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운동'으로 끝난 필리버스터 결국 뒤에서 웃는 자는 누구인가
[게릴라칼럼] 더민주의 필리버스터 중단, 왜 오판인가
▲ 국회의장에 의해 직권상정된 테러방지법을 막기 위한 야당의원들의 무제한토론(필리버스터) 8일째인 지난 1일 오후 여의도 국회에서 필리버스터 중단 여부를 논의하기 위한 더불어민주당 의원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김종인 대표가 도착하고 있다. ⓒ 권우성
"테러방지법 필리버스터 중단, 죄송하다."
2일 오전, 더불어민주당(아래 더민주) 김종인 비상대책위 대표의 발언이 '속보'로 타전됐다. 이틀 전인 2월 29일 밤, "이러다 선거 망하면 책임질 거냐"며 호통을 쳤다던 그다. 그 시각, 더민주 이종걸 원내대표는 38번째 마지막 주자로 필리버스터 발언을 이어가고 있었다. 역시나 "죄송 또 죄송"으로 시작해, 테러방지법을 직권상정한 정의화 국회의장에 대한 원망과 질타가 이어졌고, '국민저항권' 운운하며 "국민이 심판해 달라"는 레토릭이 반복됐다.
97주년 3.1절 이튿날, 세계 최장기 기록을 세우며 대한민국 민주주의사에 있어 커다란 족적을 남긴 야당의 필리버스터가 그렇게 막을 내리려고 한다. 앞서 중단 소식이 알려진 지난 2월 29일 밤부터 3.1절 하루, 필리버스터 중단에 대한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더민주 내부에서는 물론이요,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그리고 "저의 정치적 운명을 걸었다는 비장한 심경"으로 필리버스터를 제안했다던 이종걸 원내대표.
"정말 잘못했습니다. 국민 여러분 정말 죄송합니다. 저 이종걸, 그리고 한 두사람의 잘못으로 185시간 동안 28분의 의원들이 보여주신 열정과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제가 한 단어 한 순간으로 날려버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 정말 죄송합니다. 정말 죽을 죄를 졌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이종걸 원내대표의 '사무적'이고 '원론적인' 사과와 토론은 감동도, 공감도 없었다. 이후 필리버스터에 나선 더민주 의원들의 발언 내용을 구구절절이 정리 반복해주고 있었다. 테러방지법을 '테러빙자법'으로 바꿔 부른 '정리해 주는 남자' 이종걸.
그의 역사적인 마지막 필리버스터 발언은 '사과'와 '뒷북', '남 탓'과 '변명'으로 점철돼 있었다. 이렇게 혁신과 변화, 인권과 열망이 담겼던 필리버스터의 마무리가 그렇게 허망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야당이 잘못했다"는 '죄송 프레임'이 구축되고 완성되면서.
'죄송한 야당' 프레임으로 마무리되는 필리버스터
▲ 마지막 주자로 나선 이종걸 '울먹'2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테러방지법 저지를 위한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에 나선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선거법 처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필리버스터를 중단하게 됐다"며 "국민들에게 용서를 구할 때까지 서 있겠다"고 말한뒤 울먹이고 있다. ⓒ 남소연
그 사이, SNS 상에서는 "필리버스터가 제일 지루한 토론으로 마무리되고 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불출마 등 책임은 없고 '말'만 있는 발언에 질타가 이어졌다. 필리버스터가 그렇게 더민주의 총선 '선거 운동'으로 마무리되고 있었다. 누구의 잘못인가. 또 무엇이 잘못인가. 어찌하여 '죄송한 야당' 프레임으로 필리버스터가 마무리돼야 하는가.
김종인 대표를 위시한 비대위가 지시하고, 일부 의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종걸 원내대표가 수용한 '필리버스터 중단'. 다소 급작스럽게 이뤄진 이 중단의 근거에는 김종인 대표가 언급한 "역풍"과 "선거법 지연 책임론"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 필리버스터의 한계는 여야 의원들은 물론 '마이국회텔레비전' 시청자들 모두 명확하게 인식하고 염두에 두고 있던 전제와도 같다. 지상파 방송과 보수언론의 무관심과 공격을 예상하지 못했다면 더민주 지도부가 나이브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오히려 필리버스터가 발굴하고 결집시킨 젊은층과 야당 지지층은 공영방송과 조중동 등 보수언론을 버린 지 오래다. 심지어 이들은 네이버 뉴스의 뉴스편집까지도 신뢰하지 않는다.
