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묻은 로프, 개 끄는 소리 어머니는 순식간에 간첩이 됐다
[다시, 역사 바로 세우기 기획인터뷰⑥] 송씨일가 간첩단 사건 피해자 송기수
이후 박병엽은 놀라운 기억력으로 한국 정보기관에 '고급 정보'를 차례차례 넘겨준다. 그중 하나가 '송'씨 성을 가진 인물이 '충'청도에 지하당을 '건'설한다(이른바 '송충건')는 정보였다.
안기부는 별다른 증거 없이 충북 출신으로 해방 후 월북했다가 1960년 4월 혁명 후 남파된 바 있는 송창섭을 송충건으로 지목한다. 그리고 이 판단은 하나의 가문 전체에 씻지 못할 상처를 안겨주게 된다.
일가족이 간첩단으로... 고문으로 만든 '송씨 일가 간첩단 사건'
▲ '송씨일가 간첩단 사건'안기부는 1982년 9월 10일 서울과 충북을 거점으로 한 대규모 간첩단을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일가친척이 연루된 이 사건으로 인해 송씨 가문은 쑥대밭이 됐다. 그러나 2007년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당시 안기부의 수사결과가 장기 불법 구금 상황에서 모진 고문과 가혹행위로 인해 조작된 것으로 결론 내렸다. 이후 2009년 8월 28일, 법원은 재심을 통해 이 사건 관련자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2011년과 2012년 사건 피해자에 대한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동아일보 1982년 9월 10일자.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쳐
1982년 9월 10일,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가 발표한 대규모 간첩단 사건은 '송씨 일가 간첩단 사건'이라는 자극적인 이름으로 불렸다. 당시 안기부는 한국전쟁 당시 충북 인민위원회 상공부장으로 활동하다 월북한 송창섭이 휴전 이후에도 8차례 남파되어 일가친척을 동원해 정계, 군, 산업계, 공무원, 학원 등에서 부마, 광주, 10.26 사태 등 주요 사건마다 각종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고 대정부 투쟁을 유도한 대규모 간첩조직을 구축했다고 발표했다.
안기부가 그려놓은 총 29명 규모의 간첩단 조직에는 1977년 작고한 그의 처 한경희와 그의 자녀를 포함해 6촌제, 5촌질, 4촌 처남에 이르기까지 일가친척을 망라하고 있었다.
25년이 지난 2007년, 이 사건을 다시 조사한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월북한 송창섭이 1960년 4.19 직후 남파되어 전 재무장관 김영선과 가족을 만난 후 북귀한 것을 제외하면 추가 남파되었다는 근거가 없고, 당시 안기부의 수사결과는 장기 불법 구금 상황에서 모진 고문과 가혹행위로 인해 조작된 것으로 결론 내렸다. 이후 2009년 8월 28일, 법원은 재심을 통해 이 사건 관련자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2011년과 2012년 사건 피해자에 대한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무죄가 공식적으로 인정되기까지 흐른 시간은 27년. 그 사이 '송씨일가'는 뿔뿔이 흩어졌고 '간첩', 또는 '간첩의 자식'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사회에서 고립됐다. 재심에서의 무죄와 국가배상 판결이 그들의 과거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을까?
지난 2월 19일, 이 사건 피해자 중 한 명인 송기수(69세)씨를 만났다. 그는 월북인사 송창섭의 2남으로, 1982년 3월 27일 안기부로 연행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2년 6개월 뒤 집행유예로 석방됐다. 호주로 이민을 떠났다 되돌아온 그는 올해부터 어머니의 이름을 딴 '한경희 통일평화상'을 제정, 분단의 아픔을 치유하려는 이들을 지원키로 했다.
