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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금도 춤 통해 전통예술의 소중함 보여주고 싶어"

황대욱 군산예총 회장에게 듣는 '장금도 명인' 이야기

등록|2016.03.03 17:10 수정|2016.03.03 17:10

▲ 제자(신명숙 교수) 작품발표회에서 민살풀이 시범을 보이는 장금도(2015년 12월) ⓒ 조종안


국내 유일의 민살풀이(수건 없이 추는 살풀이춤) 전승자 장금도(張錦桃) 명인. 그의 춤 세계를 재조명하는 행사(공연, 사진전, 토론회 등)가 전북 군산에서 처음으로 열린다. 장금도는 군산 소화권번(일제강점기 기생조합)을 졸업한 이 시대의 마지막 예기(藝妓)이다.

이번 행사는 <마지막 예기 장금도의 춤 재발견>이란 타이틀로 오는 3월 26일(토) 오후 4시 군산시 장미동 '장미공연장'과 '미즈커피(북-카페)'에서 열린다. 이는 장금도 명인의 전라북도 지정 무형문화재 추진 사업의 하나로 사단법인 군산 예총(회장 황대욱)이 주최하고 군산에서 발행되는 월간지 <매거진군산>(대표 이진우)이 주관한다.

장미공연장 공연은 신명숙(57) 교수 초청공연, 장금도의 일생을 조명한 동영상 상영, 즉석 토론회 순으로 진행된다. 미즈커피에서는 장금도의 발자취와 일제강점기 권번 관련 사진 30~40점이 1개월(3월 26일~4월 25일) 동안 전시된다. 신 교수는 60~70년대 리틀엔젤스무용단 출신으로 1999년부터 장금도 명인과 사제의 연을 맺어오고 있다.

군산의 마지막 예기 장금도 발자취 

▲ 아들과 나들이하는 장금도(20대 모습) ⓒ 장금도


장금도(89)는 1928년(호적 1929년) 지금의 군산시 중앙로 2가에서 태어났다. 열두 살 때 군산 소화권번(4년제)에 들어가 회초리를 맞아가며 예의범절과 가무(歌舞)를 익혔다. 최창윤에게 승무, 김백룡에게 부채춤, 도금선에게 민살풀이를 전수받는다. 열다섯에 군산극장에서 초연(初演)을 하였고, 군산 명월관 무대에서 치러진 예기 자격시험에서 소리(唱)와 춤 모두 수석으로 졸업한다.

어린 나이에 가무(歌舞)로 군산을 주름잡았던 장금도. 그는 일제의 '처녀공출'(일본군 위안부)을 피해 열일곱에 결혼하면서 활동을 접었다가 광복 후 재개한다. 서울에서도 활동했던 그는 스물아홉에 소리와 춤을 작파하고 집에서 숨어 지낸다. 울타리에 갇혔던 민살풀이는 정범태 사진작가의 집요한 추적과 설득으로 장금도가 1983년 국립극장 <명무전>에 초대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그 후 간간이 중앙 무대에 오르면서 해외 초청공연도 다녀온다. 

대표작으로 '한국인의 넋이 담긴 민족의 춤' 명인전(1990), 제1회 서울세계무용축제 명무 초청(1998), 내일을 여는 춤-우리 춤 뿌리 찾기(2002),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2004), 여무(女舞) '허공에 그린 세월'(2004), 남무(男舞) '춤추는 처용아비들' 특별출연(2005), 제8회 서울세계무용축제 초청 '전무후무'(2005), '전무후무' 프랑스 초청공연(2006), '춤'-이 땅의 숨은 춤-(2011), 작별의 춤 해어화(2013) 등을 꼽는다.

"장금도 명인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지정 위한 관심 필요"

▲ 취임 1년, 감회를 밝히는 황대욱 회장 ⓒ 조종안


지난달 18일 오후 군산 예총 사무실에서 황대욱(70) 회장을 만났다. 황 회장은 "장금도 관련 행사를 통해 어머니의 자식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 우리 전통 문화예술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인가를 보여주고 싶다"고 말한다. 아래는 황 회장과의 인터뷰를 정리한 것이다.