김종인 대표와 비대위가 그토록 신경 쓴 여론조사 결과나 기존 언론 보도와 밀접하기는커녕 이를 믿지도, 보지도 않는 층이라는 얘기다. 오히려 필리버스터의 지지층은 테러방지법의 해악과 실상을 자각하는 것과 더불어, 그 악법의 입법을 저지하기 위한 야당의 노력과 능력을 보고 싶어했다. 그 열망과 함께 필리버스터는 '무능한 독재 대통령 vs. 전문적이고 경험과 진심을 갖춘 민주주의 필리버스터 야당 의원들'이란 대결구도를 만들어줬다. 그 결과, 젊은층과 지지층의 호응과 결집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김종인 대표와 비대위는 오로지 기존 언론과 여론조사의 현재만 보고 '역풍'을 예단했다. 새누리당으로부터 "셀프 중단"이란 비아냥을 들으며 허망하게 중단한 필리버스터의 결말과 함께 과연 '순풍'을 맞을 수 있을까. '가만히 있으라' 시위의 제안자이자 노동당 비례대표 예비후보인 용혜인 후보의 다음과 같은 질문에 김종인 대표와 비대위, 더민주 지도부는 무어라 대답할 것인가.
"선거를 치르기 위해서 국민을 통제하고 '테러방지법'을 통과시키게 되었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은 무엇을 하기 위해 선거에 나가겠다는 것입니까. 국민을 위해 정치를 하는 것입니까, 정치를 하기 위해 국민이 필요합니까."
'이중적'인 박영선의 눈물
▲ 눈물 흘리는 박영선 의원국회의장에 의해 직권상정된 테러방지법을 막기 위한 야당의원들의 무제한토론(필리버스터) 8일째인 1일 오후 국회본회의장에서 필리버스트를 하던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여당과 거대정보기관이 파놓은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필리버스터를 중단할 수 밖에 없다" "과반 의석을 주시면 국민여러분이 원하는 젊은이들에게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 권우성
선거구 획정과 총선을 앞둔 현실론을 십분 감안하더라도, 비대위를 포함한 더민주 지도부의 오판이 필리버스터를 통해 형성된 야당 국회의원들에 대한 호응과 신뢰를 날려버린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더민주 입장에서는 일주일 넘게 지속된 필리버스터 기간 동안, 새누리당만 쳐다보지 말고 꾸준히 '잘 지는 필리버스터'를 준비하는 동시에 대여와 청와대에 대한 압박의 수위와 공세를 높이는 양면 작전이 필요했을 터다. 하지만 필리버스터의 끝은 눈물과 호소, 변명과 남 탓이라는 기존 정치의 낡고 낡은 이미지로 귀결됐다. 박영선 의원의 눈물이 대표적이다.
"국민 여러분, 저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 뭡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저희가 그것을 다 압니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저희가 이 필리버스터를 중단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총선에서 이기기 위해서입니다. 총선에서 국민 여러분이 과반의석을 주시면 국민 여러분이 원하는, 젊은이들에게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겠습니다. 저희를 믿어주세요, 저희들 할 수 있습니다."
3.1절 저녁, 필리버스터에 나선 박영선 의원의 발언 중 일부다. 누구는 "박근혜 대통령을 닮았다"던 박영선 의원의 눈물 어린 호소는 그러나 어떠한 신선함도 주지 못한 채 '선거운동'과 '기존 정치의 답습'이란 최악의 평가를 낳고 있다.
그 눈물이 여당 지지자들에게, 중도층에게 어떤 위화감을 주고 내부 역풍을 일으킬지 박영선 의원은 고려했던 걸까. 국회방송의 시청률이, 떨어진 필리버스터에 대한 관심으로 생중계 시청자가 적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을 것인가.
SNS 상에서 쏟아진 비난을 놓고 볼 때, 이 눈물은 필리버스터 지지층에게 특히 더 반발을 산 것으로 보인다. "필리버스터 중단을 향한 비난의 화살을 나에게 쏘라"며 "제 발언이 끝나면 트위터, 인터넷 댓글창에 제 비난이 넘쳐날 것이다. 국정원의 댓글 팀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으니까"라는 발언 역시 화를 불렀다. 비대위에서 김종인 대표와 함께 이종걸 원내대표에게 필리버스터 중단을 압박했다고 알려진 박영선 의원이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게다가 이 같은 발언이 나온 것은 바로 전날인 2월 29일 3당 대표 초청 국회기도회에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함께 참석, "차별금지법과 동성애법, 이슬람 관련 법을 반대한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알려지면서 필리버스터 지지층의 거센 반발을 산 직후였다. 테러방지법을 반대하는 동료 의원들의 필리버스터가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강조하던 그 순간에 말이다.
