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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언니'가 짓는 이 집에, 난 투자하기로 했다

[이사람, 10만인] 김소연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집행위원

등록|2016.02.26 12:07 수정|2016.02.26 15:29

'센 언니' 김소연김소연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네트워크의 집행위원의 이름 뒤에는 '농성, 단식, 노동운동, 기륭전자. 비정규직...' 같은 범상치 않은 단어가 따라 붙는다. 그는 1895일간의 장기투쟁으로 잘 알려진 전 기륭전자 분회장이기도 하다. ⓒ 정대희


'센 언니'에게 매월 1만 원씩 후원하기로 했다. 그가 하는 일에 공감한 투자다. 공장 바닥과 차디찬 대리석 위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쥐가 들락거리는 천막, 컨테이너 박스 등을 전전하다가 지금은 단칸방에 살고 있는 그의 내 집 마련, 아니 '장그래의 집짓기'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집 1 : 202호] '센 언니'가 사는 그 집, 풀옵션 원룸

'센 언니'가 사는 풀옵션 원룸15㎡(4.5평) 풀옵션 원룸. 센 언니가 일하는 단칸방이다. 이곳에서 그는 '비정규직노동자의 집'을 짓기 위해 주춧돌을 모으고 있다. ⓒ 정대희


처음엔 '센 언니'를 상상했다. 그를 따라붙는 꼬리말은 이랬다. '농성', '단식', '노동운동', '기륭전자', '비정규직'... 평범한 사람과는 동떨어진 단어다. 인터넷에 오른 사진은 더했다. 시위현장, 울부짖는 얼굴, 삭발한 머리, 깡마른 몸... 죄다 '센(?)' 장면들뿐이다.

지난 19일,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에서 내렸다. 인터넷 부동산 사이트 설명대로라면 '서울대입구역 5분 거리'에 센 언니의 집이 있다. 키 작은 주택들이 늘어선 골목길 중간, 그의 집을 발견했다. 빌딩숲에 가려진 동네다.

'202호'  

센 언니의 집이다. 옆집도 숫자만 다를 뿐, 똑같은 현관문이다. 맞은편도, 그 옆도 판박이다. 사람 한 명 겨우 지나가는 비좁은 복도. 다닥다닥 붙은 현관문이 여섯 개다. 풀옵션 원롬, 센 언니가 사는 집이다.

문고리를 잡아 당겼다. 15㎡(4.5평) 원룸에 세간이 빼곡하다. 신발을 벗으니 주방까지 신발장이 됐다. 자리에 앉으니 어린 아이 한 명 누울 자리가 없다. 책상도 하나, 밥상도 하나, 이불장도 하나뿐인데 말이다. 몸 둘 곳을 찾지 못하자 웃으며, 그가 말했다.

"어서 오세요. 이리 앉으세요. 집이 좁지만 방은 뜨끈뜨끈합니다. 커피? 홍차? 어떤 걸로 드릴까요?"

김소연(46). 서울 한복판에서 이름을 부르면, 한두 명은 뒤돌아 볼 흔하디 흔한 세 글자다. 하지만 이름 뒤에 '기륭전자'를 붙이면 얘기가 달라진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름이고, '비정규직'이란 낱말을 떠올리게 한다.

김소연 금속노조 기륭전자 전 분회장.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네트워크의 집행위원. [이사람, 10만인]의 서른여덟 번째 주인공이다. 그는 <오마이뉴스>의 자발적 유료 구독자인 10만인클럽 회원이기도 하다.

[집 2 : 대리석 바닥] 광화문 한복판 빌딩서 노숙

경찰들에게 가로막힌 오체투지 행진단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 조합원들과 연대단체 참석자들 지난 2014년 12월 26일 오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의 고통을 알리기 위해 오체투지를 벌이자, 경찰들이 이를 막고 있다. ⓒ 유성호


공장과 대리석 바닥. 한 때 그의 집이다. 2000년, 밀레니엄 신드롬으로 온 세상이 기대와 희망으로 부푼 그 시절, 그는 불안과 걱정으로 시름했다. 회사가 부도났다. 사옥은 팔려 경기도 김포로 이전한 뒤였다.

폐업을 반대하며, 155일간 농성을 했다. 때론 공장바닥이 잠자리가 됐고 때론 그룹빌딩 1층 로비 딱딱한 대리석 바닥서 누워 밤을 지새웠다. 갑을전자. 갑과 을이 만드는 회사가 아니라 갑과 을이 분명히 나뉜 업체였다.

"갑을그룹 본사가 서울 광화문 <동아일보> 옆이었다. 80명 조합원이 세끼를 해먹으며, 155일간 철야농성을 했다. 지나가는 사람이 많으니 지켜보는 눈이 많았다. 덕분에 사측 밤이면, 16층 카펫이 깔린 사무실을 내줘 40~50대 아주머니들이 잠을 잤다. 화장실에선 좋은 향기도 났다. 하지만 회사는 문제해결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루하루가 더디게 지나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저항은 냄새나는 청국장 끓여 먹고 은행 주어와 볶아 먹는 게 전부였다."