- 이른바 '송씨일가 간첩단 사건'이 발생한 지 벌써 34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1982년에 끌려간 후에 2년 6개월을 구치소에 있다가 집행유예로 나왔어요. 당연히 생활하는 데 제약이 많았지. 친척들도 다 헤어지고 친구들도 10명 중 9명은 떠났어요. 한국에서는 더 못 살겠더라고요. '떠나자'고 결심하고 매형한테 척추 교정하는 일도 배우고 밤에는 영어 과외 일 하면서 호주 유학 자금을 벌었어요.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일해서 돈을 꽤 만들어서 90년대 초반 즈음에 유학을 갔는데, 호주에서도 척추 교정 일을 해서 돈을 잘 벌었어요. 이민 간 사람들 보면 열에 여덟, 아홉은 다 어렵게 사는데 꽤 성공한 편이니까 교포 사회에서도 많이 알려졌지요."
- 견디기 어려운 상처를 잊으려고 호주로 떠나셨는데,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신 이유는 뭔가요? 쉽지 않은 선택이셨을 텐데요.
"호주에서 우연히 초등학교 동창을 만났어요. 동창이 절 알아보니까 한국에서 있었던 일이 교포 사이에서 돌더라고. 제 뒤에서 수군거리고... 얼마 되지도 않은 교포 사회에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니까 더 이상 거기서도 못 살겠더라고요. 결국 돌아왔어요."
▲ 고(故) 한경희 여사의 막내아들 송기수씨.월북인사 송창섭의 막내 아들인 송기수씨는 1982년 3월 27일 안기부에 연행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2년 6개월 만에 석방된다. 사건 이후 호주로 떠났으나 그곳에서도 소문이 돌아 귀국했다. 그는 올해부터 어머니의 이름을 딴 ‘한경희 평화통일상’을 제정, 민족의 통일과 인권·평화·민주의 신장,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치유와 명예회복에 기여해 온 개인 혹은 단체에게 천만원을 지원한다. ⓒ 이재환
'개 끌려가던 소리'가 들리던 인간 이하의 대접, 고문
이 무시무시한 간첩단 사건은 피의자의 '자백' 외에는 별다른 증거가 없었다. 최소 75일, 최대 116일간 이어진 장기불법 구금 상황에서 그 '자백'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재판과정에서 조금씩 드러났다.
1심과 항소심에서 모두 유죄를 받았지만 대법원은 강압에 의한 진술로 의심된다며 무죄취지로 파기 환송했다. 그러나 고등법원에서는 다시 유죄판결이 내려졌고, 또 한 번 대법원에서 무죄취지로 파기 환송됐다. 무려 7번이나 유·무죄 판결이 반복된 '핑퐁재판'이었다. 결국 대법원이 상고기각을 결정해 유죄가 확정됐다
- 당시 사건에 대해서는 대법원에서도 진술의 임의성이 의심된다며 무죄취지로 파기환송하기도 했습니다. 힘든 기억이시겠지만, 당시 사건에 대해 여쭤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안기부에 끌려가서는 매일 맞는 게 일이었어요. 마치 내가 샌드백이 된 것처럼. 밤 10시 정도 되면 주먹질을 시작해서 새벽 4시, 5시쯤 끝나요. 낮에는 놀리고. 그러다보니 나중에는 악이 나더라고. 하루는 날 때리는 주먹을 이빨로 박아 버렸지. 그 사람 주먹에 아직 흉터가 있어요.
그 날 밤에는 더 심하게 맞아서 기절했어요. 정신 차려 보니까 어떤 사람이 와서 혈압재고 청진기 대고 있어서 '아, 내가 기절했었나 보다'... 그런 식으로 하다가 결국 불러주는 대로 쓰고, 다른 사람 진술과 다르면 또 얻어맞으면서 맞춰서 쓰고 그랬지..."
고문이 매우 잔혹하게 진행된 데에는 보안사와 안기부의 알력 싸움도 한몫했다. 박정희의 사망 이후 정보부는 역적 취급을 받았다.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하면서 위상이 회복되기는 했지만, 안기부 내에는 여전히 보안사 출신과 중정출신 요원들 간의 기싸움이 존재했다. 결국 전두환 집권 초기에 성과를 내려는 보안사 출신 요원이 무리수를 두면서 잔혹한 고문을 동원한 '사건 창조'에 이르렀다.