- 취임 1주년을 맞았다. 전임 회장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나는 등 우여곡절 속에 출발해서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지난 2015년은 다사다난했던 해였다. 어려움 속에서도 업무를 차분하게 객관적으로 처리해서 안정된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과분한 격려도 받았다. 중국 산동성 위해시와 예술교류 협약, 충남 서천 예총과 교류협약, 군산 미군비행장 장병 위문공연 등 사업도 다양하게 진행했다. 성원을 아낌없이 보내준 시민과 회원여러분에게 감사드린다.

회장을 맡으면서 '창작하는 예총, 혁신하는 예총, 소통하는 예총 등 예술인이 즐겁고 시민이 행복한 예총을 만들겠다는 슬로건으로 출발했다. 효율적인 운영과 목표 수행을 위해 사무실을 사랑방으로 만들었는데 성과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어 기대감이 높다. 주변 사람들이 '군산 예총이 변화되고 있다'고 말할 때 보람을 느낀다."

▲ 군산 미군비행장 장병 위문공연 모습 ⓒ 군산예총


▲ 신명숙 교수의 민살풀이 춤사위 모습 ⓒ 조종안


- 올해 계획된 핵심 사업 몇 개 소개한다면?
"지난해보다 사업이 늘어 매월 행사가 예정되어 있다. 의미 있는 사업으로 장금도 관련 공연 및 사진전(3월), 중국 심양시 방문공연(4월) 군산 미공군전투비행단 위문공연(6월) 등이다. 9월 말쯤 개최될 군산 시간여행 축제 추진위원장을 맡아 더욱 바쁠 것 같다.

그중 장금도 관련 행사는 전라북도 지정 무형문화재 추진사업의 하나로 신명숙 교수를 초빙해 공연(민살풀이, 부채춤, 화관무 등)을 가질 예정이다. 신 교수 역시 50년을 춤과 함께 살아온 최고의 '춤쟁이'이다. 그는 우리 전통예술을 해외에 알리는 리틀엔젤스 무용단 출신으로 현재는 대진대학교 무용학부 학부장을 맡고 있다.  

사진전시회에는 20대 장금도 모습을 비롯해 동료들과 여름 피서지에서 찍은 기념사진(30대), 친목계원들과 속리산 법주사에서 찍은 사진(40대), 시골 부잣집 환갑잔치 마당 사진, 회갑연에 초대되어 헌수를 도와주는 모습, 1980년대 이후 최근까지 중앙무대와 해외공연 모습, 군산 소화권번 소속 기생들 단체 사진, 일제강점기 일본식 요정 등 그의 발자취가 느껴지는 사진 30~40점을 선보인다."

▲ 장금도 명인의 민살풀이 공연(2000년대) ⓒ 김형관


- 이번 행사는 전라북도 지정 무형문화재 추진 사업의 하나라고 했는데? 
"장금도 명인은 15세 때 군산극장에서 초연할 정도로 기예(技藝)가 특출했다. 그는 권번에서 회초리를 맞으며 소리와 춤을 배운 '생짜 기생'으로 군산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1983년 서울 국립극장 <명무전>을 비롯해 다양한 중앙 무대에 초대됐고, 프랑스, 일본 등으로 초청공연도 다녀왔다. 그처럼 유명한 분이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먹고 살기 위해 가무를 배워 세계에 이름을 떨치는 '춤꾼'이 되기까지, 그의 일생을 자료를 통해 접하였다. 한 대목 한 대목 읽으면서 한 권의 책으로 엮어도 될 만큼 가슴 절절한 사연을 지닌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험난했던 시절 우리 전통예술을 전승하면서 군산을 민살풀이와 부채춤의 본고장으로 만든 자랑스러운 예기이자 예술인이다. 그는 구순을 앞두고 있다. 전라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도록 군산시와 시민의 관심이 필요할 것 같다." 

"민살풀이, 부채춤 모두 귀한 선물이자 문화·관광콘텐츠"

- 장금도의 춤을 통해 어머니의 자식 사랑과 전통 예술의 소중함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는데?
"일제강점기 군산에는 명월관을 비롯해 많은 고급요릿집(요정)이 있었다. 그곳이 예기들의 공연 장소가 된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 시절 요정이 지금의 예술회관 역할을 하였다. 광복 후 장금도 명인이 요정으로 놀음(공연) 나갈 때 인력거 두 대가 필요했다는 대목에서는 가슴이 찡했다. 다른 인력거에는 젖먹이가 타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머니의 지극한 자식 사랑을 재확인하는 순간이었다."  

