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파 대법관의 죽음, '사활' 건 싸움 시작됐다
사망한 스캘리아 연방 대법관 후임 지명 놓고 미 정치권 소용돌이
▲ 미국 워싱턴 D.C.의 연방 대법원 전경 ⓒ 윤현
한 대법관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미국 정계를 뒤흔들고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이끄는 민주당과 야당 공화당은 전면전을 벌일 태세다.
지난 13일(현지시각) 미국 법조계의 '보수파의 거두'로 불린 앤터닌 스캘리아 연방 대법관이 7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텍사스 주의 리조트에서 휴가를 즐기다가 잠자리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사인은 심근경색이다.
지난 1986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지명을 받은 스캘리아 대법관은 30년간 현직 대법관으로는 가장 오래 재직하며 보수의 목소리를 대변해왔다. 낙태와 동성애를 강력히 반대하고, 총기 소지와 사형 제도 존치를 주장했다.
대법원이 역사적인 동성결혼 합헌 결정을 내릴 때 반대표를 던졌고, 오바마 대통령이 핵심 정책으로 내세운 건강보험개혁(오바마케어)에도 반대표를 던지는 등 오바마 행정부와 대립각을 세워왔다.
"흑인의 학습능력이 떨어진다"라는 인종 차별적인 발언을 하면서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논리 정연하고 재치있는 판결문으로 '언어의 연금술사'로 불리며 법조계의 존경을 받아온 인물이다.
미국의 대법관은 종신직이다. 사망, 사직, 탄핵 등의 이유가 아니면 스캘리아 대법관처럼 죽는 순간까지 물러나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면 스캘리아의 죽음이 왜 미국 사회의 '지각변동'을 예고하는 것일까.
미국 대법원의 이념 구도, 왜 중요한가?
그 이유는 대법원의 이념 구도에 있다. 스캘리아 대법관이 사망하기 전 대법원은 9명의 대법관이 보수 성향 5명과 진보 성향 4명으로 이뤄져 보수 색채가 더 강했다. 특히 스캘리아 대법관은 강경 보수파였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이 스캘리아 대법관의 후임으로 진보 성향의 인물을 지명하면 대법원의 이념 구도가 수십 년 만에 역전될 수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미 재임 기간 2명의 진보 성향 대법관을 지명하며 대법원의 '진보화'를 주도해왔다.
스캘리아 대법관의 죽음과 후임 지명을 놓고 <워싱턴 포스트>가 "정치권과 법조계가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 것"이라며, CNN이 "최대의 정치적 전투가 벌어질 것"이라고 경고한 까닭이다.
물론 대법관들이 모든 사안을 이념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보수 성향의 대법관이 더 많았어도 2012년 건강보험개혁, 2015년 동성결혼 합헌 판결 등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손을 들어줬다.
▲ 미국 연방 대법관들. 아래 왼쪽 두 번째가 최근 사망한 앤터닌 스캘리아 대법관. ⓒ 위키피디아
그러나 진보와 보수, 민주당과 공화당이 싸울 때마다 최종 결정자 역할을 하며 신성한 권위를 내뿜는 대법원의 이념 구도는 한 정권과 의회의 성패를 넘어 미국의 역사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저 임금 합법화, 근로자의 단체교섭권 보장, 학교 내 인종차별 금지, 여성 근로자 임금 차별 철폐 등이 대법원에서 나온 판결들이다. 이는 미국을 넘어 세계 인권사에 큰 영향을 끼쳐왔다.
보수 성향의 공화당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억지'를 부리고 나섰다. 임기가 불과 1년밖에 남지 않았으니 헌법에서 보장하는 오바마 대통령의 권한인 후임 대법관 지명권을 차기 대통령에게 넘기라는 것이다.
미치 맥코널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는 "국민이 새 대법관을 결정할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라며 "차기 대통령에게 양보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공화당 대선 주자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도 "지난 80년간 대선이 열리는 해에 대법관이 지명된 적은 없다"라고 거들었다.
반면 해리 리드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는 "중요하고 많은 이슈들이 대법원에 올라와 있다"라며 "최대한 빨리 공석을 채워야 한다"라고 반박했다. 민주당 대선 주자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도 "대법관 지명은 대통령의 의무"라고 재촉했다.
오바마 "후임 대법관 지명할 것" 천명
▲ 미국 연방 대법권 이념 성향 분류 ⓒ 윤현
오바마 대통령은 후임 대법관을 지명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나타냈다. 그는 "머지않아 후임 인사를 지명해 대통령으로서 헌법적 소임을 다하겠다"라며 "그럴 시간이 충분하다"라고 밝혔다. 대법관은 대통령이 지명하고, 상원의 인준을 거쳐 결정된다.
오바마 대통령이 지명권을 행사하면 통상 재임 기간 1~2명의 대법권을 지명하고 끝났던 역대 대통령들과 달리 3명의 대법관을 지명하는 '행운의 대통령'이 된다. 이는 레이건 전 대통령 이후 30년 만이다.
더구나 오바마 대통령이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던 총기규제를 비롯해 이민개혁법, 낙태 허용 등 미국 사회를 뒤바꿀 중대 사안들이 대법원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어 모두가 새 대법관 지명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진보 성향의 언론들은 벌써 유력한 후임 인사를 거론하며 새로운 대법원을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이 상원 다수당인 공화당의 인준을 받기 위해 중도 성향의 인물을 선택할 수 있다는 예상도 있다.
반면 공화당 역시 진보적 성향의 인물이라고 해서 무조건 반대할 경우 대선을 앞두고 여론의 역풍을 맞을 것을 조심스러워 하고 있다. 한 법률가는 "진보주의가 아주 유리해졌다"라며 "대법원이 진보적 판결을 더 많이 내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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