29일은 보수 기독교 표를 구걸하고, 3.1절에는 필리버스터 단상에서 과반수 야당을 만들어 달라며 표를 달라던 박영선의 눈물. 국민의당 창당 전후 박영선 의원이 '탈당 고려'를 흘리며 주가를 올렸던 전력은 둘째 치더라도, 야당의 변화를 원하는 지지층이라면 그의 눈물을 기존 정치의 구태와 정치쇼로 받아들이지 않았겠는가.
필리버스터의 허망한 결말, 뒤에서 웃고 있는 자는 누구
▲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원유철 원내대표, 서청원 최고위원이 지난달 25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 남소연
"아무리 생각해도 더민주 비대위의 필리버스터 중단 요청은 급전직하 (急轉直下) 경착륙(hard landing) 출구전략이었다. 지지자와 소통하며 사전 양해를 구하는 방식의 다른 출구전략이 있는데 말이다. 순서가 뒤바뀌었다. '출구'는 하였으나 다친 '승객'이 많다. 특히 마음을. 후과(後果) 상당할 것이다. 지도부의 '하심'(下心)이 필요한 시간이다.
재차 말하지만, 필리버스터 중단 찬반은 명분론 대 현실론의 문제가 아니다. 현행 제도에서 필리버스터의 한계는 다 알고 있다. 요체는 결정을 내리고 집행하는 과정에서 원내 의원 및 원외 지지자들과의 소통 부재, 그리고 열기와 질서를 유지하는 퇴각 방법에 대한 고민의 부재다. 이 점 외면하고 비판자들을 정치를 모르고 운동권 사고에 벗어나지 못한 강경파로 규정하고 간단히 넘어가려 하면 안 된다."
서울대 조국 교수의 일갈이다. "필리버스터는 총선에서 경제와 민생 이슈로 제대로 싸우기 위해 지지층을 모으고 결기를 다지기 위해 더 필요하다"고도 했다. 더민주의 현재 출구전략에 대해 "급전직하의 경착륙"이라며 우려를 표명한 것이다.
맞다. 이렇게 어정쩡한 중단이 아니라, 경제과 민생 프레임으로의 전환이 필요했다. 2월 28일 새벽, 유투브 생중계 창을 초토화시켰던 더민주 홍종학 의원의 발언이 그 증거다. 경제전문가인 그는 테러방지법이 결국 경제 악화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으며, 박근혜 대통령의 집권이 '경제비상시국'을 불러왔음을 요목조목 현실적으로 설파한 바 있다.
그 '테러방지법=민생과 경제' 프레임에 문제에 '마국텔' 시청자들은 폭발적으로 반응했다. 김종인 대표가 우려한 '경제와 민생' 이슈가 결국 필리버스터 안에도 내재돼 있었던 셈이다.
그렇게 경제, 민생프레임으로 전환하며 필리버스터를 강력하게 이어가는 것이 순서였다. 그 이후 지금과 같은 잡음과 반발이 아닌 깔끔한 마무리를 통해 지지층 결집과 젊은층 발굴을 이끌어 내야 했다.
맞지도 않은 역풍을 걱정하기보다 주어진 천금의 기회를 통해 총선에 필요한 동력을 확보해야 했다. 김종인 대표의 인식대로라면, 필리버스터를 며칠 더 한들 주요 언론에 크게 보도가 되는 것도, 여당 지지층의 표심에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결과적으로, 이대로라면 국민들은 야당 의원들이 필리버스터를 통해 낱낱이 까발린 테러방지법의 공포와 위협 속에 살아가게 됐다. 그리고 김종인 대표는 2일 오전 '야권 단합'을 호소했다.
진보네트워크센터·참여연대 등 5개 시민단체는 2일 오후 필리버스터 중단 결정을 비판하는 공개토론회를 연다고 한다. 허망함과 정치혐오가 넘실거리는 필리버스터의 결말을 두고, 과연 뒤에서 웃고 있는 자는 누구일까.
2일 발표된 여론조사기관 알앤써치의 3월 첫째 주 정례 여론조사. 필리버스터에 대한 지지가 여전했던 2월 28일과 29일, 양일간 조사한 이 여론조사에서 더민주의 정당지지율은 지난주보다 3.8% 상승한 24.5%였다.
37.5%의 새누리당의 1위 자리는 요지부동이었지만, 무려 7.4%나 빠졌다. 필리버스터에 극도로 소극적이었던 국민의당은 지지율이 고작 8.9%였다. 자, 이래도 김종인 대표는 역풍만을 걱정한 필리버스터 중단이 맞았다고 우길 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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