2007년 국정원 진실위의 보고서에 따르면, '무차별적인 온몸구타', '손바닥 발바닥 등 특정부위 때리기', '물고문', '거꾸로 매달기', '고압전구 노려보기', '손가락 사이에 각목 끼우기' 등 잔혹한 고문이 쉬지 않고 진행됐다. 송기수씨는 2007년 국정원 과거사위 조사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 피 붙은 로프, 그걸 내 침대 밑에다 놓는데, 아~ 정말. 그리고 이 로프로 누가 당한 것 까지 내가 느낌이 오더라고. 화장실을 지나가면서 그 개 끌어가는 소리를 들었거든. 입을 틀어막아 놓고 하는 소리, 비명 소리. 우~우~. 그게 제일 고통스러워요."
'개가 끌려가는 소리'를 내며 고문을 받던 이는 송창섭의 6촌제 송오섭으로, 1984년 석방 후 1년 만에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안기부에 체포된 이들에 대한 고문은 남녀를 가리지도, 70 먹은 노인(송창섭의 4촌 처남 한광수)이라고 봐주지 않았다.
- 당시 고문했던 사람들을 기억 하십니까?
"기억하지요. 제일 심했던 사람이 '조 과장'이라고 불렀던 사람. 그리고 당시는 강충선이라고 불렀던 사람이지."
국정원 보고서에는 이 두 사람의 고문에 대한 증언도 기록되어 있다. '조 과장'은 송창섭의 장남 송기홍이 아버지를 만난 사실을 부인하자 느닷없이 주먹으로 얼굴을 집중 구타해 이를 다 빠지게 만들었고, 강충선은 송창섭의 장녀 송기복을 수사하며 "옷을 다 벗고" 허리띠로 "있는 대로 욕을 하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후려쳤다. 그들의 폭력은 사건이 검찰로 송치된 이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 검찰로 송치된 이후에도 안기부의 개입이나 구타가 계속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재판에서는 고문에 의한 거짓 증언이라는 사실을 알렸어요. 그랬더니 우리 사건 담당 검사가 임○○이라는 사람인데, 구치소로 찾아오더라고. 당시에는 구치소 지하에도 취조실 같은 게 있었어요. 거기로 불러내더니 검사가 직접 '왜 진술을 번복하냐'면서 때리더라고요. 안기부 직원도 옆에 같이 있고... 보다 못한 교도관이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라면서 말리더라니까?"
- 때리고 고문하던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싶은 생각도 자주 하셨겠습니다.
"복수라... 단 한 사람에게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전두환. 우리를 이렇게 만든 진짜 장본인이니까. 다른 사람은 필요 없어요. 나를 때리던 검사에게도 사실 연민이 들어요. 저를 조사하고 때리면서도 상당히 고민하는 모습을 많이 봤어요. 자신도 이게 조작된 것인 줄은 알지만 어쩔 수 없다는 느낌?
구치소에 있을 때 집시법으로 잡혀 온 학생들에게 어찌어찌 통방해서 들어보니 정보부 고위 간부가 전두환에게 '한 가문을 이렇게 망쳐놔도 되는 거냐'고 대들었다는 소문도 있다더군요. 이것도 다 똑같이 사람이 하는 것이니까... 물론 그중에는 영화에나 나올 나쁜 놈이 한두 놈 정도 있지만... 그 사람을 길거리에서 만나면 주먹이 나갈까? 나갈 가능성이 높지.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내가 똑같이 때려준다 한들, 그게 다 헛장난 아니요? 조직이 잘 되어야지."
- 조직이 잘 되어야 한다는 건 어떤 의미입니까?
"국가정보원 같은 곳을 폐지해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난 의견이 달라요. 우리가 평화스러운 나라라면 없어도 좋지. 그런데 우리는 어차피 4대 강국에 끼어서 살아가야 하는 나라예요. 그래서 고도로 지능화된 정보부가 반드시 있어야 해. 가짜 간첩이나 잡는 촌티 나는 정보부가 아니라 정말 탑클래스의 조직원이 만드는, CIA와도 맞짱 뜰 수 있는 반듯한 정보부가 커야 해요. 정보부가 필요악이라면, 정말 못된 짓은 못 하게 해야지요."