▲ 군산 보성예기치옥 기생들의 토산장려운동을 알리는 1923년 2월 16일 동아일보 기사 ⓒ 조종안


- 예기를 기생 출신이라고 천시하는 분위기가 지금도 남아 있는 것 같다.
"기생을 말하면 창기(娼妓·삼류 기생)를 떠올리는 경향이 있는데, 어느 분야든 부정적인 면은 존재하므로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기생들이 천 년을 이어온 교방문화, 즉 우리의 전통 예술을 계승 발전시킨 공적을 무시할 수 없다. 군산 소화권번 출신 예기들이 1930년대 초 경성방송국에 출연하여 공연했다는 신문 보도는 당시 지방 예기들의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는 기록이기도 하다.

또한, 예기들은 일제강점기 대중스타였다. 예기 출신 가수와 배우가 많았던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대한제국 시절 매국노 이지용(을사오적)을 꾸짖고, 국채보상운동에 앞장서 나서는가 하면 기미년(1919) 삼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는 등 논개 정신을 계승한 의기(義妓)도 많았다. 1920~1930년대 군산 기생들도 금연운동, 토산품 장려, 이충무공 사업 성금 기탁, 경영난에 처한 조선인학교 돕기 자선공연 등 다양한 사회운동을 펼쳤다는 자료가 전해진다."    

- 국내 무용 전문가들은 '민살풀이 본고장은 군산'이라고 말한다. 그에 대한 생각은?
"예술을 하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 자부심을 느낀다. 부채춤 고향도 군산 소화권번으로 신명숙 교수가 장금도 명인의 춤사위에서 발견했다고 전한다. 민살풀이도, 부채춤도 아주 귀한 문화·관광콘텐츠로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자 숙제이기도 하다. 문제는 어떻게 계승 발전시켜 나가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 이번 장금도 관련 행사도 기생에 대한 잘못된 인식 전환과 자긍심을 갖는 동기부여가 됐으면 한다."

"군산의 예술 발전, 시민의 관심과 격려 필요해"

- 일제강점기 군산에 권번이 2개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다가 이번에 3개로 확인됐다. 그동안 모르던 예기들의 다양한 활동도 밝혀졌다.  
"일제강점기 인구 5만도 안 되는 군산에 권번이 세 개(보성권번, 군산권번, 소화권번)나 있었다는 뉴스를 보고 놀랐다. 군산의 유곽과 요정이 풍성했던 것은 쌀 수탈의 거점도시인데다 미두장(미곡취인소)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미두에서 돈을 날리고 스트레스가 쌓인 미두꾼들과 정미업자들이 밤에 유곽과 요정에서 술로 시름을 달래며 정보도 교환했다고 한다.

한편 권번이 많았다는 것은 전통 예술이 그만큼 활발했고, 더불어 전승자도 많이 배출됐음을 암시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자료에 따르면 영남 출신 김애정(金愛貞) 명창도 마산 남선권번에 들어갔다가 3년 만에 군산 소화권번으로 옮겨 졸업하였고, 김유앵(金柳鶯) 남도 명창도 군산 소화권번에서 가무를 익혔던 것으로 전해진다. 광복 후 국악원이 전국의 어느 도시보다 일찍 만들어진 것도 그에 연유한다고 본다.

- 앞으로 이루고 싶은 사업은?
"특별히 구상하거나 계획한 사업은 없다. 다만, 시민과 회원들에게 인정받는 예총이 되도록 모든 역량을 쏟으려고 한다. 회원들의 친목 도모와 창의적인 프로그램 개발, 예총 산하 8개 지부 사업 지원 등 군산 예술문화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겠다.

회장을 맡은 후 다양한 국내외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렀다. 올해는 그보다 많은 사업이 계획돼 있다. 예술인들의 재능기부 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싶다. 대상은 환경이 열악한 단체와 학교, 소외계층(장애인, 다문화 가정 등)이다. 지역 예술 발전은 예술인들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장금도 명인 행사도 마찬가지다. 시민의 격려와 관심을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와 매거진군산 3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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