'대리석 방'을 뺀 것은 해가 바뀐 2001년 11월, 회사와 합의하면서다. 그제야 진짜 집에 돌아온 그도 두 다리 쭉 펴고 잘 수 있었다.

[집 3 : 천막] 불청객 고양이와 쥐가 드나드는 곳, 끔찍했다

▲ 2008년 8월 14일 오전 서울 가산디지털단지 기륭전자 경비실 옥상에서 65일째 단식 농성 중인 김소연 금속노조 기륭전자 분회장과 유흥희 조합원(오른쪽)이 누워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유성호


삶의 현장으로 되돌아왔다. 다시 해가 바뀐 2002년 6월, 구로공단으로 복귀했다. 가판대에 놓인 <벼룩시장>을 보다 '휴먼닷컴'이란 회사가 눈에 뗬다. 파견회사였다. "기륭을 가면 6개월 후 정규직이 된다"는 말에 기륭전자에 들어갔다. 인간적인 회사는 아니었다.

이번엔 천막이 집이 됐다. 2005년 4월, 이른바 '문자해고', '잡담해고' 사건이 발생한다. 회사측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문자로 '내일부터 나오지 마세요'라고 해고통지를 한 일이다. 그해 10월, 기륭전자 앞에 천막농성장이 꾸려졌다.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5년 2개월 5일(1895일)간의 장기투쟁이 될지.

"천막생활은 정말 끔찍했다. 수시로 쥐와 고양이가 드나들었다. 술 취한 아저씨가 들어와 잠을 자려고 한 적도 있다. 조합원들은 자고 일어나면 하나 같이 '누가 땅 속에서 몸을 잡아당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여름엔 태풍에 천막이 날아가고 겨울엔 눈이 내려 천막이 무너지기도 했다. 한 번은 겨울에 몹시 추워 난로를 피다가 불이 나기도 했다. 2년을 그렇게 보냈다."

풍찬노숙, 기억을 꺼내면 살이 부들부들 떨리는 고된 생활이다. 날마다 달아나고 싶은 꿈을 꿨다. 그때마다 힘이 돼 준 것은 '마음의 집'이었다.

"누구도 기륭전자 비정규직 문제에 관심이 없던 2006년, 9박 10일간의 공동투쟁을 했다. 그때 한국합섬(현 스타케미칼) 노동자들이 불현듯 찾아와 손을 잡아줬다. 울컥했다. 작은 행동이 누군가에겐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한진중공업, 밀양송전탑 등 곳곳에서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는 현장으로 달려가 손을 잡아줬다. 함께하면, 서로 힘이 된다. 1895일간의 농성을 이어간 힘이다."
  
[집 4 : 컨테이너] 화장실만 빼놓고는...

농성이 길어지면서 집을 바꿨다. 2007년 9월, 장기투쟁사업장 지원단의 도움으로 컨테이너에 살림을 꾸렸다. 천막에 비하면 호텔급 농성장이다. 쥐와 고양이, 노숙자 등 예고치 않은 불청객에 불안해하지 않아도 됐다. 얼음장 바닥이 아닌 따뜻한 전기장판 잠자리도 생겼다. 갈 곳 없는 노동자들에겐 숙소였다. 딱 하나, 화장실 문제를 제외하면 더할 나위 없었다.

"장기투쟁에 나선 이들이 여자들이라 화장실이 가장 큰 문제였다. 가까운 화장실은 우리가 온다고 나중에 사용 못하게 문을 잠갔다. 화장실 한 번 쓰려고 담을 넘고 밤 12시에야 몰래 씻으러 가기도 했다. 마음 편히 화장실 사용하는 게 꿈이었다."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2010년 '불법파견 정규직화'에 노사합의가 이뤄졌다. 1895일 만이다. 더 이상 화장실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됐다. 딱딱한 바닥에서 한뎃잠을 잘 이유도 사라졌다. 다시 편안한 집으로 돌아갈 생각만 하면 됐다. 꿈만 같았다. 기륭전자 비정규직 문제는 이렇게 마침표를 찍는 줄 알았다.

[집 5 : 전셋집] 욕실이 딸린 화려한 빌라?

▲ 회사가 야반도주한 사무실에 농성장을 차린 기륭전자분회 조합원들. ⓒ 정택용


전셋집을 얻었다. 방 2개에 거실, 욕실이 딸린 빌라다. 그의 집은 아니다. 조합원 10명이 가진 돈을 다 털어 마련한 집이다. 회사는 목숨 걸고 얻어낸 합의를 한낱 종잇장으로 취급했다. 온몸으로 외친 비정규직 철폐 절규에 기업과 정부는 묵묵부답했다. 세 든 집서 '끝나지 않는 기륭, 기륭전자 사태 이후'의 고민이 깊어졌다.

