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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주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 2016년에 재현되나

[주장] 보수진영이 말하는 테러의 정의, 잣대가 불분명하고 모호하다

등록|2016.02.25 10:20 수정|2016.02.25 10:20
테러방지법이 야당의 필리버스터 때문에 처리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 24일 박근혜 대통령은 제8차 국민경제자문회의에서 "많은 국민이 희생을 하고 나서 통과를 시키겠다는 이야기인지, 이거는 정말 그 어떤 나라에서도 있을 수 없는 기가 막힌 현상들"이라고 말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필리버스터 때문에 테러방지법 통과가 지연되는 '현상'에 화가 났는지 '책상을 쾅, 쾅 치면서 분노를 표출했다'고 알려졌습니다.

필리버스터가 '그 어떤 나라에서도 있을 수 없는 기가 막힌 현상'이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말은 틀렸습니다. 필리버스터는 불과 2년 전에도 미국에서 벌어졌습니다.

2013년 9월 미국 상원 의회에서 테드 크루즈 공화당 상원의원은 21시간 19분 동안 필리버스터를 행사했습니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오바마 케어'를 포함한 새해 예산안 통과를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테드 크루즈 공화당 의원은 동화책이나 <스타워즈> 이야기 등을 주절주절 읊었다고 합니다. 그에 비하면 한국의 야당 의원들은 법안에 관련한 주제를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얘기를 몇 시간 동안 하고 있으니 더 대단한 겁니다.

대통령의 말은 단어 하나만으로도 비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말은 처참할 정도입니다. 사실관계는 물론이고 앞뒤 문맥이나 문장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법안이 통과되지 못한다고 안타까워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책상까지 '쾅, 쾅' 치는 모습이야말로 '기가 막힌' 상황입니다.

대통령과 새누리당은 '테러방지법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먼저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은 '테러'라는 말의 개념을 더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테러'라는 단어의 정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테러방지법은 '국민감시법'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북한이 하는 행동은 테러가 아닌 군사적 도발'

테러방지법을 통과시켜야 하는 이유로 흔히 '북한'을 예로 듭니다. 하지만 테러방지법으로는 북한을 막을 수 없습니다. 테러방지법 제2조 2항에서는 '테러단체란 UN이 지정한 테러단체를 말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테러단체나 테러지원 국가로 규정돼 있지 않습니다.

한민구 국방부 장관 : "제가 테러방지법의 구체적인 내용을 잘 모릅니다마는 테러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정보의 교환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필요한 것이고 여러 가지…"
김광진 더불어민주당 의원 : "장관께서 테러방지법의 구체적인 내용을 모르신다는 게 좀 안타깝고, 그러면 북한이 우리의 후방을 공격한다 그러면 그건 테러입니까, 군사적인 공격입니까?"
한민구 장관 : "지금 위원님께서 후방을 공격한다고 표현을 쓰셨으니까 공격의 경우에 해당하는 것은 공격이 되겠습니다."
김광진 의원 : "그렇지요, 그건 테러라고 보기는 어렵겠지요?"
한민구 장관 : "그러니까 북한이 어떤 요원들을 통해서 테러의 형태를 할 수도 있고 또 소규모든지 또는 대규모든지 어떤 군인들을 통해서 공격행위를 할 수도 있고 그런 경우가 여러 가지 있겠습니다."
김광진 의원 : "그렇게 해서 북한군이 공격을 해 오면 그것은 테러라기보다는 공격행위이기 때문에 군이 담당해서 해결할 문제이지 않습니까, 국정원이 관할할 문제는 아닌 것이고?"
한민구 장관 : "당연히 군사적 공격이라면 군이 대응을 할 것이고요."
(출처 : 국방위원회 회의록, 2016년 2월 7일)

남한과 북한은 휴전 상태입니다. 북한이 남한에 벌이는 공격은 정전 협정을 위반한 '군사적 행위'입니다. 북한을 막기 위해 테러방지법이 필요하다면 국방부 장관이 모를 수는 없습니다.

'인천공항에서 발견된 아랍어 폭발물 사건 때문에 테러방지법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하지만 관련 기사의 내용 '인천공항 폭발물 의심' 용의자 체포…무직 한국인'에서 보듯이 'IS의 테러 의혹' 가능성은 이미 신뢰를 잃었습니다. 인천공항이나 주요 공공시설에 대한 테러는 하청 업체로 구성된 저임금 경비 보안 회사의 문제를 개선하지 않고는 막기 힘듭니다. 즉 법보다는 시스템의 문제에 가깝습니다.