내 어머니 한경희... 분단시대가 만든 희생양
▲ 고(故) 한경희 여사의 고교시절1919년생으로 충북 대지주의 딸로 태어난 한경희 여사는 일본 유학을 떠나는 등 신여성의 삶을 살았으나 해방 후 분단과 이념 갈등의 희생양이 되었다. 2016년부터 그녀의 이름을 딴 ‘한경희 평화통일상’이 제정된다. ⓒ 사진제공 송기수
안기부에 따르면 서울과 충북을 거점으로 암약한 송씨 일가 간첩단에서 20년 동안 재남 망책 역할을 한 것으로 규정된 한경희 여사는 다행(?)스럽게도 사건 발생 5년 전인 1977년 세상을 떠났다. 안기부는 간첩총책을 조사 한번 못한 채 간첩 조직망을 그려낸 것이다. 그러나 사망으로 인해 기소되지 않은 한경희 여사는 재심 대상도 아니라서 명예회복이 되지 못한 채 '여간첩 한경희'로 남아 있다.
송기수씨는 올해부터 그녀를 기리는 '한경희 통일평화상'을 제정하기로 했다. 2007년 국정원 과거사위 민간위원으로 송씨일가 간첩조작 사건을 직접 재조사한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와의 인연으로 한홍구 교수가 몸담고 있는 성공회대 민주자료관과 평화박물관에 위탁, 운영하기로 했다.
성공회대 민주자료관과 평화박물관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학살과 고문, 간첩조작, 선거부정으로 헌법을 파괴해온 이들을 기록하자는 '반헌법 행위자 열전' 편찬 작업을 주도하고 있는 곳이다.
일제의 침략 앞에 나라의 독립을 외치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던 1919년 출생한 고(故)한경희 여사는 대지주의 딸로 태어나 신여성의 삶을 살았다. 젊은 시절,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도쿄 무사시노 음악학교로 유학을 떠나 니혼대학 법학과에 유학 중이던 같은 고향 출신 송창섭을 만났다. 1941년, 그들의 결혼은 신문에 크게 날 정도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송기수씨는 어머니 한경희가 그때 가장 행복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 부모님이 함께 계실 때 기억은 있으십니까?
"너무 어려서... 어릴 적에 어머니에게 가끔 이야기를 듣긴 했어요. 아버지는 당시 엘리트였으니까 해방되고 중앙청 재무과에서 일하셨다는데... 당시는 엘리트 10명 중에 8, 9명은 좌익활동했을 때니까 좌익 활동하면서 수사기관에 쫒겨 다니고... 어머니가 심지어는... 글쎄... 이제는 이야기해도 되겠지. 아버지가 숨어서 도망 다니다가 원효로에 있는 콩나물 공장에서 몰래 만나고는 했대요.
어느 하루는 두 분이서 만나다가 갑자기 '도망가라'고 연락이 와서 아버지는 담 넘어 가고, 어머니는 우리 4남매 중 누군가를 안고 있다가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서류를 치마 밑으로 뭉개서 감춰 놓고 있었다고 하시더라고. 그때 어머니는 어떤 이념으로 무장했다기보다 남편 일이니까 그렇게 했던 것 같아요."
- 어릴 적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어떠셨습니까?
"아직도 잊지 못하는 게... 초등학교 3학년 때 즈음... 그러니까 한국 전쟁 이후지요. 어머니랑 같이 음성역에 갔었는데 경찰 2, 3명이 와서 갑자기 검문을 해요. 그러더니 어머니를 경찰서에 데려가는 것 같아요. 전쟁 전부터 계속 경찰들에게 시달렸으니까... 어머니가 사이다하고 건빵을 사 와서(흐느낌)... '꼼짝 말고 이거 먹으면서 여기서 기다려야 한다'고 하시더라고. 그런데 암만 기다려도 안 오시는 거야... 그게 아침이었는데 저녁에 깜깜해 져서야 돌아오시는 거예요.
한 10시간쯤 기다린 것 같은데, 어머니는 그 때까지 경찰서에서 시달리신 거야. 경찰들 입장에서는 어머니가 자기들 밥이었으니까(울음)... 생각해보면 어머니가 자식들을 자꾸 충주로, 청주로 보내려고 했던 것 같아요. 자기 옆에 있으면 자식들이 고생하니까. 지금도 충북선만 보면 그 생각이 나고, 건빵하고 사이다만 보면 그때 생각이 나요."