다시 거리에 섰다. 2년 6개월 만에 '정규직'을 달고 돌아온 일터는 차가웠다. 회사는 "생산라인이 없다"며 일을 주지 않았다. 월급도 안줬다. 심지어 2013년 12월 30일엔 야반도주까지 했다. 어이가 없었다. 다시 싸움이 시작됐다. 거리가 집이 됐다.

"명절 때면 집이 그리웠다. 식구들이 편하게 둘러앉아 명절음식도 먹고 얘기도 하고...1895일간 싸우면서 한 번도 명절에 집에 가지 못했다. 농성장을 지켜야 했다. 그럴 때면 '난 언제쯤 식구들과 마주앉아 편하게 밥 먹을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들어 속으로 울었다."

한때 청와대를 집으로 꿈꾸기도 했다. 2012년 대선에서 노동계를 대표해 '기호 5번'을 달고 대통령 선거 후보자로 출마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팔자에도 없는 일"이었다.

"기륭전자 장기투쟁을 통해 정치가 삶을 쥐락펴락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진짜 노동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고자 출마했다. 돈보다 생명을 우선시하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집을 좁혔다. 싸움은 길었고 전세계약 기간은 짧았다. 집값은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데, 전세금은 나날이 줄어들었다. 방은 작아지는데, 비정규노동자는 늘어갔다. 10년간 변화가 없는 것은 서슬 퍼런 노동시장뿐이다.

[집 6 : 장그래의 집] '바보언니'가 짓는 비정규직 쉼터

'센 언니?' 알고보면 '바보언니'김소연 집행위원의사진 속 모습은 이렇다. 시위현장, 울부짖는 얼굴, 삭발한 얼굴, 깡마른 몸...죄다 세다. 하지만 사진 밖에서 만난 그는 어떤 계산도 하지 않고 남을 위해 행동하는 '바보언니'였다. ⓒ 정대희


집을 좁히고 좁히다 끝내, 지금 살고 있는 풀옵션 원룸으로 옮겼다. 그나마도 지인의 도움을 받아 관리비만 해결하면 되는 단칸방이다.

내 집 마련. '집 없는 설움'을 겪은 이들에겐 오늘도 술잔을 들이키게 하는 네 글자다. 하늘아래 아파트가 촘촘한데도 그렇다. '하늘에 별 따기'보다 어려운 게 내 집 마련이다. '비정규직노동자의 집짓기'를 제안 받고 '택도 없는 소리'라고 대답한 이유다.

"무모한 일이라 생각했다. 비정규직노동자의 집이 필요하단 말엔 공감하나 돈이 문제였다. 기륭전자 조합원들이 얻은 전셋집이 비슷한 역할을 했으나 해마다 오르는 전세가를 감당할 수 없었다. 2년마다 하는 이사비도 상당했다. 집을 짓지 않고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주춧돌이 모였다. 셋째 딸을 낳고 받은 출산지원금 70만 원을 보내온 사람. 사고 싶었던 외투를 포기하고 후원을 결정한 사람. 딸의 결혼선물로 주춧돌 계좌를 선물한 사람. 민주노총과 금속, 공공법률원 노동자, 사법연수원노동법학회, 쌍용차법률지원단 변호사, 철도노동조합...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장그래의 집짓기'에 투자했다. 모금 3개월 만에 목표액 20%가 모였다. 어안이 벙벙했다.

장그래의 집이 지어진다. 장기투쟁자와 서울상경투쟁자의 쉼터가 될 집이다. 의료와 심리치료를 맡을 방도 마련된다. 강연을 듣고 전시회도 보는 마당이 생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거리에서 밤을 지새우는 노동자이 바람을 피하고 차가운 바닥에서 한뎃잠을 자는 노동자들에게 따뜻한 잠자리를 내어줄 쉼터 같은 집이다. 생명이 살아 숨 쉬고 우리사회 희망이 씨앗을 키우는 공간이기도 하다. 세상을 바로 세우는 주춧돌이 돼 달라."

'센 언니'가 아니라 '바보언니'였다. 어떤 계산도 하지 않고 나보다 남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 진심으로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려는 사람. 그를 보고 '장그래의 집'에 벽돌 한 장을 올렸다. 이 글을 끝맺기 전, 그에게 정기후원 가입서를 작성해 사진을 찍어 문자메시지로 보냈다. 늦지 않았다. 당신도 주춧돌이 되고 후원자가 될 수 있다. (후원하러 가기)
덧붙이는 글 문의 및 주춧돌∙CMS 후원회원 신청 : 이메일: nodonghouse@gmail.com
홈페이지 : http://laborhouse.kr/
스토리펀딩 : https://storyfunding.daum.net/project/1070(비정규노동자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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