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원통의 안쪽 면에 세워진 도시에 살고 있구요. 이 모습이 상상이 가시나요? 원통이 있고, 그 안에 사람들이 사는데, 사람들의 발은 원통 안쪽 벽면을 땅처럼 딛고 살아가는 겁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인공 중력 때문이구요.

첫숨은 2분에 한 번씩 자전합니다. 6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 도시가 2분에 한 번씩 자전한다는 건 그 속도가 엄청나다는 거겠죠. 자전으로 원심력이 발생하구요. 이 원심력으로 인해 사람들은 바깥으로 튕겨나갈 만큼의 힘을 받습니다. 하지만 벽면이 있으니 튕겨나가지는 못하고, 바로 이 힘이 중력과 같은 작용을 하는 거예요.

소설에서 중력은 독특한 방식으로 활용됩니다. 중력에 반응하는 모습으로 그 사람의 출신 지역을 짐작할 수 있고, 출신 지역이 바로 권력을 나타내지요. 첫숨의 권력은 화성출신들이 쥐고 있습니다. 소수의 화성출신이 다수의 지구 출신과 달 출신을 지배하는 구조. 이 구조 속으로 지구 출신 최신학이 들어갑니다.

책은 '사람은 집이다'라는 말로 시작돼요. 그래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선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거죠. 최신학은 생각합니다. "뭣하러 그 짓을 한담".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그를 내 삶 안으로 끌어들이는 일만큼 귀찮은 게 또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소설은 최신학이 바로 '그 짓'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지요. 최신학은 아래층에 살고 있는 달에서 온 무용가 한묵희의 문을 열게 됩니다. 이후,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 속으로 빠져들게 되죠.

첫숨의 사상, '생명 중심주의'

최신학이 빠져든 상황 속에는 첫숨의 권력자이자 자본가인 화성 출신 송영, 그리고 그녀의 아들 반지업, 화성 출신들의 영원한 은인 나모린이 있습니다. 이들은 때로는 힘을 합쳐서, 또 때로는 각자 무언가를 향해 움직이지요. 이들의 움직임은 서서히 어느 한 지점으로 모여듭니다.

책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읽어나가면서 독자들도 그들의 움직임을 따라 그 한 지점으로 다가가게 되지요. 그런데 책은 마지막에 가서 뜻밖의 반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반전엔 첫숨의 사상 '생명 중심주의'가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앞서 영화 <마션>과 이 소설은 핵심 주제 면에서도 비슷하다고 했지요. <마션>에서도 화성에 떨어진 주인공 한 명을 살리기 위해 그 많은 사람들이 함께 노력을 기울이잖아요. 돈이나 개인 또는 집단의 이익보다는,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그 많은 사람들이 함께 머리를 모으는 장면은 매우 감동적이었습니다.

첫숨의 사상 '생명 중심주의'라는 것도 바로 이런 겁니다. 그 누구의 생명이라도, 단 하나의 생명이라도 소중히 여기는 것. 그 생명이 화성 출신이든, 지구 출신이든, 달 출신이든, 아니면 외계인이든 마찬가지라는 것. 모든 생명은 생명이기 때문에 고귀하고, 생명이기 때문에 평등하다는 것. 그리고 이를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구현하는 것. 바로 이 '생명 중심주의'가 소설의 핵심 주제가 되는 거죠. 얘기만 들어도 절로 마음이 따뜻해지지 않나요?

선의를 갖고 움직이는 사람들

책에서 특이 인상 깊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첫숨의 권력자이자 자본가인 송영 여사인데요. 이 소설은 SF소설이지만 탐정소설에 가까워요.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존재하는 것이 분명한 어떤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긴박감을 다루고 있지요. 진실이 있으면, 진실을 숨기려는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진실을 숨기려는 사람과, 파헤치려는 사람. 이들 중 누가 승자가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결과는 마지막에 가서야 알게 되겠죠.

그런데 이 책에서는 결과를 알게 된 순간 승자와 패자가 무의미해집니다. 승자도 승자가 아니고, 패자도 패자가 아닙니다. 그저, 마지막까지 함께 달려왔던 '우리들'이 됩니다. 이들이 '우리들'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그들 움직임의 바탕에 동일하게 깔려 있는 '선의' 때문입니다.

호기심에 이끌려 한묵희의 문을 열었다가, 그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은 채 한묵희의 삶에 뛰어든 최신학처럼 모든 인물들이 그렇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공동체에 품은 선의를 에너지 삼아 움직이는 사람들. 이런 그들은 각자의 목표를 향해 움직이면서도 선한 연대를 이루게 됩니다. 송영 역시 선한 연대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구요.

권력을 쥐고 있는 그녀는 권력을 다룰 줄도, 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뜻을 이룰 줄도 아는 영리한 사람입니다. 그녀는 또한 합리적 사고 능력과 현명함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첫숨 전체를 위해 움직이면서도, 첫숨을 지탱하는 개인들을 위해서도 움직일 줄 압니다. 또 무엇보다 그녀에겐 권력을 이용해 더 좋은 세상을 만들려는 의지도, 능력도 있어요. 바로 이러한 그녀로 인해 우주 정착지 첫숨은 단지 SF 소설의 배경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싶은 도시가 되는 거죠.

우리가 매일 보는 이 사회의 권력자 모습과 송영은 참 많이 다릅니다. 그래서 마음은 안타깝지만, 한편 저는 단순히 생각해 보기로 했어요. 송영 같은 권력자를 두는 건 어떻게 보면 쉬운 일이 아닐까, 하고 말이에요.

영리하고 합리적이고 현명한 사람을 우리가 뽑으면 되잖아요. 선한 연대가 가능하고, 우리가 사는 이 나라와 이 나라를 이루는 개인들을 함께 생각할 줄 알고, 선의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을 우리가 뽑으면 되지요. 간단하지 않나요? 그런데 이 간단한 게 왜이리 어려운 걸까요.
덧붙이는 글 <첫숨>(배명훈/문학과지성/2015년 11월 27일/1만3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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