'빨갱이의 아내'로 살아야 했던 한경희는 해방 후부터 경찰의 감시와 취조에 시달리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월북자의 아내라는 이유로 시달려야 했다. 어느 날 송기수는 어머니의 허벅지 깊은 곳에 긴 칼자국이 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머니에게 한참을 따져 물은 후에야 그것이 경찰서에서 고문받은 흔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한국 전쟁 이후였다.
한경희 여사가 월북한 송창섭을 다시 만난 건 한국 전쟁 때였다. 남하한 인민군을 따라 내려온 송창섭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이 퇴각하자 다시 북으로 올라가면서 한경희에게 "같이 올라갈래, 여기 있을래?"하고 물었다. 남아 있기를 선택한 한경희는 4남매를 두 그룹으로 나눴다. 송기수와 누나는 할아버지를 따라갔고, 형과 여동생은 한경희가 맡는다. 넷 중 하나는 살아남으라는 의미였다.
이후 한경희는 가치담배, 양담배, 껌, 초콜릿 등을 파는 허술한 좌판으로 겨우 생계를 이어가는 등 갖은 고생을 다하며 4남매를 부양한다. 그러다 1960년, 4월 혁명이 발생하자 송창섭이 다시 내려온다. 일본 유학시절 친구인 전 재무장관 김영선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김영선은 송창섭의 남파사실을 정보당국에 신고했다.
송창섭은 다시 북으로 올라가기 전, 한경희와 그의 장녀 송기복을 잠시 만났다. 이때의 짧은 만남이 '8차례 남파'와 일가친척을 동원한 간첩단 사건으로 비화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 1960년에 아버지가 내려오셨을 때, 선생님은 만나셨습니까?
"난 그때 너무 어려서 내려온 것도 몰랐어. 아주 나중에 어머니한테 들어서 알았지. '아버지가 왔다 갔었다'... 안기부에서는 그 이후에도 아버지를 만난 것 아니냐고 엄청 맞았어요. 재판받을 때 무슨 비밀재판처럼 몇 사람만 불러서 증언 같은 걸 들은 적이 있는데, 북쪽에서 과장급 하던 남파간첩이라더라고.
그 사람이 충남 사람인데 60년대 후반 즈음 개성에서 밀봉교육 할 때 아버지를 만났다는 거야. 이 사람 말이 아버지가 김일성한테 대들어서 아오지 탄광으로 좌천됐다고 해요. 그래서 '아, 아오지 탄광이라는 게 실제로 있긴 있구나' 했지. 근데 이후에 중앙으로 다시 올라와서 더 높은 사람이 됐다는 거야. 이거 앞뒤가 안 맞잖아?"
- 안기부에선 그 이후에도 송창섭이 계속 남파되어 한경희 여사를 중심으로 한 간첩단을 만들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니, 생각을 해봐요. 1960년에 남파된 건 정보기관도 알고 있었는데, 남파 간첩 총책이나 했다는 사람이 매일 감시받는 사람, 그것도 자기 부인한테 또 간첩 총책을 맡긴다?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야. 그걸 몰랐다면 대한민국 정보부 자격이 없는 거지. 해방 후에 아버지 서류 몰래 감추고, 자기 만나러 온 남편 자수 안 시키고 돌려보내면 공작 총책이 되나? 공작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잖아요? 어머니가 그런 일을 할 여건이 안됐어요. 매일 감시받고 있었으니까. 그럴 거면 그동안 감시는 왜 했나요?"