'백주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

과거 이승만이 지방순시만 나가면 지역 학생들이 동원됐습니다. 1955년 9월 13일 <대구매일신문>은 대통령과 고위 공무원의 행사에 동원되는 어린 학생들의 모습에 분개해 '학도를 정치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사설을 내보냈습니다.

▲ <대구매일신문> 피습 사건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 동아일보


<대구매일신문>의 사설이 나간 다음 날, 자유당 계열 우익단체 간부가 깡패 20여 명을 끌고 신문사를 기습합니다. 이들이 인쇄기를 파괴하고 기자와 직원들을 폭행했지만, 오히려 구속된 사람은 사설을 쓴 <대구매일신문> 최석재 주필이었습니다.

당시 국회조사단이 구성됐지만 자유당 의원들은 오히려 테러를 '의거'라고 말하며 깡패에게 '훈장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사건은 테러가 아니라 의거다.' (박순석 자유당 의원)
'애국심에 불타서 테러를 한 청년들에게 국가의 훈장을 줘야 한다.' (최창섭 자유당 의원)
'대구매일'은 개O끼, 금반 '대구매일'사건은 백주에 행하여진 것이므로 테러가 아니다.' (경북경찰국 사찰과장 신상수)
(출처 : '대구매일필화, 어용단체난립' - 김상웅)

'백주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라는 말을 경찰이 태연하게 했습니다. 국회의원이 테러를 자행한 깡패에게 '훈장을 줘야 한다'고 했습니다. 당시 대한민국 보수우익이 하는 테러는 테러가 아니었습니다. 옛날 일이라고요?

"면담 결과, 본 의원이 느낀 ○○○군은 북한에 대하여 건전한 문제 의식을 가진 학생이었습니다. 다만 성숙하지 못한 행동을 저질렀으며, 지금은 그것을 깊이 뉘우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언론 보도에서처럼 누구를 해칠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은미씨와 황선씨에게 자신의 주장을 알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던 북한의 실상과 정반대되는 정치 선동을 하지 말라는 게 ○○○군의 요구였습니다.

○○○군은 중학교 시절, 한 탈북 선교사가 소개해 준 영화 '크로싱'을 보면서 북한의 현실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탈북자들의 사연을 꾸준히 접하면서 북한의 실상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학생이 북한을 찬양하고 미화하는 것에 분개해 한순간 어리석은 행동을 선택한 것입니다.

○○○군이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된 데는,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폭력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사회 분위기에도 책임이 있습니다. 폭력을 이용해 대한민국을 전복하려는 국회의원이 있었고, 그를 옹호하는 정당이 있었습니다. 그 반대편에는 인터넷의 가상 공간 속에 숨어서 ○○○군을 꾸짖기는커녕 대리 만족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폭력을 정당화하는 세력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좌우 극단적 편향을 조장하는 세력들이 먼저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야 합니다." (새누리당 하태경 의원의 탄원서)

2014년 12월 전북 익산에서 재미교포 신은미씨와 황선 희망정치연구포럼 대표의 통일 토크 콘서트가 열렸고, 현장에서 폭발물을 투척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새누리당 하태경 의원은 폭발물을 던진 고등학생을 위해 탄원서를 재판부에 제출했습니다. 탄원서를 보면 정작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폭발물을 던진 고등학생이 아니라 신은미씨와 황선씨로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들이 '종북'이었다고요?

테러방지법이 위험한 이유

테러방지법이 위험한 이유는, 보수우익 정권에 유리하면 테러가 '의거'가 되고, 해가 되면 테러가 될 수 있는 '그들만의 잣대'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보면 북한의 남침과 안보를 막는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사람이 체포돼 고문을 받았습니다. 무고한 사람이 사형까지 당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역사를 잊고 '테러방지법을 통과시켜야 한다'는 박근혜 대통령을 보면 무섭기까지 합니다.

1955년에 자유당 경찰이 외쳤던 '백주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라는 말이 또 나올 수도 있을 법한 2016년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정치미디어 The 아이엠피터(theimpeter.com)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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