어머니 이름 딴 '통일평화상'... 분단 상처 치유하는 계기 됐으면
▲ 한국전쟁 당시의 고(故) 한경희 여사한국전쟁 당시 4남매를 두 그룹으로 나누고 좌판을 꾸리며 어렵게 살아가던 한경희여사는 어느 날 동향 출신의 고위 군간부를 우연히 만나 잠시 상주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는다. 송기수씨는 이 만남 덕분에 '겨우 굶어 죽지 않고 살수 있었다'고 회상한다. ⓒ 사진제공 송기수
모든 자식이 그렇듯, 송기수도 어머니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기억의 파편이 순간순간 날아오는 듯했다. 어릴 적, 빈대가 넘쳐나던 어머니 화장품 가게 구석에서 잠을 자다 떨어져 코피를 쏟은 이야기, 막내아들이 잘 먹어야 한다며 가끔 불고기를 사주면서도 정작 본인은 한 젓가락도 먹지 않던 이야기...
떨어져 살며 어머니의 임종도 지켜보지 못한 그는 차라리 그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 축복이라 했다. 어머니가 조금 더 오래 살아계셨다면 자신의 지옥 같은 경험이 영락없이 어머니에게도 가해졌을 것이다.
송기수씨는 사재를 털어 어머니의 이름을 딴 '한경희 통일평화상'을 제정했다. 매년 민족의 통일과 인권·평화·민주의 신장에 기여하거나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치유와 명예회복에 기여해 온 개인 또는 단체에 상패와 천만 원의 상금을 준다. 올해는 3월 10일(목)까지 추천을 받아 심사 후 3월 29일(화) 시상식이 진행한다. 그는 이 상을 통해 어머니의 흔적을 감추기보다 더 크게 기억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에게 어머니는 어떤 의미일까?
- 선생님께 어머니는 어떤 존재입니까?
"나이가 들수록... 어머니가 나에겐 종교라는 생각이 들어요. 적어도 내가 볼 때는 어머니가 이념 이런 건 상관없는 분이고, 그냥 한 사람의 아녀자, 남편의 부인 정도예요. 공산주의는 아무나 합니까? 살아온 과정을 보면 걸핏하면 경찰서 끌려가서 몇 날이나 고생하고... 이런 게 다 남북 분단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통일을 해야 해요. 제가 최후진술 할 때 '신포도를 먹으면 자식 이까지 시리다'는 성경 말씀을 인용했어요. 저도 선친의 고통이 대물림되고 있잖아요? 사람들은 다 끝난 일이라고 하는데, 뭐가 다 끝난 일입니까? 저도 아직 이가 시립니다."
- 어머니 이름을 딴 한경희 통일평화상도 그런 취지에서 제정하신 건가요?
"그렇습니다. '한경희 통일평화상'을 제정하는 게 엄마에 대한 최후의 예의인 것 같아요. 다시는 이런 아픔이 반복되지 않게 통일을 이룰 수 있는 아이디어, 통일 열기를 식지 않게 만드는 활동, 젊은 사람들에게 통일이 필요하다는 열망이 계속되게 하는 사람들을 지원하고 싶어요.
개성공단을 봐요. 정치가면 선은 하나쯤은 연결해 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실낱같이 연결되어 있는 선마저 끊었어요. 연구도 하고 아이디어도 계속 내야 해요. 얼마 안 되지만 기금을 만들어서 조금이라도 통일을 앞당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반성 없는 역사는 반복된다 했는가? 현실은 통일이 좀 더 앞당겨졌으면 좋겠다는 송기수씨의 바람과는 반대로 가고 있다. 정부는 개성공단을 폐쇄했고 사드 배치를 결정한 데 이어 테러방지법 도입까지 서두르고 있다.
2007년, 과거사에 대한 진실규명으로 송기수씨가 말한 것처럼 '반듯한' 정보부가 되겠다던 국정원은 다시 간첩조작 사건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심지어 '유오성 간첩조작 사건'에서 증거를 조작한 당사자는 2007년 국정원 과거사위에서 활동했던 직원이기도 했다.
진실규명에도, 재심에도, 국가의 배상에도 우리는 진정 반성하고 있는 것일까? 국민을 보호하겠다는 법이 국민을 잡아먹었던 역사를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현실, 또다시 그런 역사가 되풀이될 것 같은 징후들을 지켜봐야 하는 현실은 한없이 쓸쓸하기만 하다. 반드시 봄은 온다는 것은 알지만 추운 날씨는 어쩔 수 없다.
☞ 한경희 통일평화상 추천 안내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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